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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간감 Apr 30. 2020

[어땠어요?] 어떤 삶에 대한 예의 <작은아씨들>

<작은 아씨들> 리뷰

 요즘은 코로나19로 밀린 감이 있지만 얼마 전까지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 수상은 어딜가나 뜨거운 감자였죠. 시국이 시국인지라 국내에 조용히 개봉한 오스카 의상상 수상/ 각색, 작품, 여우주연, 여우주연, 음악 노미네이트에 빛나는 <작은 아씨들>을 보고 왔습니다.


 남북전쟁이 한창인 미국,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조(시얼샤 로넌 분)는 신문에 선정적인 소설을 기고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홀로 뉴욕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동부 시골 출신인 그는 셋째 베스(엘리자 스캔런 분)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한편 첫째 메그(엠마 왓슨 분)는 부모님 곁에서 신혼집을 차리지만 가난한 남편을 만나 생활고에 시달리며 아이들을 키우고 있죠. 화가가 되겠다며 부자 고모를 따라 유럽으로 간 넷째 에이미(플로렌스 퓨 분)는 우연히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 로리(티모시 샬라메)를 만나게 됩니다. 각자 어린 시절의 추억을 품고 사는 자매들은 무언가 홀린 듯 다시 고향으로 모이게 됩니다.


 <작은 아씨들>들의 구성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복잡함'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소설을 쓰는 둘째 조의 시점이 중심이 되긴 하지만 영화에는 너무나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며, 다 각자의 무게를 지니고 움직입니다.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면서도 화려한 사교계에 동경을 품은 첫째 메그, 아버지의 자켓을 걸치고 사실상 오빠 역할을 하며 시대가 가두어 놓은 여성이란 벽을 부수고 싶어 하는 둘째 조, 인형을 살뜰히 보살필 만큼 순수하고 조용하지만 넷중 가장 이성적이고 어른스러운 셋째 베스, 여성스러움을 동경하고 부자와의 결혼을 꿈꾸지만 무엇이든 최고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은 넷째 에이미. 우리가 실제 삶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어느 캐릭터 하나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각자의 곡선과 아름다움, 편협함과 너그러움을 품은 <작은 아씨들>속 인물들은 작가에 의해 쓰여지는 '캐릭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람'으로 숨 쉬는 인상을 줍니다.


 이런 인물에 대한 예의는 주인공 격인 자매들만을 살뜰히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 할아버지를 둔 주류이지만 동시에 고아이며 혼혈이고 외톨이기도 한, 그래서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 오롯이 인정해준 네 자매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로리는 자매들에게서 반 발짝 떨어져 그들을 보게끔 이끄는 존재입니다. 여성이라는 한계로 시대에 부수어지는 그들의 삶을 그저 안타까이 바라보다, 무너지고, 사랑하며 논쟁하는 로리의 시선은 이야기의 품을 넓힙니다. 자매의 삶을 비추는 깊이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런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남성의 시선을, 자매들을 진실하게 아끼는 로리의 시선을 영화는 잊지 않았습니다. <작은 아씨들> 속에는 시대의 부조리를 상징하는 무리한 악역이 뜬금없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캐릭터를 끼워 넣는 대신 그들을 차근차근 이해하고 사랑하는 이의 시선으로 관객을 이끌었고, 이러한 로리의 시선은 오히려 시대와 여성의 삶을 적확하게 끌어내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로리의 할아버지 로렌스(크리스 쿠퍼 분)과 어머니(로라 던 분), 대고모(메릴 스트립 분) 등등 135분이란 시간 안에 함부로 쓰여지는 조연은 <작은 아씨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물에 대한 감상과 평가가 가능할 만큼 구체적이며 입체적입니다. 교과서적이라는 칭찬은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교과서도 이 작품만큼 작품 속 인물에 대한 예의를 지킨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는 씬을 구성하는 방법에서도 상상치도 못한 선택을 했습니다. 조가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부터 영화는 7년 전 유년을 보낸 네 자매의 이야기와 현재 자매들이 겪는 이야기를 번갈아 가며 보여줍니다. 이름조차 외우기도 힘든 많은 인물들과 사연들이 꽉 차 있는데, 이런 재료들의 시간순서마저 뒤섞어버렸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7년 전과 현재를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 구성이 전혀 무리하지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이 복잡한 인물 구도를 이해하고 빠져드는 데 도움이 되는 훌륭한 장치로 동작합니다. 현재의 삶과 과거의 삶이 어떠한 이유와 결과를 낳았고 그 과정속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표현했는지 차분히 표현하는 <작은 아씨들>의 몇몇 씬들은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히 효과적입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되 지루하지 않고 쿵쿵거릴 만큼 마음을 두드리되 무례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현재, 나의 시선과 동생, 언니의 시선, 나의 입장과 그의 입장을 오가는 영화는 흩어지고 뭉치기를 노련하게 반복합니다. 결국 조의 마음과 추억을 따라가는 영화는 누군가의 삶과 관객의 삶을 연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감정과 경험을 묵직하게 가져가지 않는 대신 우리 모두 삶에서 한 번쯤 만나봤을 어떤 순간들을 만나게 하는, 고루한 표현이지만 마법 같은 작품입니다. 리뷰를 쓰면서 비유를 하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작은 아씨들>의 경우에는 어떤 비유도 떠오르질 않네요. 이 자체가 온전한 삶에 대한 비유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 모두 어떤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결정하고, 후회하기를 반복합니다. 때로 그때 그렇게 되었듯 삶이 순탄하길 기대하다 손쓸 겨를 없이 망가지기도 하고, 아무나 붙잡고 원망하고 싶을 만큼 벼랑에 몰리기도 하죠. 그것이 지우고 싶었던 것이든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든 어제는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다소 부끄럽고 후회되더라도, 견디기 힘들만큼 상처받았더라도 우리의 오늘이 존중받아야 하듯이. 그 시간을 살아낸 당신이 존중받아야 하듯이 말이죠. <작은 아씨들>들이 작품 속 인물을 넘어 관객을 존중한 작품이기에 한국 관객의 존중또한 좀 더 받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코로나19를 뚫고 극장에 갈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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