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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Oct 24. 2019

때리는 건 가르치는 방법이 아니라 길들이는 방법이다

가부장이란 이름의 폭력3


나를 이십대 초반까지 괴롭히던 버릇이 있다.

바로 옆 사람의 손이 내 목 위로 올라오면 몸을 잔뜩 움츠러드는 것이다.

옆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만지려 손을 올릴때도 흠칫, 버스 손잡이를 잡으려 손을 올려도 흠칫..

작은 키 덕에 "쫄지마 키 안 커"라는 농반 진반의 말을 질리도록 들었다.

유전적으로도 키가 크긴 힘든 조건이지만, 내가 쫄아서 안 큰 건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는 다혈질이다. 작은 일에 버럭 화를 내고, 조금만 성가셔도 수시로 손찌검을 했다.

딸이 여섯, 다섯이라 집에 바람 잘 날 없는 것이 당연한데도, 조금만 투닥거려도 쫓아와서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후려쳤다. 아주 어릴때, 적어도 내가 기억할 수 있을정도로 어릴때부턴 그렇게 맞았다.

그나마 엄마는 회초리를 들었다. 물론 정해진 것 없이 파리채, 옷걸이 등등이었지만, 그나마 손으로 때리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밥을 먹다가도, 티비를 보다가도, 가만히 있다가도 손찌검을 했다. 주로 머리를 때렸고, 엄마가 왜 애 머리를 때리느냐고 몇 차례 항의를 했지만, 아버지는 우리가 성인이 되도록 그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

이미지출처: 공감신문


한 번은 셋째와 넷째 동생이 싸우고 있었다. 나는 거실에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동생들은 거실 옆방(방 문을 떼어내서 사실상 거실로도 볼 수 있음)에서 싸우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화가 난 아버지는 득달같이 달려와서 내 싸대기를 후려쳤다. 나의 잘못은 동생들을 말리지 않은 것일까? 나와 두세살 터울의 동생들이 싸우지 않도록 지도감독할 책임이 나에게 있었던 걸까?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 억울했지만 따져 묻지 못했다. 더 맞지 않을 방법은 그저 혼자 울음으로 삭히는 것 뿐이었다. 그게 내가 맞았던 첫번째 싸대기였다.


열두살쯤이었나. 매주 가는 시골에 가고 싶지 않았다. 사춘기가 시작했던걸까. 친구들과 주말에 놀고 싶었고, 친구들과 놀지 못해도 혼자 집에 있고 싶었다. 밥도 해먹을 수 있고, 집안일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가족들이 집을 나설 때 말했다. 난 시골에 안 갈래. 빨리 나오라고 윽박을 지른다. 싫어, 안 간다고. 아빠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싸대기를 때렸다.

"할머니 살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할머니는 그 뒤로 20년 가까이 살아계시고, 너무도 정정해서 아직도 엄마와 우리 딸들을 괴롭히고 있다.


아빠의 폭력성은 가부장적 그집 문화에서 나온 것 같다. 그집 아들들은 하나같이 폭력적이다. 툭하면 윽박지르고 화를 내고 때린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나. 시골에서 작은아빠네 과수원 일을 돕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동갑인 사촌, 그집 딸과 다퉜다. 별로 크게 다툰 것도 없었던 것 같다. 갑자기 작은아빠가 오더니 내 싸대기를 때렸다. 누구의 잘못인지 묻지도 않았고, 그집 아이는 맞지 않았다. 나만 맞았고, 너무 억울해서 또 펑펑 울었다. 엄마한테 말해도 엄마는 그러게 왜 싸웠냐며 나를 나무랐다. 그집에선 그집 아들들이 최고였고, 그들은 여자를 때려서라도 가르쳐야한다고 생각하는듯했다. 그 가르침이라는 것은 자신들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게 하는 것이지만. 이게 내 인생에서 기억나는 4번의 싸대기 중 한 번이다.


나머지 한 번의 싸대기는 언니에게 맞았다. 설거지를 시끄럽게 한다는 이유였다. 언니가 설거지를 하지 않고 나를 시켰다. 내가 11살, 언니가 14살쯤이었던 것 같다. 왜 내가 설거지를 해야하는지 너무 짜증이 났다. 그릇을 툭툭 내려놨나보다. 설거지를 왜 이렇게 시끄럽게 하냐고 언니가 소리를 질렀다. 내 맘이야, 라고 말했던 것 같다. 언니가 쫓아와서 싸대기를 때렸다. 그땐 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빠의 폭력을 보고 배운 언니는 마찬가지로 나와 동생들을 많이 때렸다. 그리고 내가 조금 컸을땐 나도 동생들을 많이 때렸다. 조금 크면서부터는 서로 때렸지만, 어쨌든 폭력이 아래로, 아래로 향했던 것은 변함이 없다.


가족이라는, 가장 평등하고 행복할 것 같은 사회적 단위는 사실 가장 위계적이고 폐쇄적이며, 폭력적이다. 가족의 구성원들은 대체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경제적, 정신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고, 부모가 늙으면 그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의존하게 될테다. 아무리 싫고 벗어나고 싶어도 경제력이 없는 영유아, 청소년기에 가족을 벗어날 방도는 뚜렷하지 않다. 청소년쉼터? 가출청소년이란 낙인을 견뎌가며 뛰쳐나가서 배달일이라도 해야하나. 그 가출청소년은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밟고, 정상적인 어른(번듯한 직장을 가진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을까. 그저 조금만, 조금만 하며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보다 나은 선택은 없었다. 아빠의 무게니 뭐니 하는 캠페인성 이야기들을 곱씹으며 그래도 아빠가 나한테 잘해준 것들, 아빠의 고충들을 상기하며 버텨냈다.


수시로 가해지는 폭력에 나는 항상 위축되어있었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이 말이 저 사람이 원하는 말일까. 맞지 않으려던 분투는, 미움 받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변해갔다. 지금도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는 걸 주저하기도 한다. 그게 그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서다. 그러지 말아야지, 스스로 다짐하며 고쳐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어렵다. 특히 성인 남성에게 그런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들의 외형에서부터 오는 심리적 위압감이 너무도 버겁다. 성인남성에게 뭔가 할말이 있으면 며칠전부터 속앓이를 하고, 심장이 뛰어 잠도 못 잔다. 그래놓고도 앞에가서 또 다시 작아진다.


나는 폭력의 문제가 단지 폭력적인 성향, 개인의 성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명 엄마와 아빠의 폭력은 달랐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졌다고 여기는 자들이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고 믿는(그래야 한다고 믿는) 자들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했다. 그렇다면 그건 위계구조가, 권력구조가 만들어 낸 문제다. 누구도 권력을 향유하지도, 우위를 지니지도 않는다면 폭력은 발생하기 어렵다. 아빠를 떠받들어야 했던, 그럼에도 아빠니까 함부로 말해도, 대들어도 안된다고 가르쳤던 가부장적 문화가 아빠의 폭력성을 쉽게 드러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빠의 권위주의적인 행동을 물려받아 첫째가, 둘째가, 셋째가, 그 동생들에게 전가했던 것이다. 그래도 되니까 그랬던 것이다. 가부장의 문제는 단지 아빠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 엄마의 헌신으로만 수렴되지 않는다. 그 가족구성원 모두를 억압하고, 해친다.


나에게 가부장은 아빠이면서, 폭력의 다른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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