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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May 14. 2024

다들, 남들처럼 사나요?

15년 사랑의 결실

글을 쓰고 싶다, 정확히는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머리에 떠다니는 이야기들을 감히 누구에게도 꺼내기가 겁나고, 

말로 뱉으면 현실이 될 것 같아서, 

마음에만 담아두자니 마음이 자꾸 썩어문드러질 것만 같아서. 

내가 너무 늪을 파고 들지 않도록 

마음을 후벼팔 힘으로 키보드를 두드려야겠다는 생각에,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시작부터 평탄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랑만으로는 안 된다,던 숱한 어른들의 말이 왜 유독 나만 빗겨갈 거라 생각했을까.

쫓기듯이 결혼을 결심하고 몰아쳤던게 탈이었을까.

오랜 연애가 우릴 견고하게 옭아매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결혼은 '사사건건' 서로의 교집합에 있었다. 


아들의 여자친구, 그저 남이었던 내가 이 집의 식구가 되는 순간은 그리 경이롭거나 아름답지 않았다. 

갑작스레 어느 집의 며느리라는 신분이 나라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나의 이름은 며늘아가, 며늘아, 얘야, 와 대등한 선상에 놓였다. 아무야. 

학창시절 급식비를 못 냈다며 담임선생님이 이름을 불렀을때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간담이 서늘해진다. 

뭔가를 시키거나, 지적하거나, 요구하거나, 눈치를 줄 때 내 이름은 불려졌다. 

아무야, 머리 좀 묶어라. 

아무야, 옷을 좀 단정히 입지 그러니.

아무야, 이것 좀 여기에 놔라. 

아무야, 니가 얼른 배워서 이제 니가 차려야지. 

아무야, 할 거 없어도 주방에 붙어있어야지. 


인생의 여러 격변기가 있다지만, 내가 며느리가 된 순간보다 격정적인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7년을 봐왔던 시어머니는 갑자기 생전 한 적없는 이야기들로 나에게 며느리 교육을 하셨다. 

며느리잖니. 

아무리 왜,냐고 물어도 그 한마디로 더는 물을 수 없는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할말이 없었다.

며느리라는데. 내가 결혼을 한 사실이 뭔가 죄를 지은것인가 싶었다. 

시어머니는 정말 나를 길들이기라도 하시겠다는듯 노골적으로 바람과 요구를 내비쳤고,

적당히 도리는 하자고 생각했던 나는 순간순간 당혹감이 들었다. 

이 정도면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지간한 시키는 일들은 다 했는데,

여전히 돌아오는 말들은 나무라는 말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내 옆엔 남편이 있었고, 아주 각오를 안 한 건 아니었으니 어찌어찌 버텨보리라 했다.

이틀 이어지는 제사와 차례의 사이, 잠만이라도 집에가서 자고 오겠다, 화장도 하고 와야하고 옷도 갈아입어야하는데 시부모와 자는 건 너무 불편하다,

나의 요구에 남편은 내가 무지막지한 패륜이라도 저지르는듯이 분노했다. 


내가 차례를 안 지내겠다는 게 아니잖아, 제사도 지낸다고,

우리집이 시부모님 집 보다 가까운데, 5~6시간밖에 못 자는거 그거라도 좀 편히 자고 오면 안돼?


도대체 왜 그래 아무야... 제발 남들처럼 좀 하자.... 


남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내가 부산에서 서울을 왔다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10분 거리의 우리집을 놔두고 1시간 거리의 시부모님집에서 자고와야 '남들처럼'인건가. 

내가 시부모님 집에서 안 자고 근처의 우리집에서 자겠다는걸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며 분노하는 남편. 그게 뭐라고, 그게 뭐라고, 며느리노릇도 안하는 되먹지 못한 인간 취급을 하는 남편. 

내 옆에 있다고 믿었던 남편이 내 옆에 없단걸 깨닫는 순간에 난 와르르 무너졌다. 

난 그 시기를 지나며 우울증을 겪었다. 

이혼까지도 생각했던 그 시기를 어렵사리 지나오며 우울증도 극복했다. 


그 이후로도 순간순간, 나는 도저히 상식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일들이 며느리란 이유로 요구됐다. 

그래, 어쨌든 내가 양보 받은(이렇게 표현하는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것들이 있으니 나도 양보해야지.

불쾌한 마음을 억누르며, 거짓 웃음을 지어가며, 서비스직의 목소리톤을 만들어가며 비위를 맞춰줬다.

