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를 보고
※ 이 글엔 다소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 남편과 영화보기 직전 나의 잘못으로 싸우게 됐고, 영화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웬걸. 남편과 나는 영화에서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었고, 다른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엄청난 몰입감으로 2시간의 러닝타임을 내내 몰아친다. 보는 내내 힘이 부치고, 다 보고 나면 진이 빠지는데, 그렇다고 중간에 멈출 수가 없다. 그냥 영화에 두 시간동안 끌려다녔다.
이 글이 조커에 대한 분석을 가장 잘 정리한 것 같다. 이동진평론가의 라이브톡을 다녀와서 정리하셨나보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nadekim&logNo=221667815097
영화 조커 후기 일반인 vs 이동진 해석 스포O 일반인 해석조커라는 캐릭터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정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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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고 똑똑한 많은 분들이 조커 영화를 잘 분석해주셔서 나도 그걸 찾아보며 감탄을 한다. 그러니 내가 어쭙잖게 조커 영화를 분석하거나 평할 것은 없을 것 같다. 그냥 나의 감상을 남기고 싶다.
간략히 줄거리를 적어보자면 아서는 정신병을 앓고 있다. 기침처럼 숨길 수 없이 웃음이 터진다. 웃어야할 상황이 아닌, 당황한 상황이나 겁에 질린 상황 등에서 웃음이 터진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를 어릴적 양아버지로부터의 학대에 대한 방어기제였다고 한다. 정부지원 상담소를 통해 약을 받아서 먹으며 버텨낸다. 하지만 정부지원이 끊기며 약을 구할 수가 없게 됐다. 아서에겐 부양하고 있는 병약한 어머니가 있다. 아서는 광대를 하며 어렵게 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상담소의 정부지원도 끊기고,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직장에서도 해고당한다. 그리고 한 여성과의 연애는 망상이었다. 아서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리고 조커의 모든 것이 시작된다.
아서는 다만 웃었을뿐이다.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웃음이 나고, 그걸 통제할 수 없었을 뿐이다. 자신의 웃음이 타인을 불쾌하게 할까봐 자신의 병을 설명한 메모를 지니고 다니며 보여준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아니 어쩌면 더욱 아서를 경계한다. 사람들은 정신병에 걸린 광대를, 가난하고 깡마른 아서를 멸시하고 조롱한다. 아서는 다만 웃기고 싶었지만, 아서가 웃을 때 사람들은 그를 경멸하며 폭력을 휘둘렀고, 조롱거리로 삼았다.
아서는 '정상'으로 보이기 위해, 자신의 '비정상성'을 감추기 위해 애썼다. 상담을 받고, 약을 먹고, 아무 문제가 없는 척 했다.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살아가려 했다. 하지만 사회는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어렵게 얻은 기회마저 앗아갔다. 남들보다 배려심이 많았던, 적어도 타인을 공감하고 진심으로 대했던 아서에게 사람들은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질환, 신체 질환, 사회적 결핍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살면서 마음먹은대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우린 눈에 보이는 결핍들을 너무 쉽게 외면하고, 냉소한다. 우린 끊임 없이 서로의 감시자가 되고, 평가자가 되고, 스스로를 '정상인'으로 보이기 위해 분장을 하고,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한다.
'정상성'에 비정상적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강박적인 사회에서,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 이들에게 가해지는 혹독한 물리적, 언어적 폭력들. 아서가 조커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건 아서의 정신질환이나 가난때문이 아니었다.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 찍거나 범죄자 취급을 해버리는 사회. 이 사회가 정신질환자를 미치광이로 만들어가고 있다.
세상은 아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았다. 이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배제하는 게 쉬우니까. 그들의 언어는 너무 쉽게 지워졌고, 애초에 없었던듯이 우린 너무도 잘 살아왔다. 지워진 언어들을 되살려내는게 예술이라면 이 드라마는 너무도 예술적이고, 지워진 언어들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게 정치라면 이 드라마는 너무도 정치적이다.
조커의 웃음 뒤에 숨겨진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을 너무도 잘 그려낸 영화. 농담같은 현실은 가까이서 봐도, 멀리서 봐도,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