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은 어쩌다 투사가 되었을까
나가기는 싫고, 외식으로 먹었던 음식이 매우매우 먹고 싶던 어느 날이었다. 공개된 레시피도 아니기때문에 무슨 재료로, 어떻게 만든건지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흉내를 냈더랬다. 당시의 나는 막 자취를 시작했던터라 엄마가 해준 것 말고는 밥, 김치찌개(엄마 김치 한정), 라면이 할 수 있는 요리의 전부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레시피는 내가 알던 맛으로 내가 아는 맛을 내는 것뿐이었다. 사실상 물만 잘 맞추면 되는 것들. 그것말고는 음식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에 대한 이해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내가, 다른 사람의 요리를 맛의 기억에 의존해서 따라했다. 당연히 망했다. 이 재료가 어떤 역할인지, 어떤 맛을 내는지, 심지어 어떤 조리법으로 해야하는지도 몰랐으니.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은 본가에 갔는데 떡하니 꽂혀있길래 재밌겠다!하고 뽑아온 책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내가 꽂아둔 책갈피가 끼워져있더랬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를 못한 덕분에 심지어 제목까지 생소하게 느껴졌던듯. 이해의 부족은, 같은 일을 처음인양 반복하는 것처럼 바보짓을 하게만드는듯하다.
일련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나는 내가 이해가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 전까진 기억력의 부족함을 이해력이 받쳐주는구나 믿고 살았다. 어차피 못 외울거 이해라도 하자!가 유일한 공부비법이라면 비법이었으므로 "이해 없이 암기 없다!!"며 몇시간씩 같은 내용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세상 만물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세상엔 이해할 일들이 많다. 그런와중에 이 깨달음은 충격적이긴했지만 왠지 수긍이 갔다. 나는 재료를 이해하기 보단 어떻게든 흉내내는 것에만 치중했구나. 물론 요리만이 아니라.
내 이해가 낮다는 걸 알아버린 지금에서 말하기엔 좀 시덥잖은 교훈이긴한데, 세상살이에 이해는 참 중요한 것 같다.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일은 참 어렵다. 그리고 분명히 머지않은 한계도 있을거다. 지치거나 망치거나 잊히거나.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헛수고인 경우가 별로 없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더 의미있기도 하다. 당장을 보면 이해한답시고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거나 쉬운 길을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긴 걸음일수록 그 첫걸음은 반드시 앎, 그 다음 걸음은 이해여야 한다. 그래야 다음 걸음을 쉬이 내딛을 수 있고, 또 오래 걸을 수 있다. 멀리 갈 것인지 빨리 갈 것인지는 가치관의 차이일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빠른 걸음으로는 오래 걸을 수 없다는 것. 내 앞날을 걱정하며 지난날을 돌아본 결과는 빙 돌아가는 그런 걸음에 관대한 날들, 한참을 들여다보기에 관대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것.
나를 포함한 90년생들이 최근 각종 미디어에서 뭇매를 맞고 있다. 90년생은 왜 이직이 잦은가, 90년생은 왜 시키는대로 하지 않는가, 90년생은 왜 할말은 해야하는가 등등.. 그런 주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 90년생과의 접점이 나보다 많은 사람이 있을까? 나는 전형적인 90년생의 삶(IMF로 인한 어릴적 가난-노력만능주의-성공신화-입시경쟁-고시-잦은이직)을 살고 있고, 내 주변엔 정말 많은 90년생이 있다. 그런데 내가 보는 90년생들의 모습과 그들이 내리는 결론이 일치하는 일이 많지 않다.
