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 Oct 27. 2019

포기하지 않았던 아빠, 포기할 수 없었던 엄마

가부장이란 이름의 폭력 4

가부장은 폭력이라고, 가장도 없어져야 한다고, 가족이라는 사회적 단위가 평등하고 민주적이어져야한다고 여러 편의 글을 쓰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럼 여자가 가장해'라는 댓글이 달린다. 여자가 가장을 하면 가장이라는 불평등한 권력체가 사라지나. 군대 없애자는데 여자들이 군대 가야 한다던 아무개들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여자가 하면 그렇게까지 불합리하고 폭력적으로 안 할 거라고 생각해서일까. 물론 여자가 하면 더 잘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약자의 위치였던 사람이 공감의 능력이 좀 더 발달했을 테니. 근데 가부장제는 여자가 가장을 한다고 해결될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성별을 떠나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에 취약하다. 편의대로 누리고 싶어 지고, 향유하게 되고, 그런 것에 익숙해지다 보면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서 위계에 의한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그런 부당한 권력을 누구도 쥐지 못하게 하는 것, 조금이라도 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한들 그 사람에 대한 견제가 건강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모두가 평등해지는 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수평 반전한들 기울어진 운동장임엔 변함이 없다. 반대로 기울이되, 적정선까지가 중요하다. 그러니 '반사'로 되받아치는 유치한 댓글 좀 그만 달아라. 무지한 댓글 앞에서 약해지는 나의 인류애, 논리로 설득해보려는 나의 순진함이 자꾸 발동해서 힘들거든. 물론 상종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지는 노력은 계속할 것이다.



아빠의 가부장주의는 엄마에게 고생병을 안겼다. 가장이고 싶었지만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하지만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고 허황된 꿈만을 좇았던, 더 이상 잃을 수 없을 만큼 다 잃어놓고도 반성할 줄 모르던 인간. 그런 인간도 가장이라고 떠받들며 그가 만드는 마이너스를 어떻게든 플러스로 끌어올리려 안간힘 썼던 엄마. 그리고 그런 부모를 둔 여섯 딸들의 삶은 지독하고 또 지독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본드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엄마는 아빠의 공장에 매일 일을 하러 갔는데, 우리가 아직 밥을 차려먹을 만큼 크지 않았을 때는 집에 두고 갈 수 없으니 같이 공장에 데려갔다. 내가 아직 한글을 떼기도 전에 나는 공장에서 아빠가 만드는 깔창에 도장 찍는 일을 했다. 다섯 살로 기억한다. 어느 날 공장 사무실 문에 매달려 놀다 떨어졌다. 하필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부터 떨어졌다. 정말로 노란 별이 반짝이더니 이내 기억을 잃었다. 몇 시간 만에 눈을 뜨니 나는 사무실에 흰 붕대를 머리에 칭칭 감고 뉘어져 있었다. 응급실에 데려갈 돈도 없어 붕대로 응급처치를 했던 것이다. 지금도 내 머리는 그 영향으로 한쪽이 툭 튀어나온 짱구다. 가끔 머리를 만지다 보면 병원도 가지 못했던 다섯 살의 내가 안쓰러워지곤 한다.


사진출처: 신동아, 1997년 12월 23일 외환은행 본점에 걸려 있는 환율동향판. [동아DB]

뭐, 그래도 그때는 먹고 살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다 더 이상 플러스가 아닌 때가 곧 왔다. 아빠의 사업은 적어도 내가 기억할 수 있던 때부터 줄곧 말아먹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때에 전국을 휩쓸었던 IMF 금융위기. 그 여파인지 아빠의 사업도 망했고, 우리 집은 다세대가구의 반지하방에서 채권자가 내어준 더 작은 반지하로 집을 옮겼다. 그쯤 엄마는 집 앞에 있던 문방구를 저렴하게 임대받아 생계에 대한 책임을 이어갔다. 나와 동생들은 학교가 끝나면 문방구 물건을 떼러 지하철 세정거장 거리를 오갔고, 가끔은 180원, 당시 지하철 승차표 값과 비슷하던 던킨도너츠의 먼치킨 하나가 먹고 싶어서 걸어서 갔다 오곤 했다. 엄마는 떡볶이를 만들어서 팔았는데 밀가루떡을 떼어 엄마에게 갖다 주는 일도 우리의 몫이었다. 엄마는 떡볶이를 다 팔고 냄비째로 가져오곤 했는데, 거기에 눌어붙어있던 밀떡의 맛은 내 가난한 기억 중에 그나마의 위안이다.


나는 키순서로 서면 맨 앞에서 두 번째쯤에 설만큼 내내 키가 작았다. 집에서 체구가 가장 작은 나를 아빠는 멀리 갈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 크고 나서 언니와 얘기해보니 언닌 그게 서운했더란다. 나만 예뻐해서 데리고 다닌 줄 알더라. 하지만 그건 예뻐서가 아니었다. 아빠는 빚쟁이들에게 사정을 하기 위해 가장 불쌍해 보이는 아이를 택한 것이었다. 나는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말랐다는 소릴 듣는 체형이다. 아빠를 따라 간 곳에서 나는 처음 본 아저씨들(물론 나중엔 얼굴이 익숙해졌지만)에게 아빠가 몇 달만 기다려달라고 말하는 걸 멀뚱히 듣고 있어야 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사정을 하는 것 같았고, 그 자리에 있는 게 전혀 내키지 않았다. 그렇게 빚쟁이들한테 데려가는 길, 버스 타기 전 아빠는 내 코트에 붙어있는 초등학교 이름표를 뗐다. 그걸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며 "유치원생이라고 해야 돼"라고 다짐을 시켰다. 그 어린 나이에도, 초등학교 명찰을 단 게 자랑스러웠던 8살이라서일까,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거짓말하지 말래 놓고 나에게 거짓말쟁이가 돼라는 것 같아 싫었고, 왜 내가 당당히 타지도 못하는 버스를 타고 따라나서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2년여를 아빠의 길동무 노릇을 해야 했다.


