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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Oct 28. 2019

노름도, 사업도, 보증도 안 한 엄마의 파산

가부장이란 이름의 폭력 5

엄마가 달고나 노점을 하며 살뜰히 모은 돈으로 닭꼬치 노점을 차렸다. 그 무렵 막내는 갓돌을 지났고, 다섯째는 다섯 살의 나이였다. 우리는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집에 있지만 노는 건지 일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가는 아빠를 대신해서 다섯째, 여섯째를 돌봤다. 그날은 주말이었다. 나는 친구와 약속이 있었고(결국 그 친구는 한 시간이 기다려도 오지 않았지만), 다섯째를 봐줄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다시 말하지만 아빠는 집에 있었다.). 동생을 보라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약속 장소로 갔고, 다섯째는 혼자 엄마가 하는 노점 근처 분식점을 기웃거렸다. 그 집 아줌마는 그 애가 안됐어서 가끔 떡볶이에 버무린 튀김을 하나씩 주시곤 했다. 그날도 그 아이, 하미는 그걸 받아먹겠다고 그 분식점 앞에 있었나 보다. 분식점에서 김말이 튀김을 받고 시장 골목에 내려서던 아이는 1톤 트럭에 치였다. 집에 있던 아빠가 부랴부랴 양말을 주워 신고 아이를 응급실로 데려갔지만 결국 죽었다. 엄마는 남들 눈 때문에 아빠가 양말이며 옷을 챙겨 입느라 제때 못 데려갔다며 목이 메도록 울부짖었다. 물론 그 아이의 죽음이 그것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말은 십 여년 간 맺혀온 엄마의 가슴 속 응어리였다.


엄마는 일주일을 앓아누웠지만, 엄마의 노동으로 가계가 이어지고 있었기에 곧바로 일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때 마침 붐이었던 보험설계사. 엄마는 그때부터 20년 가까이 그 일을 해오고 있다. 엄마는 마스터에도 오를 만큼 실적이 괜찮았다. 한창 보험이 붐이었고, 아직 레드오션은 아니었다. 한 달에 300 넘게 벌기도 했다. (그땐 정말 큰돈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잘 벌어서 신이 난건지 아빠는 사업의 규모를 키워서 본격적으로 말아먹었다.


이미 신용불량자라 엄마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던 아빠는 군대 납품만 되면 대박이라고, 특허만 받으면 성공이라고, 엄마한테 급전을 계속해서 요구했다. 엄마는 이번엔 될 거라고, 이번엔 진짜라고, 그 말만 믿고 되는대로 대출을 받고 월급을 바쳤다. 사실 그 말을 믿었는진 모르겠다. 아빠가 달라고 하니까, 가장이 하는 일에 여자가 발목 잡으면 안 되니까 줬던걸 지도 모르겠다. 내내 말아먹던, 이대로는 초등학생이던 우리가 봐도 위태롭던 상황에서 우리가 엄마한테 빚 그만 지면 안 되냐고 몇 번을 사정했다. 엄마는 "너희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빠가 안되는 거 아니야." 하며 신념에 가깝게 아빠의 사업을 지원했다.


집엔 수시로 빚쟁이들이 찾아왔고, 우린 아빠가 없다고 둘러대기도, 아빠를 곤혹스럽게 하려고 일부러 불러내기도 했다. 그러다 몇 번은 집에 압류딱지가 붙었고, 그걸 해결하겠다고 엄마는 사채까지 썼다. 대학을 다닐 때였다. 엄마에게 날아오던 수십 장의 독촉장들을 보고 하루는 너무 무서워서 일일이 펼쳐봤다. 우리 집 월세 보증금의 몇 배가 넘는다. 집에 온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사채까지 썼어? 엄마 진짜 미쳤어? 어떻게 사채를 써. 엄마 그러다 진짜 우리 다 죽어." "걱정 마. 너네한테 피해 안 가게 할 테니까. 아빠 사업 이번에만 잘되면.." "엄마, 아빠 사업 잘 안 돼. 20년 넘게 말아먹은 사업이 지금 와서 될 리가 있어? 요즘 누가 저런 깔창을 신고, 누가 족보를 만들어. 엄마 그냥 안되는 거야. 엄마 제발 희망 좀 갖지 마." "너는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누가 너더러 갚으랬어!!" 아빠의 말아먹은 사업 얘기만 나오면 엄마는 그렇게 역적을 냈다. 그때 엄마는 스님한테서, 점쟁이한테서 이번엔 된다더라 하는 얘길 듣고 왔다고 했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다들 안된다고 했었단다. 아빠 기죽을까 봐, 여자가 그런 소리하면 재수 없으니까, 아들도 못 낳은 주제라서 엄마는 아무말도 못 했다.


