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리 씨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당신의 용기를, 나의 비겁함을 기억하려 합니다.
나는 오늘도 노브라로 출근을 했다. 얇은 티셔츠를 두 개를 껴입었고, 위에는 패딩조끼를 걸쳤다. 노브라 상태라는 걸 누가 알아볼까 꽁꽁 감췄다. 거울에 비춰보고, 티 안나지? 하고 안심하며 출근을 했다.
예전에 나는 일명 뽕브라를 좋아했다. 가슴이 작은 게 콤플렉스인데, A컵 브라도 다 채워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작아서, 브라를 하지 않으면 옷의 태가 전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의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티 안 나는 뽕브라를 찾아다녔다. 타인의 시선이 누구보다 중요하고,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싶고, 예뻐 보이고 싶고, 멋져 보이고 싶던 그때의 나는 그랬다.
브라는 나의 외형을 기성의 '미'의 기준에 맞게 조금 보완해주긴 했지만, 몹시 불편했다. 매우 갑갑하고, 싸구려를 하면 금속 와이어 때문에 몸이 가렵기까지 하다. 와이어가 없는 브라를 찾아봤지만 브랜드 있는 비싼 브라들이나 청소년용 스포츠브라뿐이었다. 비싼 브라를 살 여유는 없었고, 스포츠브라와 유사한 브라렛이라는 걸 알게 되어 저렴하게 판매하는 제품을 몇 개 사서 써봤다. 그 뒤론 브라렛만 사고 있다. 브라렛은 와이어가 없는 밴딩 타입으로 여전히 불편함이 존재한다.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 제품들은 꽤나 비싸다거나, 가슴에 들러붙어있으면서 후크나 와이어를 없애놓은 탓에 밴딩이 심히 고탄력(?)이라는 점이다. 몸을 아주 꽉 조인다. 브라든 브라렛이든 하고 있으면 밥이 가슴 밑으로 안 내려가는 기분이다. 내내 체한 기분. 심지어 하루 종일 앉아있는 직업인이기에 갑갑함에 소화제도 자주 먹었고, 플라시보인지 모르지만 탄산음료도 많이 마셨다. 당연히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브라나 브라렛을 벗어던진다. 그때서야 트림이 나오고 속이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나는 자연스레 노브라를 하게 됐다, 편하기 위해, 살기 위해. 성장기 이후 노브라를 처음 할 땐 겁이 많이 났다. 나는 단지 브라를 하지 않은 것인데, 누군가는 내 티셔츠에 드러난 유두의 윤곽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것만 같았다. 누군가 내 가슴을 함부로 만지고, 그러게 왜 브라를 하지 않았느냐고 되려 큰소리를 칠 것만 같았다. 긴 머리로, 백팩으로, 겉옷으로 가렸다. 사실 아직도 여름엔 두꺼운 티를 입을 때만 노브라를 하기도 하고, 되도록 안 하려고 한다. 옷이 두꺼워지는 겨울이, 패딩 하나로 다 가려지는 겨울이 기다려질 지경이다. 나의 노브라는 아직도 조심스럽고, 위축되고, 소극적이다.
노브라가 하나의 여권 신장 운동으로 부각이 될 때 반가웠다. 대놓고 나 노브라야! 할 용기는 없지만, 누군가 나서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확산시키는 운동을 한다는 게 고맙기도, 반갑기도 했다. 조금은 그들에게 묻어가고 싶었다. 그들이 노브라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놓으면, 그땐 좀 더 당당히 노브라를 해도 되겠구나 기대했다. 두려웠다. 그냥 노브라를 하고 길거리를 나가는 것만도 겁이 났던 터라 괜히 나서서 욕받이를 하고 싶진 않았고, 나의 노브라를 방패 삼아 실천으로 함께하고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 그들을 손가락질할 때, 그들이 많은 이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도 혼자만 숨었다. 노브라가 어때서? 나서서 한 마디 하지도 못했다.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노브라 선언들, 기사들에 좋아요를 눌렀을 뿐이다. 그 클릭 한 번에 죄책감을 실어 보내고, 마치 그들의 행동에 큰 지지라도 보낸 양 자위했을 뿐이다. 그들이 정당하지 못한 욕을 먹고 힘들어하는 걸 보며, 그냥 과정이겠거니,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느라 진통을 겪는 거겠거니 했다. 나서 주는 이들이 그 고통을 '독박'쓰는 것을 알고도 모른척했고, 고통을 나눠갖지도, 덜어주지도 못(안)했다.
어쩌면 나는 공범자였다. 무관심과 소극적인 응원만으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그들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주변인에게조차 나도 노브라야, 그게 뭐?라고 반박하지도 못했다. 그의 희생에 기댄 나는 비겁하게 살아남았고, 용기 내어 맞섰던 그는 죽음으로 내몰렸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비껴간 나의 노브라는, 죽음을 비껴간 나의 노브라는, 그저 나 하나 편하겠다고 택했던 나의 노브라는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한 남성 연예인의 말처럼 '섹시하되 섹스하지 않'으며 순응적이고 순수한 여성이길 요구받았던, 그렇지만 그런 부당한 요구에 맞서려 용기 냈던 젊은 여성 연예인. 거칠 것 없던 비난들을 맨몸으로 맞았을 그녀를, 고통스럽지만 결코 물러날 순 없었던 그녀를 기억하려 한다.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재하고자 했던, 편히 숨 쉬며 살고 싶었을 뿐인 그녀의 외로운 싸움을 두고두고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나의 노브라가 그녀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좀 더 나서보려 한다. "나도 노브라야, 이게 어때서?"
진리 씨, 고맙고 미안합니다. 부디 그곳에선 진리로 존재하길 바라요. 잘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