내가 본 90년생들은 상당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대기업에 다니더라도 도태될까 불안에 떨며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못한다. 생각보다 보수적인 경향이 많아서 상사에게 하고싶은 말을 곧이곧대로 하지 못하면서도,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감을 더하기 위해 질문을 하고, 의견을 내는 적극성을 보인다. 애초에 그런 의견이나 질문을 포용하는 조직이라면 열과 성을 다해 일을 하고, 그렇지 않은 회사라면 진작 포기하고 나가거나 잠자코 다닌다. 그건 개인의 성향 문제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게 왜 90년생만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배운 경영조직이나 인사관리파트에선 개인이 느끼는 일의 의미감은 성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했다. 내가 뭘하는 건가 싶은 일은, 이해되지 않는 일은 개인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성과를 저하시킨다. 평생을 열심히 살아온 90년생은 더이상 불합리한 것들을 수긍하며 자신의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러려고 내가 그렇게 열심히 살았나 자괴감이 몰려오니까. IMF때 평생직장일 것 같던 회사들이 얼마나 사람을 쉽게 내쳤는지를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불합리하지만 무작정 견디는게 능사라는 말이 통할까? 좀 더 현실적인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기객관화가 되기 때문에 과도한 희망론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고, 더 노력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과감한 결정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요행에 기대지 않고, 자신에게 기대는 것이다.
나는 무작정 시키는 일을 하는 타입은 아니다. 이걸 내가 왜 해야하는지 납득할 수 있어야하고,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면 열과 성을 다한다. 물론 싫은 일을 해야할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런 상황이 이해가 가야 그 일을 열의있게 하게 된다. 시키지 않은 일도 부러 찾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은 하는 내내 스트레스를 받고, 그 일을 억지로 하게 만든 사람과 조직, 상황에 분노하게 된다. 불만은 점점 쌓이고, 개선해보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 많고, 그런 일들이 수차례 반복되면 조직을 떠나야겠다는 결정을 하게된다. 이런 사고회로가 90년생만의 것일까? 그들의 요구는 대단히 특수한 요구도 아니고, 원칙적으로도 순리적으로도 그리 모난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90년생의 특징이라 꼽히는 것들은 사실 2-30대에게 꽤나 보편적인 성질이 아닌가 싶다. 아니 사실 전 세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인데, 뭔가 다르다면 그걸 드러낼 용기가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려나. 그래서 유독 이들에게만 그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은 아닐까.
물론 90년생이라는, 직장에서 관리직과 일반직의 중간지대에있는 이들의 이해를 통해 조직의 새로운 기류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새로운 요구를 이해하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될테니까. 하지만 유독 90년생이 마케팅적으로 잘 팔리는 것을 보면 약간의 씁쓸함이 남는다. 90년생을 이해하는 게 전 세대의 숙제처럼 되어버린 지금을 살아가는 90년생들은 얼마나 스스로를 이해시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을까? 나만해도 이전 직장에서의 갈등, 시부모와의 갈등, 남편과의 갈등, 여러 조직에서의 갈등을 정면으로 겪었고, 여전히 진행중이다. 불합리함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 대단히 과민한 반응처럼 여겨지는, 유독 나만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유별난 사람처럼 보여지는 상황들에서 90년생들은 얼마나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내고 있을까.
그런 갈등의 최전선은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위치이고, 90년생들도 마찬가지일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니면 대신 나서주는 이들은 없으니 전면에 나서서 스스로를 변호해야한다. 뒤에선 '네 말이 맞아', '그래, 그건 문제야', '하.. 바뀌어야할텐데..'하던 사람들이 전면전만 되면 입을 다무는 그 순간, 90년생은 무거운 입술을 들어 뒤에서했던 얘기들을 앞으로 가져온다. 공감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왜 그런 얘기를 하필 지금 했냐, 는 눈초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 무겁고 날카로운 순간들을 견뎌내는 90년생들의 마음은 어떨까.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이해시켜달라고 90년생은 애써 용기를 내서 말한다.
바꾸고 싶은 사람이 더 말해야하는 게 맞다. 잘못을 제기하는 사람이 잘못을 입증하는 것, 변화를 설득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무게를 무한정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공감하는 이들이라면 90년생들이 홀로 지고 있는 무게를 나눠가졌음 한다. 남들에게 뭍어가고 싶고, 뒤에서고 싶은 마음 충분히 알지만, 모두가 누군가에게 뭍어갈 수도, 모두가 뒤에 설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앞에는 못 서더라도 옆에는 서달라. 90년생들의 싸움이 시대적 과제가 된 이상, 외로이 싸우게는 두지 말아달라.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