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님
<깊이에의 강요>에서 재능 있는 젊은 화가에게 한 평론가가 "작품에 깊이가 없다"라고 말해요.
평론가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화가에겐 끝없는 고통을 주었다. 결국 화가는 그림에서 손을 뗐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유능한 시인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시를 쓰면서 나는 시인이 될 수 있었어요.
시를 쓰기 위해서 푸른 하늘을 보거나, 친구들의 다툼, 부모님과 전화, 독서 등을 관찰하고 사유하기 시작했다. 깨달음이나 반성을 리듬감 있게 풀어내려고 했는데, 특히 라임을 맞추는 행위가 랩을 쓰는 거 같아서 즐거웠다. 그렇게 좋던 시 쓰기를 멈추게 된 것은 인스타에 올린 시를 보고 내린 친한 형의 평가였다.
"뭔가 특별하지는 않다"
시를 인스타에 올린 이유는 군대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인스타에서 내가 쓴 시와 어울리는 사진을 찾아서, 사진을 올린 사람에게 사진 허락을 받고 같이 업로드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연락하는 것은 언제나 떨렸고, 답변을 기다리는 것부터 허락이든 아니든 답변을 받는 것도 떨렸다. 내 즐거움이 단 한 마디로 꽤 오래 사라졌던 건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후에 어떤 시가 좋은 시일까를 계속 고민했다. 결론은 짧은 시다. 시는 읽기 좋아야 한다. 읽기 좋은 데다가 의미도 바로 알 수 있는 직관적인 시가 좋다. 지금은 틈틈이 그런 시를 쓴다. 또한, 긴 시나 천천히 곱씹어야 이해할 수 있는 시도 읽는다. 다른 사람의 좋은 시는 무엇인지가 궁금하기도 하고, 나도 그런 시를 좋게 여길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비판에 익숙하지 않은 건, 내가 남을 잘 비판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에겐 아니지만 상대에겐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니라고 생각해도 말로는 내뱉지 않기 때문에 직접 들었을 때 타격이 더 컸던 거 같다.
내가 틀렸다. 내가 부족하다는 말은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하다. 상대에게 들어도 부정하게 되고, 기분이 팍 상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서 그 감정은 사라지고 고민과 고민으로 얻은 것이 내게 영향을 주고 있기에 고맙기도 하다. 특히, 나한테 관심을 가지고 말을 해줬다는 게 고맙다.
그래도 직접적인 비판은 안 할 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