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는 원래 이렇지 않았다.
여자의 성격 형성은 결혼부터.
첫째를 낳은 지 얼마 안 되던 어느 날.
연락 한번 없다가 밤낮이 바뀐 직업으로 인해 신랑이 굉장히 힘들어 보인다고 사업장에 찾아온 아주버님.
이야기 도중 갑자기 본인이 투자를 할 테니 같이 한번 동업을 해보자는 권유를 해왔다. 그때 당시 신랑도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였고 고민 끝에 신랑과 나는 절대 해서는 안 될 가족과의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이야기는 순조로웠지만 진행 과정에서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동업을 하는 건 처음이었고 주변에서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만 할 뿐 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들은 해주지 않았다. 아니 우리가 물어보진 못한 게 잘못이었다.
우리 부부는 동업을 시작하려는 막판에 계약서를 쓰자고 이야기를 했지만 단칼에 가족끼리 하는데 그런 거는 할 필요가 없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아주버님은 그만큼 우리는 믿는다는 소리였던가? 아님 그냥 가족이라는 단어에 계약서라는 게 불편했던가?
아니다. 우리가 하자고 밀어붙여야 했는데 나와 신랑이 그냥 어리석었고 무지했었다.
계약서 하나 없이 구두로 수익의 7:3을 가지고 가기로 했으나 공사가 진행되면서 신랑이 라식 수술을 했고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한 게 없다면서 5:5로 바뀌었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을 했기에 그 어떤 대응도 하질 못했었다. 신랑은 사사건건 말다툼이 싫었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참고 있기도 했고 우리의 투자금이 적게 들어갔다는 이유로 더더욱 꿀 먹은 벙어리로 그대로 따르기로 했었다.
아주버님이 사장이 되었고 일을 시작과 동시에 모든 일들은 우리가 했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12시까지 일을 하면서 태어난 지 7개월인 딸을 안고 왔다갔다하면서 불평 없이 열심히 일을 했었다. 그때는 열심히 하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일은 점점 고되 졌고 아주버님의 쓸데없는 고집과 의견들로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들이 계속 틀어지고 감당하기 힘든 성격 차이로 나는 점점 스트레스가 치솟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계획하던 둘째 임신이 되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는 일이었지만 안정기였기 때문에 중간중간 휴식을 취했었다. 하지만 임신 전부터 하던 모든 일들을 다하고 있었기에 내 몸이 바쳐주기가 힘들었다.
초기에 조심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한 난 갑자기 배가 아파 병원을 가니 계류 유산이라고 했다. 이제 고작 6주밖에 되지 않은 아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뱃속에서 죽을까라는 생각에 미친 듯이 속상하고 서글퍼서 하염없이 울었다.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낸 아기. 그 슬픔을 이겨내기도 전에 난 악에 받쳐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계류유산 수술을 한 후 병원에 누워있을 때 아주버님은 그 유산이 무슨 대수냐면서 입원해있는 나에게 시누들을 시켜 전화를 해서 언제 오냐고 언제 퇴원하냐고 시간마다 전화해서 일 하러 나오라는 뉘앙스를 보내왔다. 아주버님은 나 대신 고작 하루 나와서 일하는 게 힘들었던 것인지...
독해지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는 젊었기에 무슨 악으로 울음을 꾹 참고 일어서서 일을 하러 갔다. 일하러 온 나에게 신랑은 왜 왔냐면서 걱정섞인 화를 낼뿐 더 이상의 이야기는 없었다.
나에게는 그게 더 비참하고 슬펐다. 그 정도로 밖에 하지 않는 남편이.
아니. 그게 제일 서러웠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남편이 내편이 아닌 남의 편이라는 생각밖에 없었고 갑자기 어렵게 얻은 아기를 남편이 떠나보낸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일이 있은 후 내 가슴 한켠에서부터 화가 차기 시작했던 것 같다. 모든 일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하고 있었고 심지어 사업 시작할 때 한 성격 하는 둘째 아주버님을 커버하는 건 남편이 할 거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던 건 뒤로 빠지고 나에게 총대를 매게 했다.
아주버님이랑 동업을 하는 건 맞지만 이 일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아 잘못된 부분에 이야기를 하니 작고 좁은 동네에 어린것이 까분다는 소문까지 나도록 욕하고 다녔고 그 소문이 내귀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아주버님에게 한마디도 못했던 남편.
그 이야기가 내 귀에까지 들어왔음에도 아주버님의 기분을 풀어주기 바빴던 시누들.
어린 나이에 난 그렇게 많은 것들을 겪고 모욕감을 당하고 있었다.
착하게만 지내면 나는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모든 걸 짊어지면 우리 가족들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 내 오만한 생각과 행동들이 나 자신에게 모욕감을 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 후 다시 둘째를 가졌었다. 그때는 내가 어떻게든 아기를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나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욕을 먹더라도 뱃속에 있는 아기를 살리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을 조금 융통성 있게 할 뿐 피곤함을 지속되었다. 집에서 맨날 픽픽 쓰러지는 첫째 시누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내 몸은 또 지치고 있었다. 시누가 갑자기 자다가 저혈당 쇼크로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도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하나 오지도 않았고 배불뚝이인 내가 밤낮 옆을 지켰다. 응급실에 잠잘 곳도 없어 불이 꺼져 있는 원무과에 의자들을 연결해서 쪽잠을 잤었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간 첫째 시누는 상태가 심각해 오늘내일하였고 가족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상황이었다. 중환자실에 간 시누를 매일 찾아가며 깨어나길 빌었지만 누구 하나 만삭인 나를 위해 대신 중환자실에 가겠다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내가 하니 네가 해라는 식이었다.
내가 임신과 시누의 입원으로 정신없이 있을 때 사업은 아주버님의 독단적인 의견과 신랑의 무능력함으로 점점 바닥을 달리다 결국엔 집안싸움이 되고 온갖 욕설과 남는 거 하나 없이 끝내 연락마저도 하지 않는 가족이 되었다. 가족 간의 사업을 하면서 난 시댁 식구들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었고 입원한 첫째 시누를 보면서 시댁 식구들의 이중적인 면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것들이 뒤섞여 버린 상황에서 꾹꾹 하게 버텨내고 있어야 하는 건 나였다.
그렇게 나는 점점 억척스럽고 그 후 목소리에 화가 난 못난이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수난들을 겪으면서 고작 27살이었던 나는 화병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