그나마 남편이 나의 노력을 알아주는듯했고, 간혹 고맙다는 말도 들었고, 그만큼 우리 엄마한테도 잘하려는 것 같아서, 이게 우리의 균형이겠거니 생각하며 견뎌왔다. 


요 몇년 사이, 관계가 꽤나 정리됐다고 느끼며, 남편과 둘만 떼어놓고 보면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행복한 부부가 몇이나 될까. 난 정말 평화롭고 행복하다. 

그런 말이 저절로 입밖에 나왔다. 

그게 화근이었을까. 

내가 평화와 행복을 얘기하던 때에 남편은 새로운 국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아이 문제였다. 


남편과 시부모는 결혼전부터 아이는 필요 없다고 했다.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고, 낳던 말던 둘만 행복하라고 시부모는 얘기했었고, 본인은 힘들어서 키워줄 생각도 없다고했다. 

남편은 아이가 싫다고까지 얘기했었고, 니가 정 원하면 고민해보자는 정도였다. 

그렇게 난 아이라는 존재의 부담을 느끼지 않고 결혼생활을 이어갈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땐 남편이 너무 어렸나보다.

점점 주변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걸보니 마음이 바뀌었나보다. 

이젠 '남들처럼' 애를 갖고 싶다고 한다. 


그럴수있다. 사람 마음이 당연히 바뀔 수 있다. 그렇게 싫었어도 갑자기 좋아질 수 있겠지.

조심스럽게 아이를 갖고싶다고 말하는 남편을 보니 짠하기도 했다. 

남들 보기에 딱히 애를 못 낳아 기를 형편도 아니고, 꼭 아이를 낳지 말아야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 1년만 고민해보마, 했다.

우리가 정말 아이를 낳아 기를 만한 사람들인지, 스스로도 돌아보고, 우리의 역할도 고민하며, 

조금이라도 더 준비된 부모가 되기위한 고민을 해보면서 아이를 가질지 결정하자고 했다. 


약속한 1년이 점점 다가온다. 

남편은 먼저 아이에 대한 고민을 입밖에 내지 않는다. 

나는 여러번 얘기했다. 


딱히 아이를 가질 마음이 없는 나를 설득하려면 아이가 갖고 싶은 이유라든지, 본인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나한테도 좀 알려줘야 내가 고려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려운 고민이라 마음에만 두는건 알겠지만, 아이를 정말 낳아 기를거라면 지금처럼 혼자만 생각하고 마음에만 담아두면 안 될 것 같아. 아이를 키우면 더 부딪힐 일도, 고민할거리도 많을텐데, 훈련이라 생각하고 좀 더 속마음을 얘기해줘. 


알겠다고, 노력하겠다고, 그때뿐이었다. 

남편은 여전히 말이 없고, 나의 고민은 여전히 물음표다. 

아직도 남편의 친가, 그리고 시부모는 나에게 너무 어렵다. 

거기에 아이까지 생기면, 그 집에서의 내 의무는 아이 엄마라는 것까지 추가될것이다. 

내가 이 문제로 스트레스 받지 않을 수 있나? 남편의 대답은 '내 가족이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을 것 같아'다. 지금까지는 내 가족이 아니었나. 


지금도 우린 많이 싸운다. 서로 의견이 도무지 맞지 않는 문제들이 많다. 

시부모와의 갈등도 그렇지만, '남들처럼'에 목을 매는 남편과는 생각보다 사사로운 일들로 부딪친다. 

그런 상황에 우린 분에 못이겨 소리를 높이고, 서로에게 욕을 한다. 

싸울때면 거의 매번 죽고싶다는 말을 한다. 안타까운 건 정말 진심이라는 거다.

우울증 치료를 받았던 나는 이게 우울증인걸 안다. 

하지만 남편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똘똘뭉친 사람이라, 정신병원을 가는 것에 격렬히 거부감을 느낀다. 

아이를 낳으면 최소 2~3년, 우린 아이에게 온 세상일 것이다. 

아이의 문제로 다투게되면, 그 아이의 세상은 서로 욕을 하고 싸우고, 감정에 못이겨 죽고싶다는 말을 할 것이라는 거다. 아이에게 그런 세상이고 싶지 않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자고 했다. 자길 정신병자 취급한다고 격분하더니, 그래도 최근엔 알겠다고 하더라. 물론 여전히 말뿐이다. 


내가 가장 걱정되는건, 남편의 보수적이고 성차별적인 성향이다.

