<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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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전선에서 연이어 밀려난 20대 후반의 취준생 미쿠리(아라가키 유이 분)은 계약직 인턴 자리에서도 쫒겨나고 만다. 절망도 잠시, 이것저것 간섭하고 일 벌이기 좋아하는 아빠(타카시 우카지 분)의 소개로 30대 it기업의 직원 츠자키(호시노 겐 분)의 가사도우미로 알바를 하게 된다. 다행히도 미쿠리는 츠자키의 집에서 가사일에 보람을 느끼고 츠자키도 미쿠리의 밥과 청소가 나쁘지 않다고 느끼지만, 부모님의 충동적인 이사계획으로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게 돼버린다. 미쿠리는 츠자키와의 식사 자리에서 뜬금없이 계약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자신이 이 집에 머물면서 가사도우미 일을 계속하되, 외부에는 결혼을 한 것처럼 꾸미자는 것. 미쿠리의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츠자키는 당황하고 미쿠리도 자신의 말을 잊어달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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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에 방영된 일본드라마를 지금에서야 보게 되었다. 사실 1화를 시작하고 빠진 지는 바야흐로 5개월가량 된 것 같은데 그놈에 '드라마 다 못 보는 병'이 도져서 겨우 마무리했다. 워낙 호평이 많았던 작품이었고 나 역시 저 병이 도질 정도로 푹 빠져있었다. 헤어지기 싫다는 건, 그만큼 애정했다는 뜻이니까. 마지막 회를 보고 나서도 후유증을 겪는 애정의 상대는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이하 니게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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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작품이 선택한 재료들이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4년이나 된 작품임에도 여전히 핫한 이슈인 결혼, 주거, 청년취업과 가사노동에 이르기까지 정말 좋은 소재들로 이뤄졌고 나름 잘 다뤄냈다. 쉽게 무거워지거나 쉽게 훈계를 두기 좋은, 혹은 이도 저도 아니게 '우리 인생 화이팅'으로 마무리 되기 십상인 만만치 않은 재료들이다. 조금 더 나아가 고민해보자면 페미니즘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 작품에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붙여보는 것이 적절한지는 확신이 서진 않는다. 그러나 워낙에 '악명'이 높은 일본 사회 안에서는 유의미한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일단 여자주인공 미쿠리의 시선과 생각을 충실히 따라가고 이는 엔딩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미쿠리의 시선과 생각은 단순히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하나?/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나?'라는 장르 특유의 익숙한 고민들에서 멈추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몇몇 재료들은 충실히, 깊게 다뤄냈다고 말할 수 있을 듯. 후반부 연애 감정이 강해지고 결국 망가지려나 싶었는데 마지막화에서도 아주 충실히 가사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채워 넣었다. 물론 중간중간 아슬아슬한 부분이 없지 않고, 고정된 성 역할들이 눈에 띄지만 용서가 가능한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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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무거운 재료들을 먼저 언급했지만 이 작품이 가진 씹덕포인트? 매력포인트?는 뭐니뭐니 해도 '귀여움'이다. <니게하지>의 이 무시무시한 무기는 기존의 알콩달콩한 로맨틱 코메디에서 보던 패턴에서 살짝 벗어나있다. 직장상사와 부하직원 관계이면서도 동거인이고, 동거인이면서도 계약결혼이란 걸 같이 숨겨야하는 동료이기도 하다. 뭐 당연히 서로의 감정이 간질간질 싹트는 중인 썸타는 관계임은 물론이다. 이런 복잡한 관계들을 적절한 상황에 던지며 알차게 구성했다. 1화부터 마무리 챕터로 들어가는 8화까지 정말 빠른 속도감으로 이야기가 몰아친다. 그리고 그 몰아침의 끝에는 엄빠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두 주인공의 귀여움이 정제되 남는다. 반짝거리는 모니터나 티비를 쓰고 있다면 헤헤거리며 웃고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섬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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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게하지>의 표현방식을 한 가지 더 말하자면 패러디를 빼놓기는 힘들지 싶다. 작품이 진행되다가 두 주인공이 상황에 맞는 다른 유명 티비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설명하는 식이다. 일본 국민프로그램들이 많지만 확실히 동아시아 정서(?)로 단박에 파악이 가능한 부분이 많아 크게 무리는 없었다. 이해를 돕자면, 미쿠리의 마음을 심쿵하게한 츠자키의 한마디 1위를 <인기가요>처럼 순위로 만들어 보여준다던지,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인생극장>포맷으로 보여주며 진짜 이금희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나온다던지 하는 식이다. 생각보다 감정이입을 깨지 않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돕는다. 선거운동 패러디나 스포츠 인터뷰, <백분토론>형식 등 포장도 다양하다. 우스꽝스런 상황이 더해지며 앞에서 언급한 귀여움이 묻고 떠블로 가게 되는 효과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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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문단들에선 결국 메세지와 형식, 구성 등을 이야기했지만, 결국 사랑의 감정을 담은 로맨스 장르의 키포인트는 '공감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런 관점에서 <니게하지>는 여러 톡톡 튀는 재료들을 차분히 잘 묶어내는 데 성공했다. 연애와 취직, 결혼과 가사와 같은 2,30대가 절실히 느끼는 공감 포인트들로 그릇을 다지고서는, 상대를 통해 나를 보고 나를 통해 상대를 보는 '사랑하는 행위'만이 가진 그 두근거림을 잘 담아냈다. 누군가는 결국 뻔하게 흘러갔다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고민한 흔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숱한 감정의 파도에 정신 못 차리다가, 자신의 못남에 지지리도 자책하다가, 지나가는 말한마디에 행복이 존재한단걸 느끼는, 그 낯간지런 사랑에 우리 모두 뻔해 본 적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