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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간감 May 07. 2020

[어땠어요?] 고개를 돌려 너의 얼굴을 볼때 <벌새>

<벌새>리뷰.


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화제작으로 떠오른 작품이 있었습니다. 이후 영화는 25관왕이란 어마무시한 타이틀을 달고 다니는 다양성 영화의 대표 기대작으로 뽑히곤 했습니다. 94년의 중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김보라 감독의 <벌새>를 극장에서 만났습니다.


교육1번지 대치동의 떡집 딸 은희(박지후 분)는 반에서도 존재감이 없는 중학생입니다. 공부도 딱히, 친구도 딱히, 그렇다고 어마어마한 문제아는 아니지만 대치동 아이들 사이에선 날라리로 뽑히곤 하는 은희는 삶이 갑갑합니다. 부모님은 틈만 나면 싸우고 아이들을 심적으로 보호하지 읺습니다. 애당초 공부를 포기한 언니는 부모님 눈을 피해 놀러다니고 나름 우등생이란 첫째 오빠는 틈만나면 은희를 때리는 개차반이죠. 이렇다 할 사건이 없는 은희의 삶에 새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김새벽 분)가 문을 두드립니다. 별문제 없을 것 같던 14살 은희의 삶은 어디론가 빨려들어가듯 은희를 모험 아닌 모험으로 이끕니다.


<벌새>는 흔히 관객들이 가진 독립영화에 대한 편견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영화입니다. 음악은 자주 깔리지 않고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으며 배우들의 연기를 충실히 담는 방식의 영화입니다. <벌새>가 조금 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작은 영화의 특징을 잘 살려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겁니다. 2시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 속에 은희의 일상들을 빼곡히 채워 넣었습니다. 평범하거나 절망적이거나 폭력적이거나 사랑스럽거나 당혹스런 삶의 순간들이 일기처럼 촘촘히 적혀있습니다. 90년대나 80년대를 추억하게 하는 특별한 재미나 소품이 등장하느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아주아주 작은 일상들, 아주아주 별것인 사건들과 그렇지 않은 사건들이 뒤섞이고 휘몰아치며 관객에게 전달됩니다.


<벌새>가 이런 일상들을 재현하는 것에 그쳤다면 오히려 독립영화로서 특별한 도드라짐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이런 일상의 재료들을 한껏 영화 전반부에 흩트려 놓은 후, 차근차근 자신의 성을 쌓아가기 시작합니다. 별것 아닌 색색의 블럭들이 쌓여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듯 그저 삶을 버티는 중으로 보이는 은희의 삶은 그 어떤 방향으로도 자극적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집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어마어마한 가정폭력으로 번질 것 같지만 으레 삶이 그렇듯 다음날 아침 대충 마무리 되기 일쑤고, 14살이 타는 썸아닌 썸도 계절 따라 흔들리다 흩어지곤 합니다. 그리고 이런 <벌새>의 구성은 그대로 관객의 삶 구석구석을 노크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삶이 어제 밤을 지새울만큼 불안하다가도 금세 잠잠해지고, 잠잠하다가도 불현듯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가진 않았느냐. <벌새>는 충실하게 그 질문을 던지고 끝내 답을 받아냅니다.


<벌새>는 94년의 14살 은희의 두 계절 정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보통의 영화는 작품마다 온 평생의 삶을 다루거나, 천년의 신화를 품거나, 하루의 스침을 담아냅니다. 120분이란 시간 동안 갖은 기술과 마법으로 그 시간을 관객의 시간에 스며 넣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벌새>는 완벽하게 자신의 시간을 다뤄냈습니다. 94년이란 시대를 품되 정확히 14살이 가진 눈의 범위 안으로 관객을 당겨냈습니다. 영화처럼 벌어지지도, 영화처럼 해결이 되지도 않는, 삶 그 자체의 날갯짓을 영화는 적확하게 표현해 냈습니다. 내가 분명 겪은 일임에도 매번 낯설고, 민망하고, 힘에 겨운 그 삶 마디마디 말입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지나온 길에 눈감은 채 앞을 보고 걷곤 합니다. 어쩌면 매 순간 삶의 문턱은 앞으로도 무수히 많이 우리의 발을 찧을 것이고 우린 어김없이 욕지거리를 하며 소리를 지르겠죠. 우린 지난 삶의 턱들을 돌아보기엔 숨이 턱에 찹니다. 우리가 겪은 일들은 그저 시간이 지나면 계절이 바뀌듯 묻고 넘어가야 할 무엇에 가깝습니다. 그래야 이 엄혹한 세상서 살아남으니까요, 그래야 사람답게 산다고 우린 세상에게 배웠으니까요. 나의 얼굴과 당신의 얼굴을 속속들이 찾아내 돌아보고 보살피는 건, 다음 달 은행 이자를 걱정하는 우리에게 사치일지도 모릅니다. <벌새>는 우리보다 앞서간 영지와 은희가 우리에게 보내는 그 '사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라기 보단 목격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네요. 목격보다는 응원일지도 모르구요. 이 영화가 가진 생경한 응원에 희망이란 고루한 단어를 붙여보는 것이 이렇게 가슴이 벅찰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올해의 영화를 묻는다면 찰나의 고민도 하지 않고 <벌새>를 뽑겠습니다. 꼭 극장에서 목격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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