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례가 되어버린 심리검사 2
1회기가 기초조사(?)였다면, 2회기는 숙제 검사 같은 날이었다.
앞의 한 시간정도는 비교적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1회기가 끝날때 나눠줬던 문항지를 수거하면서 그림테스트를 진행하고 마무리했다.
자유롭게 나눈 얘기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은
1.
믿음과 사랑은 같은 말이 아니다
내가 종종 하는 말중에 하나가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는다는 것, 사람에 대한 믿음이 인류애라고 생각한다, 인류애는 나의 최후 보루다, 라는 말이다. 이런 내 말을 듣고 상담사는 인류애와 믿음이 같다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 뭐.. 그렇죠? 다들 그렇지 않나요?
-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에요.
- 그럼 믿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지 않고도 믿을 수 있다는 건가요?
- 그럼요. 제 주위에도 그런 사람이 떠오르는데요?
나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2. 나의 믿음은 다른 사람을 향한 기대로 표출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교적 명확한 기대치가 있고, 그건 애정하는 사람일수록 높게 나타난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기대를 벗어날때 크게 실망하는 것이다.
- 그렇게 쉽게 믿고, 실망하고, 믿고 실망하는 과정이 쌓이면서 점점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는 건 아닐까요? 왜 계속 사람을 믿으세요?
- 그런것도 같지만, 사람을 믿는 것은 내 최후 보루라서 가장 나중에 포기하려고요..
- 그럼 또 실망하지 않겠어요? 실망하면 어떤 생각을 하세요?
- 글쎄요.. 아휴, 믿은 내가 잘못이지, 하고 또 지나가지 않을까요?
- 이것봐요. 또 자책하잖아요. 보통 실망시킨 사람을 탓하는데, 믿은 자신을 탓하고 있어요.
믿는건 잘못이 아니에요
3. 내가 이야기하는 중간중간 "다들"에 방점을 찍는 일이 많다면서, 내가 믿고 있는 사실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잘 못하는 '순진한'면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평소에도 내가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기때문에 또 금방 수긍해버렸다.
- 맞아요, 전 자칫하면 사이비에도 빠질 수 있었겠다고 생각하곤 해요 ㅎㅎㅎ
4.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다들"에 대해,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중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사회일반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하고, 그게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 늘 걱정한다. 진보를 지향하는 활동가임에도 그런 면에서 내적충돌이 많이 발생하는데, 남들과의 불화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남들에게 수용가능한 범위의 행동을 하고 싶은데, 사실 그것만으로는 현재의 오류를 바로잡기 부족할때가 많다. 그러니 이 얘기를 할까 말까, 이렇게 행동해도 되나, 하는 의문을 스스로 많이 제기한다. 그게 스스로의 행동을 억누르기도 하고. 그리고 문제가 바로잡아지지 않으면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이런 방식이 틀렸나?'하고 또 자책한다.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실망의 원인을 내 믿음에서 찾고, 문제적인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상황에선 내 문제지적 방식만을 곱씹는다.
- 왜 자꾸 문제의 원인을 나한테서만 찾아요?
- 음... 제가 문제여야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문제라고하면 .. 제 통제 범위 밖이니까요..
나는 나만 바뀌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오히려 나 괴롭혔던 것이다. 나에게 아무 문제가 없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있을 수 있고, 나에 대한 배려 없이 실망스러운 행동을 하는 타인이 문제일 때도 있을텐데, 나는 나의 문제만을 곱씹고 또 곱씹느라 홀로 속앓이를 했던 것이다. 이런 나의 기질은 다음 회기에서 더 명확히 드러났다.
그림검사는 단독으로는 해석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만으로 분석하는 사람은 사기일 확률이 높다고.. 따라서 다음 회기에 검사결과와 연계해서 분석해주겠지만,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나에 대한 연민이라고 한다. 나는 어린 내가, 그리고 지금의 내가 가엾다.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며 몇가지 질문을 주고 받았는데, 그와중에 나는 펑펑 울어버렸다. 이건 혹시나 그림테스트를 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어 간략히만 서술. 아무쪼록 눈물로 상담이 급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3회기는 팩폭의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