아들이면 그나마 나으려나. 딸이면 얼마나 아이를 옭아맬지 걱정이다. 

연애초반, 남편은 나에게 v넥 티셔츠도 입지 말라고 했다. 

짧은 치마도. 지금도 여전히 긴머리가 좋다며 머리카락을 자르지말라고 한다. 

나는 그럼에도 남편을 선택했다. 내 선택의 일부고, 그게 너무도 고리타분하고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얼마간 타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지내오고 있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는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부모와 당장 독립할 수 없다. 

주도권을 쥔 남편이 아이를 정말 자유롭게 자라도록 서포트할 수 있을까?

남편의 대답은 '너는 아내지만 아이는 아이니까' 터치하지 않겠단다. 믿어야할까. 믿어도 될까? 


내가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다면, 그건 나와 남편이 서로의 노력으로 만들어 낼 하나의 우주가 주는 경이로움을 함께 경험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우리 부부는 부족하겠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며 우리와는 또다른 세상으로 자라날 것이다. 그 새로운 생애주기를 거슬러 가장 가까이서 목도하는 것의 경이로움, 그것이 내가 아이를 갖고 싶은 이유다. '남들'과 같은 모양-엄마, 아빠, 아이-의 가족구성을 갖추기 위함이 아니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도, 대를 잇기 위함도 아니다. 남편이 얼마나 아이라는 존재 자체에 진심인걸까, 하는 마음에 물어본적이 있다. '아이가 내 성을 따르도록 해도 돼?' 


남편은 왜 '남들처럼' 하지 않냐고, 나는 왜 '남들처럼' 아이 낳고 '남들처럼' 아빠 성 따라서 이름 지으면 안 되는거냐고, 이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냐며 소리를 지르고 분노하더니, 이혼 밖엔 답이 없는 것 같다, 죽고 싶다는 말을 연거푸 해댔다. 나는, 목숨과도 맞바꿀 만큼 본인의 성을 지키는 게 중요한건가, 싶었지만 더이상 어떤 대화도 불가능했다. 호주제가 폐지되고, 부모 중 누구의 성을 따를지 부부가 결정해서 선택할 수 있는 세상에,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는 것이 '남들'과 달라 죽기보다 싫다는 남편은 이 사회에 성차별이란 없다고, 오히려 남성이 역차별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남편이랑 왜 사느냐, 는 악의 반 걱정 반의 의문이 들 것 같다.

앞서말했듯 난 내가 한 선택이었고, 둘만이라면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풀고, 죽네사네 하면서도 어찌저찌 맞춰가며 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나의 생각은, 어쩌면 세상에 맞는 사람은 없는 거고 다만 사랑하며 둘이 노력으로 죽을때까지 맞춰가며 사는 거구나, 였다. 그래서 난 둘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대로도 우리는 적당히 행복하고, 적당히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다른 영역이다. 

남편과는 살아도 이대로 아이를 낳아 기르지는 못하겠는 이유다. 


내 성을 따라도 되겠냐는 질문을 그 뒤로 두 번 더 했다. 

최근에는 아이를 갖고 싶은 남편의 마음이 진심이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점점 아이를 낳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편이 한발만 깨고 나와준다면, 그만큼만 양보해준다면 나도 기꺼이 확답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세번째 질문을 했던 것이다. 

"아이한테 내 성 줄 수 있어?"

남편은 이번에도 여지가 없었다. 나는, 내심, 아이만 낳으면 그게 무슨 상관이냐, 는 대답이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남편이 이렇게까지 요지부동이라면, 아이를 낳는 결정은 온전히 내가 이해하고 양보해야만 가능하다. 열번을 더 물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마음에 얹혀있던 돌덩이라도 내려놓자는 마음에 남편에게 말했다. 

"그럼 나도 더는 여지가 없는 것 같아."


그 뒤로 3일째. 남편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각방을 쓰고 있다. 지금은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밥을 차려도 먹지 않고 식음을 전폐하더니 맥주와 과자로 연명하고 있다. 

시간이 필요하겠지. 남편을 내가 풀어줄 방법은 아이를 낳겠다고 하는 것 뿐이라, 사실상 풀어줄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가 됐든. 혼자 어떤 결정을 하고 와서 어떤 말로 포문을 열지 모르겠지만, 물론 그 순간이 너무 두렵고 무섭지만, 기다리자고 마음을 다잡고 있다. 

우리가 사랑한 15년이 너무 초라하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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