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는 원래 이렇지 않았다.
눈물은 딱 하루면 됐다.
내가 결혼을 해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게 아니라 몸이 불편한 첫째 시누를 모시고 사는 게 맞다 할 정도로 시누에게 더없이 신경을 썼었다.
결혼 초반에 시댁에서 시누는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건 다 누리면 살았지만 내가 둘째를 가지면서부터 건강 상태가 급속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집에 있으면서 저혈당 쇼크로 몇 번이나 쓰러지고 입원을 짧으면 일주일 길면 한 달씩 했었고 그 병간호는 시어머님과 나의 몫이었다.
시아버님은 시누가 쓰러질 때마다 같이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을 하고 계셨었다. 이러다 시부모님들이 위험하겠다 생각에 지체 없이 요양 병원을 알아봤고 처음에는 대학 병원처럼 제대로 된 시스템이 되지 않아 걱정하시던 시부모님도 집안이 조용하고 아픈 언니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에 다행해하셨다.
시부모님은 항상 시누에게 마음이 가있지만 눈앞에 없으니 한시름 놓겠다, 아파서 쓰러질 때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곤 했는데 요양 병원에서라도 바로 케어를 해주고 통증을 줄여 조금은 덜 아프게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등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하셨다.
하지만 요양 병원에서 잇으면서도 건강을 되찾으려고 노력을 하지 않는 시누는 몸 상태가 더 악화되었고 결국에 한 발짝도 걷지 못하고 앉아서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되었다.
요양병원과 대학병원 중환자실을 오가면서 더 여위어졌고 결국엔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겠다라는 서약서 사인까지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는 진짜 마음이 철렁하였고 이제는 준비를 해야겠구나 가족들끼리 암묵적인 느낌들은 주고받았던 것 같다.
마지막 중환자실을 퇴원하고 요양병원에 갔을 때는 마치 산 송장처럼 힘 없이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안쓰러워 잔소리만 늘어놓았지만 누구보다 조금만 더 살기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무소식이 희소식인 마냥 조용히 몇 주가 흐르던 어느 새벽.
휴대폰이 새벽에 갑자기이다 싶을 정도로 불안하게 울려서 받으니 시누가 정신을 놓으려고 한다는 소리에 신랑과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렇게 빨리 달렸건만 도착 10분 전에 숨을 거두었다.
5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지고 볶고 지내온 시누가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감정이 북받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잠자고 있는 것만 같았고 다시 눈 뜨고 맛있는 거 사 오라고 할 것만 같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편안하게 자다가 가니 다행이다 싶다가도 얼굴이라도 보고 가지라는 섭섭함에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억지로 억누르고 장례 준비를 했었다.
발인날...
아직도 이 날을 생각하면서 적으려니 눈물이 흐른다. 억장이 무너질 슬픔을 가슴에 묻어두고 계실 시부모님을 대신해 장례 절차를 신경 쓰던 나는 슬픔을 가질 틈도 없이 바빴다.
하지만 발인을 할 때 모든 것이 무너졌었다. 관에 있을 언니를 생각하니,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고 서 있을 힘 조차도 없었다. 몇 번을 주저앉고 다시 일어서서 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차마 보내질 못해 관을 잡고 매달리기까지 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거였으면 아프지를 말던지 아님 하고 싶은 여행을 하다가 가던지... 일찍이 세상을 등지고 가는 시누를 끝까지 야속하다 붙잡고 싶었던 것 같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왜 이 정도로 슬플까 생각할 정도였었다.
시누는 결국 한 줌의 재로 우리들 손에 쥐어졌고 가족들은 시누를 눈물로 보내면서 그 눈물로 명복을 빌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이 아팠지만 병을 나을 생각을 않고 그 병으로 인해 시부모님과 시댁 식구들을 고생시키고 잦은 사고들로 속상하게 했던 시누의 죽음은 딱 하루 눈물로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건 가족들이 그 죽음을 준비하였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시부모님도 다른 가족들도 가슴 한켠에 묻어두고 불쑥 올라오는 슬픔을 어찌하지 못할 때도 있겠지만 단단한 응어리가 빠진 것처럼 다들 홀가분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렇게 눈물로 하루를 보내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나의 고통과 슬픔들을 그 하루에 온전히 씻어 버린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