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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Nov 21. 2019

“가는데마다 여자들밖에 없네!”

저렇게 늙진 말아야지

공교롭게도 내가 일하는 곳엔 여성 노동자들뿐이다. 그런 우리 사업장에 한 남성 노동자가 왔다. 우리가 주문한 포스터를 가지고 온, 어찌보면 우리를 상대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이다. 

“가는데마다 여자들밖에 없네!”


'안녕하세요'도 아니고, '수고하십니다'도 아니고, '여자들밖에 없다'는 탄식을 인사로 내뱉다니. 너무도 무례한 광경에 어이가 없다. 최근들어 생기고 있는 중년 남성에 대한 혐오와 그의 무례함이 강한 상호작용을 일으켜 온순한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 물건을 받는 동료가 얼렁뚱땅 웃고 넘기려한다. 오지랖으로 무장하고 그 상황에 진입했다. 포스터 내용을 봤다. 성희롱 예방. 여성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성희롱 예방 캠페인의 일환으로 배포할 포스터를 제작했던 것이다. 
“여기가 성희롱 상담하는데라 여자들밖에 없는 거에요. 여자들이 당하니까 여자들이 주로 일하게 되는거고, 남자들이 이 일 하러 잘 안오기도 하고요.”


최대한 친절히 설명해줬는데 돌아오는 답변이 가관이다.
“아니! 오늘 여성정책연구원이다 뭐다 다녀봤는데 죄다 여자들 밖에 없더라고 허허허”


성희롱 예방에 관심있는 게 여자들뿐이라 그런거겠지, 여자들이 당하니까 여자들이 나서서 예방하자고 포스터를 만들었겠지, 여자들만 있는 단체들만 겨우 관심을 가지는 거겠지. 맥락 없는 그의 말에 더 화가난다. 설령 본인의 배송품의 내용을 몰라서라고 해도 뭐가 문젠데? 내가 있는 곳도 그렇고, 다녀왔다는 그곳도 그렇고 이름부터 여성이 들어간다. 여성들이 주류일 게 이름만 들어도 뻔하다. 근데 여자들이 있는게 왜 그분은 신경이 쓰였을까. 이미 여성이 들어간 회사의 이름부터가 그 분의 심기를 건드린 것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여자들만 있는게 문제가 있나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건지 모르겠네요.”  


그의 별거 아닌 시비에 난 눈물이 날만큼 화가 났는데,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난건 진 나도 잘 모르겠다. 그 무례한 말이 '여자들이 다 꿰차고 있으니 남자들이 일할데가 없지'를 담고있을 거라는 건 나의 피해망상일까.
남자들 많은 사업장에 가서도 저런 소릴 하실까. '왜 여긴 죄다 남자들뿐이야? 허허허' 

아닐 것이다. 단순히 성별 불균등에 부정의함을 느껴 하는 말이었을 리 없다.


나는 저 사람의 등장에 눈을 째리거나, 왜 왔냐고 기분나쁜 투로 말한 적이 없다. 저 노동자의 노동이 나 때문에 더 힘들어지길 바라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타인의 노동환경을 악화시키는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을 의무가 있고, 평온한 노동환경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기본적인 노동인권의 문제다. 물론 이 원칙을 모든 노동자들이, 모든 사람들이 수용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것이다. 안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근데 왜 안 그런 사람들은 비슷한 유형으로 존재하는 걸까.


물론 나를 동등한 노동주체로,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던가. 고객이 왕이라는 명제에 전혀 동의하진 않지만, 저렇게 타인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최소한 그거라도 있어야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고객이, 돈을 주는 사람이 갑이라는 건 자본주의의 일반 명제인데, 대체 돈 주는 사람에게 조차 갑질을 하게 만드는 성별권력의 실체가 뭘까. 돈이 최고인 자본주의의 원리를 뛰어넘는 남성우월주의를 어찌 설명해야할까. 이런 중년 남성의 무례함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이미지출처: DB Webzine

요즘 중장년, 특히 장년 남성들에 대해 화 나는 일이 많다.
여성 간호사에게 유독 상냥한 웃음과 말동무라는 감정 노동을 요구하는 것, 

자기가 뭐라고 젊은 여자가 자길 좋아한다고 확신해서 동료들에게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다니는 것, 

자신을 대우하지 않는다고, 무시한다고 버럭하는 것. 

너무 뻔하고 식상한 레퍼토리라서 장년 남성이 학교라도 다니는건가 싶을지경.


왜 그들은 세상이 변한 걸 모르는걸까. 변한 세상에서 도태되어야할 말과 행동들을 자신의 정체성이라도 되는양 부여잡고 있는 게 너무 한심하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서 어쩔 수 없다고 단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방법이 있다. 알려고 하면 알 수 있고, 최소한 고치려 노력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진보의 동물이다. 그러려니, 넘어가주니 저래도 되는 줄 알고 고쳐먹질 않는거다. 그저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 경직성이, 자기만이 옳다는 자만이 그들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였음 좋겠다. 그런 경직성은 제 하나를 도태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불쾌하게 만든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저 하나 옳다고 고집부리는 인간들을 단호히 거부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체념 보단 부정이 그들에겐 필요하다. 자기안에 갇히면 어떻게되는지, 사람이 얼마나 추해지는 지 다시금 깨닫는다. 살면서 수백번도 더 되뇌인 것이지만 또 한 번 기억해야겠다. 

'저렇게 늙진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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