아빠는 사업을 접지 않았다. 오히려 정보통신의 바람이 불자 컴퓨터를 사고, 되지도 않게 족보를 인터넷에 만들어 팔겠다는 사업까지 벌였다. 그쯤 발 냄새가 나지 않는 깔창도 만들어서 특허니 뭐니 하며 안 그래도 빚더미인 집에 빚을 늘렸다. 초등학교 3학년 쯤이었다. 엄마는 노점을 시작했다. 문방구 보증금까지 털어서 아빠가 사업에 갖다 썼기 때문이다. 엄마는 엄동설한에 양말을 세 개씩 껴 신고, 바지를 세 개씩 껴입고, 윗도리를 다섯 개씩 걸치고 초등학교 앞에서 달고나 장사를 했다. 그래도 우리 눈에 안 띄겠다고 우리가 다니지 않는 학교에 가서 장사했다. 여름엔 파인쿨을 얼려서 가지고 나가 뙤약볕에서 팔았다. 나는 요즘도 사람들이 달고나나 파인쿨로 추억팔이를 하면 엄마 생각이 나서 마음이 시큰하다.


나는 우유값을 낼 수가 없어서, 아침 7시 반에 가서 우유를 나눠주는 당번 노릇을 했다. 우유 당번을 하면 너희 집 거지냐, 돈 없어서 하는거냐고 아이들이 놀렸다. 놀림받기 싫어서 아이들이 보지 않는 시간에 일찍 가서 미리 나눠놨다. 급식비를 안내서 불려 간 건 매번이었고, 소풍이며 수련회며 그런 돈도 당연히 제때 낸 기억이 없다. 나는 당시 충치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엄마한테 충치 때울 돈을 달라고 할 수가 없어 신경치료를 하다 만 상태로 10년을 방치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충치치료를 다시 받았는데, 이 뿌리만 남은 상태라 이 하나를 통째로 금니로 씌워야 했다. 철판 깔고 그때 돈을 달라고 할 걸, 생니 하나를 그냥 날렸네.. 싶지만, 내가 말했다고 해도 엄마에겐 그 돈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노점을 나가며 고생하는 게 너무 보여서, 나와 동생들은 집안일을 했다. 엄마는 우리 이름으로 통장을 하나씩 만들어주고 우리가 청소를 해놓으면 하루에 200원씩 저금을 해줬다. 우리는 천 원을 은행에 가져가서 다섯 개의 통장을 내밀고, 200원씩 나눠서 저금을 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집안일과 함께 우리가 한 것은 동네 산에 가서 약수를 떠 오는 것이었다. 구르마(손수레)에 물병을 담고, 백팩에 메고 한겨울에도 물을 받으러 다녔다. 겨울엔 밑에 있는 물들이 다 얼어버려서 깊숙한 곳까지 올라가야 했다. 왕복 한 시간쯤. 돌아오자마자 이불속에 손을 넣었다 뺐다, 발갛게 부어오른 볼을 문질문질 했다. 그러고도 손이 트고 얼굴이 텄다. 물론 그 시간에도 아빠는 집에 있었고, 약수터를 다녀와서 우린 아빠 밥을 차려야했다.


그렇게 모은 노동의 대가를 아빠는 말 한마디 없이 가져다 썼다. 자신의 차비로, 밥값으로, 이름 모를 용처로. 머리가 크면서 통장을 몰래 숨겨뒀는데, 아빠가 통장을 달라고 깨우던 기억이 악몽처럼 남아있다. 나는 일부러 통장을 주지 않으려 자는 척을 했다. 아빠는 방을 다 뒤져서 통장을 찾아가거나 소리를 지르며 깨우기도 했다. 나는 통장을 뺏긴 게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혼자서 많이 울었다. 그 분한 마음으로도 아빠 점심을 차려줬다.


당시 티비만 틀면 나오던 '성공신화' '대박' 등의 신드롬에 취한 아빠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 30년 만에 성공했다, 10번 망하고 11번째에 대박이 났다더라하는 카더라의 다음 주인공이 자신이라 확신했다. 지난 몇 번의 실패가 자신의 사업수완을 증명해줬지만, "이번에는"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에 매번 올인했다. 가장이지만 가져가는 돈이 더 많은 아빠때문에 엄마는 몇 곱절 가장 노릇을 해야했다. "너희만 아니었으면 진작 이 집구석 나갔을건데, 씨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집구석에 붙어서.." 우리 탓도, 아빠 탓도, 그러다 가끔 울기도 했지만, 엄마는 아무것도 놓지 못했다. 엄마는 도저히 가계에 대한 책임을 저버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아빠랑 다르게, 그런 사람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때리는 건 가르치는 방법이 아니라 길들이는 방법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