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땠어요?] <로켓맨> 리뷰
성추행 관련 논란으로 자리를 비운 브라이언 싱어 감독을 대신했던 덱스터 플레처 감독이 이번에는 엘튼 존을 다룹니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잘 마무리 지어 다시 한번 퀸을 각인시켰던 감독이 다시 한번 록스타 전기영화를 다뤘다기에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극장에 다녀왔습니다.
반짝거리는 악마 코스튬을 입은 엘튼 존(태런 에저튼 분)이 문을 박차고 나섭니다. 화려한 후광과 당당한 발걸음, 뭔가 취한 듯한 표정으로 존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중독 치료 모임. 상담 선생님과 다른 환우들이 적잖이 당황하지만 존은 이내 자리를 잡고 이러쿵저러쿵 자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말하던 그 순간, 어린 존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중년의 존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로켓맨>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두 축, 회상과 뮤지컬이란 도구를 가지고 관객을 만납니다. 회상의 경우 <보헤미안 랩소디>나 많은 전기 영화가 선택하는 방식이지만 <로켓맨>은 '중독치료 집단상담'이란 차별성을 더했습니다. 이는 보통의 경우 가장 빛나는 순간이나 삶의 마지막을 '현재'로 설정한 다른 영화들과 다른 선택을 하도록 만듭니다. 영화는 관객을 한명의 환우로 자리하게 하죠. 삐죽삐죽 빼어져 나온 가슴 털과 면도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턱을 드리밀고, '난 마약 했다, 술을 먹겠다' 등등 아무말대잔치를 하는 머리아픈 참가자의 위치로 엘튼 존을 자리하게 합니다. 그 후 자신이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려왔는지 차근차근 설명하는 식을 띄며 자주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보여줍니다. 깊은 수다로 들어간 술자리의 그것, 누군가의 일기장을 보게 된 그것의 느낌을 영화는 충실하게 전달합니다. 이는 영화가 엘튼존이란 스타 이야기를 하기보단 삶의 보편성을 다루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가수를 다룬 다른 전기영화와 구별이 되는 두 번째 지점은 바로 뮤지컬입니다. 엘튼 존의 노래를 존과 그 주변 인물들이 직접 부르며 감정을 전달하는 뮤지컬 영화의 톤을 영화는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노래로 대사와 감정을 전달하는 만큼 초반 감정이입에 턱이 있지만 그 턱을 넘는 순간 강하게 빨려 들어갑니다. 마치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존의 노래가 존재했다는 것 마냥 존의 가사는 각 상황에 깊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단순히 공연 장면이나 배경음으로 깔리는 것과는 또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었습니다.
사실 전기영화는 하나의 장르로 구분할 만큼 아주 보편적인 구조와 메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삶을 온전히 표현한다는 것은 일종에 선택에 가깝습니다. 어떤 부분을 보여주고 어떤 부분을 감출 것인가. 어떤 것을 말하고 어떤 것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부분에서 <로켓맨>은 아주 특별한 전기영화라 말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엘튼 존이라는 인물이 삶의 희노애락을 겪고, 전기영화에 꼭 등장하는 커다란 위기를 극복하는지 결국 그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로켓맨>의 미덕은 그런 전기영화의 미덕을 세밀하게 조각해낸 것에 있습니다. 엘튼 존이란 전설적인 인물이 가진 커다란 삶의 크기를 영화는 처절하게 깎아냅니다. 결국 그의 삶에서 가장 밑바닥을 찍고 난 뒤,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치켜든 그 순간. <로켓맨>은 그 순간을 영화의 첫 모습으로 선택했습니다. 번쩍이다 못해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자신의 못난 부분을 애써 감추려 화려한 가면속에 살아온 아티스트의 모습. 어쩌면 우리가 사랑한 엘튼 존의 모습을 영화는 필요한 곳에서만 드러냅니다. 관객을 진정으로 끌어들이는 순간은 누구나 느끼는 삶의 공허감과 지독한 외로움, 못나고 찌질한 존의 과거를 비추는,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많은 전기영화의 조각들이 온갖 역경을 겪은 인물의 위대함을 남겼다면, <로켓맨>은 존의 삶을 관객에게 접속시키는 큰 그림을 놓치지 않습니다. 온갖 생채기를 내는 삶의 순간들, 이유 없이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실수와 부끄러움을 영화는 포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수도 없이 목도하고 느껴왔던 삶의 '파인 공간', 그 자체에 온 힘을 다합니다.
평소에 배우 연기에 대한 평을 잘 하지 않는데 <로켓맨>의 경우 태런 에저튼의 연기를 언급하지 않는 건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네요. 위에서 언급했던 뮤지컬 특유의 턱을 넘기는 것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 차를 온전히 전달하는 것도, 시시때때로 망가지고 노래하는 존의 얼굴을 관객의 마음속에 꽂아 넣는 것도 태런의 지분이 크다고 봅니다. 젊은 연기자로써 쓰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작품을 쓰는 배우가 되겠다는 의지가 작품 자체에 녹아져 있습니다. 전작들에서도 잘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로켓맨>에선 그 이상을 보여줬습니다. 소년미 뿜뿜의 태런을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지만 태런의 팬이라면 극장에서 절대 놓치시면 안 될 작품입니다.
추신 하나. 영화의 옷을 주목하시는 것도 하나의 재미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보헤미안 랩소디>때도 느꼈지만 감독이 유독 신경을 쓰는 느낌입니다. 단순히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라 작품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추신 둘. 영화에 나오는 한 곡을 태런이 이미 부른적이 있습니다. 다소 편곡이 다르지만 <싱>이란 애니메이션에서였습니다. 그때도 다른 건 몰라도 태런이 부른 저 곡은 참 좋다 생각했는데 여기서 다시 들으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군요. <싱>을 보지 않으셨더라도 반가우실 겁니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