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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Oct 23. 2019

아들 생산을 위해 소비된 엄마의 몸

가부장이란 이름의 폭력 2

우리집은 딸만 다섯이다. 엄마는 아들을 낳으려고 아이를 7번 임신하고, 6번 낳았고, 그리고 한 번 잃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 엄마는 30년 가까이 그집(할머니네)에서 죄인으로 살았다.

그집 아들들 누구도 아들이 없지만, 둘째 아들의 부인인 엄마에게 모든 화살이 쏠렸다.

그집 큰 아들은 소아마비를 겪고 있다. 장애를 이유로 큰 아들 노릇은 둘째인 아빠에게 넘겨졌다.

아빠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가부장적 요구들을 적극 수용했다. 그 요구들로 인해 부담을 지는 건 사실 본인이 아니었고, 그 요구를 충족하지 못했을때도 자신에게 화살이 향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나와 바로 밑 두 동생은 터울이 얼마 되지 않아서, 내 기억에 있는 건 그 밑의 두 동생들을 임신했던 때다. 엄마는 다섯째를 임신하고도 아빠의 공장에 일을 하러 가고, 시골에 가서 농사일을 돕고, 그집 가사를 도맡았다. 한편 엄마는 뱃속의 아이가 남자아이일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백호꿈을 꾸었다, 요 아래 사는 점쟁이한테 물어보니 이번엔 아들이라더라, 아들 가지면 배가 이렇게 나온다는데 맞냐.... 동네 아줌마들과 모이면 항상 그런 얘기를 주고 받았다. 아이를 낳으러 간 날, 내 기억에 처음으로 아빠가 밥상을 차려줬다. 태워먹은 냄비밥과 맹물같던 라면이었다. 그 맛대가리 없는 밥상이 시간이 갈수록 분노가 치미는데, 아빠가 그 나이때까지 라면 한 번 지 손으로 안 끓여먹었다는 사실은 돌이킬수록 화가난다. 


안타깝게도 다섯째는 또 딸이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하미였다. 나와 동생들의 이름이 가0 나0 다0인데, 다섯째로 끝내겠다며 하로 시작하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말자같은 이름이다. 언니의 이름이 규칙에서 벗어난 건 언니를 낳을때만해도 이렇게 아이들을 많이 낳게 될 지 몰랐기 때문이다. 둘째마저 딸인 걸 알았을때 나의 부모는 첫째를 안았을때만큼 벅차하지 않았다. 이제 '또 딸'이 된 것이다. 둘째부터는 숙제처럼 떠안은 '딸들'일 뿐이었다.


이미지출처: 경향신문

다섯째를 낳았을 때 엄마의 나이는 서른 다섯. 스물 여섯의 나이에 결혼해서, 결혼하자마자 첫 아이를 임신하고, 장장 10년 가까운 세월 아이를 밴 상태로, 산모인 상태로 보냈다. 아이의 젖을 물리기도 전에 다른 아이를 밴 때도 있었다. 엄마는 아마도, 강박적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임신을 했을 것이다. 단순히 피임을 모르는 옛날 사람들이어서라고 하기엔, 아들을 향한 엄마의 집념과 할머니의 구박은 그리 작은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아들도 못 낳는다'며 구박을 했고, 엄마는 자신이 '아들도 못 낳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아 발악에 가까운 노력을 했다. 물론 태아의 성별 유전자는 여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걸 아무리 말해도 엄마는 죄인이었고, 엄마는 있지도 않은 죗값을 치르며 살았다. 


여섯째를 뱄다. 언니와 나는 딸 다섯도 모자라 아이를 또 낳느냐며, 대체 몇명을 낳을 셈이냐고 엄마를 들볶았다. 가출을 하겠다고 협박도 했다. 그렇다고 아이를 지울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의 엄마는. 엄마는 이번에도 점쟁이를 찾아가고, 절을 찾아가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번엔 진짜 아들같지 않냐며 추궁에 가까운 질문을 하며 임신기를 보냈다. 이 때 IMF의 여파인지 아빠가 하던, 돈도 얼마 안 되던 사업마저 망했고 빚더미에 올랐다. 우린 반지하 빌라로 이사를 갔다. 원래도 다세대주택의 반지하였지만 규모가 좀 더 작아졌고, 좀 더 빌라밀집촌에 위치해있었다. 엄마는 임신상태로 문방구를 운영하고, 가사를 도맡아했다. 이제 우리가 가사를 거들만큼 컸지만, 여전히 요리나 설거지의 대부분은 엄마의 몫이었다. 


여섯째를 낳으러 가면서 엄마는, 마치 장이라도 보러가듯 떡볶이를 해주고는 혼자 병원으로 갔다. 그 날 밤 엄마는 혼자 아이를 낳았다. 또 딸이었다. 엄마는 산후조리는 커녕 다음날 바로 퇴원을 했고, 가사를 했고, 돈을 벌러 갔다. 엄마의 나이 서른 여덟, 13년간 이어진 임신과 출산의 고리가 드디어 끊어졌다. 임신과 출산의 도구로 소비된 엄마의 몸이 드디어 해방됐다. 물론, 원하던 결과는 얻어지지 않았다. 적장자를 위해 혈안이 됐던 우리집에서 여전히 엄마는 죄인이었고, 우리도 덩달아 죄인이었다. 


우리의 존재가 죄라는 사실은 유년시절 내내 아프게 남아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자 사촌들보다 할머니집의 농사와 가사를 더 많이 했다. 그 사촌들의 밥까지 차려줬고, 할머니의 화투나 윷놀이 상대도 해드렸다. 그럼에도 우린 큰 소리를 내서도 안 되고, 울어서도 안 됐다. 말대꾸를 해서도 안됐고, 덜 성실해도 안됐다. 그들의 요구에 최대한 맞춰주면서도 계집애가 어쩌고, 가시나가 어쩌고, 여자가 어쩌고, 암탉이 어쩌고, 딸년들이 어쩌고와 같은 듣기 싫은 소릴 들어야했다. 억울했지만, 억울할 수 없었다. 그게 딸의 운명이라고, 딸만 낳은 엄마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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