아빠는 몇 안 되는 거래처에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됐어요. 그럴 거면 거래 끊으세요!" 하는 전화를 몇 번 들었다. 그렇게 모든 거래처가 끊겼다. 아빠가 가오 세우던 동안 엄마의 등은 점점 굽어갔다. 아빠의 허황으로 엄마는 결국 파산신청까지 해야 했다. 그런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나는 중학교 졸업 직전부터 취업하기 전까지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언니와 나는 고등학교 내내 내신을 관리하고 자격증을 따서 스펙을 쌓고 할머니의 명에 따라 고등학교 졸업 직후 대기업에 취업을 했다. 언니가 취업하고 1년쯤, 우리집은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게됐는데, 언니가 3천만 원 대출을 받아 집 보증금을 대어 겨우 이사를 했었다. 아빠는 그 보증금마저 담보 잡아 돈을 빌려다 썼고, 결국 경매로 살던 집이 또 넘어갔다. 그 집마저 날려먹고 우리 가족은 겨우 저소득자 전세자금 대출에 기대서 곰팡이 피는 반지하방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가면서 엄마는 넘어간 집을 낙찰받은 사람들이 100만 원 이사비를 준댔다고 자랑하듯 얘기를 했었다.


이미지출처: 경제신문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을 했을 때, 나는 그 공장에서의 일들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고만고만한 언니들의 텃새와 기계 소음들.. 스물도 안 된 내가 견디기엔 버거운 곳이었다. 게다가 대졸자와 나의 임금차는, 내가 10년을 일해야 겨우 따라가는 수준이었다. 그럴 거면 나도 대학 가서 취업하는 게 낫겠다 생각했지만, 쉽게 그만둘 수가 없었다. 취업해서 동생들 대학 보내야 한다던 할머니 말 때문에, 생활비 좀 보태달라던 엄마의 말 때문에.. 친구들 야식 먹고 옷 사고할 때 공장에 달린 기숙사에 살면서, 회사에서 주는 밥만 먹으면서, 남들이 버린 옷 주워 입으면서 열심히 돈을 모았다. 그래, 1년 치 등록금만 모아서 나가자. 그걸로 대학가자. 매일을 울면서, 공황장애니, 수면장애니, 소화장애를 겪어가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 나왔다. 아빠가 할머니한텐 말하지 말란다. 자랑스러운 삼성인에서 졸지에 고졸 실업자가 된 나는 할머니 가슴의 대못이라는 것이다. 그때의 나는, 알겠다고 했었다.


공공도서관에서 재수를 했다. 모아놓은 돈으로, 편도 40분 이상 거리의 도서관을 걸어 다니면서, 식은 도시락을 먹으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커피 한 잔 안 사 마시면서, 생일날 2500원짜리 백반 먹는 걸 소원이라 생각하면서, 동생이 학교에서 받아다 주는 정답 쓰여있는 교사용 문제집을 손으로 가려가며 풀면서, 동생들이 다 푼 문제집을 지우개로 지워서 풀면서, 남들이 버린 참고서를 주워다 보면서, 그렇게 재수를 하고 있었다. 당시 내 통장엔 800만 원 정도가 있었다. 엄마가 대뜸 300만 원만 빌려달라고 한다. "나 돈 없어." 알겠다면서 엄마는 뒤돌아서 이모한테 전화를 한다. "나 300만 원만 빌려줘.." 왜 하필 내 앞에서. 왜 그걸 난 또 모른척하지 않았을까. "알겠어, 엄마 내가 빌려줄게. 이모한테 돈 빌리지 마." 카드와 비밀번호를 넘겼다. 엄마가 울면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통장엔 이제 500이 남았다. 몇 주 뒤 엄마가 말한다. "엄마 500만 원만 빌려줘." 왜 카드째로 넘겨서 잔액을 보게 했을까. 그걸 알고 말한 게 분명하다. "엄마 나 이거 대학 등록금 하려고 모아놓은 거야. 왜 이거까지 가져가려고 해....." 울면서 사정했다. 엄마는 또 미안하다며, 올해 안에 갚겠다고 했다.


아빠는 단 한 번도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통장을 통째로 가져간 적은 있지만, 내가 직접 번 이후에는 가져간 적이 없다. 그 역할은 항상 엄마가 했다. 어떻게든 구해오라는 아빠의 윽박지름에 엄마는 형제자매들, 동료들, 하다못해 딸들에게까지 손을 벌렸다. 아쉬운 소리는 항상 엄마의 몫이 었고, 그 돈을 가져다 말아먹는 건 아빠의 몫이었다. 그것 또한 엄마가 가장의 기를 살려주는 방법이었고, 아빠가 원하는 가장 대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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