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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Jan 14. 2020

경제발전, 모두가 잘 살기 위한 것 맞나요?

아프고 다쳐야만 발전하는 이상한 경제

무궁화호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 앞에 앉은 노년 남성의 창가에 대고 있는 손이 어색하다. 무례한 행동이지만 의아스러움에 유심히 보게 되었다. 손가락 절단 장해자셨다. 20년도 더 전, 父가 하던 공장에서도 새로 들어온 20대 여성 직원이 출근 첫 날 기계에 손이 다쳐 응급실에 간 일이 있었다. 그 뒤로 그 여성분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그 분의 이후사정은 너무 어린나이라 알지는 못한다. 그저 회복 가능한 사고였기를 바란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잔 마시는 밤 
덜걱덜걱 기계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 보았네 
잘린 손가락 묻고 오는 밤 설운 눈물 흘리는 밤 
피 묻은 작업복에 지나간 내 청춘 이리도 서럽구나 


기계작업을 하다 손가락이 잘려나간 노동자가 어찌나 많았으면 8-90년대엔 그걸 제목으로 노래가 나오기도 했었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잘린 손가락을 공장 담벼락에 묻었고, 거기엔 이미 많은 노동자들의 손가락이 있었다고 한다. 고작 손가락 하나 잘려나간 건 아무 일도 아닌 세상이었다. 사용자는 노동자의 부주의를 탓했고, 재수없다며 되려 쫓아내기도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죄송하다고, 계속 일하게만 해달라고 매달렸다.  동료들은 "어휴 조심했어야지"하며 혀를 끌끌 찼다. 우리 사회는 개인의 안전에 대해 무감각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한다. 잘려나간 손가락도, 봉제실에서 피를 토하며 혹은 기계에 끼이고 치여 죽어간 노동자들도 경제발전을 위한 희생이었다고 포장한다. 제대로 된 보상은 커녕 일한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치료비도 한 푼 못 받았는데.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고, 살아남은 이들만 자신의 공로를 치켜세우고 있다. 8-90년대는 분명 오래전이다. 족히 30년은 더 지난 옛날 얘기다. 그 오래전 이야기까지 끌어다가 우려먹는 게 조금 치졸한지 모르겠다, 그게 정말 '옛날 이야기'이기만 했다면. 


'공상'이라는 말이 있다.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그 사업장에 미미한 책임을 묻는다. 산업재해보상보험료를 인하하지 않는다든지, 중대 재해가 일정조건으로 발생하면 작업중지를 한다든지. 그걸 피하기 위해, '무재해 사업장'으로 인정받기 위해, 기업들은 산업재해 신고를 하지 않고, 노동자에게 산재보상 대신 치료비나 위로금 조를 지급한다. 그리고 각서를 쓴다. ‘사고와 관련하여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하지만 각서를 쓰고나면 치료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거나, 요양이 필요해도 요양대신 통원을 하도록 종용하거나, 이후 장해가 생겨도 보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근로자는 산재신청을 하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회사의 말에 위축되어, 그리고 조금은 내 책임 같기도 하여 마지못해 공상처리에 동의해버린다. “우리는 산재 신청하면 안되는 회사야”라고 버젓하게 말할만큼, 여전히 많은 사업장에서 관행으로 삼고 있다.


물론 그마저도 요구하지 못하고 자신의 부주의라고 자책하며 회사 몰래 자부담으로 치료하고 아픈 티도 못 내는 노동자들도 많다. 그러다보니 산재 사고는 제대로 집계되지 않아서, 우리나라는 산재사고 발생비율에 비해 사망자수가 월등히 높다. 산재사고는 적으나 사망은 많은 나라. 다치기만 하면 죽는 나라? 죽어야 산재인 나라? 어떻게 해석해도 끔찍하긴 마찬가지다. 


경제발전이라는 환상 속에서 여전히 우리 사회의 경각심은 부족하다. 산재사망자의 40%가 과로와 연관성이 높은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사망하는데도, 제1야당의 국회의원은 주 100시간 일할 자유를 달라고 말한다. 중대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가 하루 평균 2.5명이라는데도, 산업안전 기준을 강화하는 것이 기업의 생산성을 저해한다며 반대한다. 산업재해 사망자 10명 중 4명이 하청노동자인데도, 원청에 책임을 묻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불안정한 노동, 근로기준법을 회피하는 근로조건을 혁신이라 말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돈 몇 푼을 사람목숨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노동자의 죽음을 신문의 기사 한토막으로 스치는 우리는, 그저 평범한 일상의 단면처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람이 아닌 그냥 숫자에게 일어난 일로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6명이 죽었대, 어머나. 수십명이 다쳤대, 아이고 어쩌나. 한 명, 한 명의 죽음이고, 그 가족들의 끝나지 않는 고통인건데, 숫자 뒤로 그 얼굴과 이름들은 다 지워져버린다. 그 이름을, 그 사고를 기억하고자했던 경향신문의 기획기사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는 그래서 더 반가웠다. 

경향신문,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노동건강연대 임준 교수가 스웨덴 사람에게 '일하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 스웨덴 사람이 놀라 반문했다. 

'사람이 일하다 왜 죽나요?' 


군가의 희생으로만 이룰 수 있는 발전과 번영이면 단호히 거절해야하지 않나. 희생자에겐 내일이 없고 미래도 없는데, 발전이고 번영이고의 수혜가 있을 수 없는데, 대체 뭘 위해서 누굴 위해서 그래야하는걸까? 사람의 목숨과 경제적 이익을 셈한다는 발상 자체가 소름 돋고 무섭다. 아니었으면 좋겠다. 안 그런 세상이면 좋겠다. 사람의 목숨 앞에선 얼마라도 비용이나 손실이 되지 않는, 사람 하나를 살리기 위해 얼마라도 감수할 수 있는 사회면 좋겠다. 돈 보다 소중한 게 세상에 많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부끄럽지 않은 어른들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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