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 Dec 03. 2019

활동도 노동입니다

활동가들의 소외


얼마 전 한겨레에 《  적은 임금에 과로, 감정노동…공익활동가들 몸도 맘도 ‘번아웃’  》 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인권재단사람·인권운동더하기에서 진행한인권운동 활동가 조사 결과 발표에 대한 기사였다. 이 조사는 지속가능한 인권활동을 위한 것이었고, 열악한 활동가들의 처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난 사실 그래서 더 감흥이 없었다. 이런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공익활동가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를 몰라서 못 고쳤다고? 라는 모종의 반감과 그럼에도 내 처지는 낫구나 싶은 몹쓸 안도감만 빼면. 



나는 활동가다. 공익을 목적으로 활동을 하지만, 봉사는 아니다. 활동을 대가로 급여를 받아 생활한다. 내 활동에 내 생계가 달려있기에 활동가이면서 노동자다. 나는 지금 두 번째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첫 번째 직장을 떠나올 때의 상황과 마음은 이 전 글 《회의가 아니라면 어디서, 지금이 아니라면 대체 언제?》에 장황히 적어뒀다. 여느 활동가들이 활동을 쉬거나 그만두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내가 또 공익단체를 찾아들어오기를 망설인 이유와도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나는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 개인의 이익이나 영리기업의 이윤을 위한 것이 아니길 바라는 사람이다. 개인의 대단한 번영 보다는(그럴 수도 없거니와) 함께 조금씩 잘 사는 데에 내 노동이 일조하기를 바란다. 누구나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바라고, 그런 권리행동에 나의 지식과 노력이 쓰이길 바란다. 때문에 지금도 나는 상대적 약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열세로, 정보의 부족으로 권리 주장을 멈추지 않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결국은 또 활동의 영역에 제발로 찾아온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글렀다'고 표현하는데, 결국 나는 이런 일을 하는 어드메에 머물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인정한다. 물론 나는 그것을 바라고, 그런 나의 바람이 옳지 않다고 여긴 적은 없다. 하지만 현타가 오는 상황들이라는 게 있다. 나는 정말 이러려고 이 바닥을 떠나지 못하는 걸까, 하는. 오래도록 이 바닥에 있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도록 만드는 현실이 미치도록 버거워지는 때가 있다. 공익활동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고, 혼자서는 힘들기에 단체를 꾸리게 되고, 최소한의 운영비나 인건비가 소요된다. 새로 들어온 이 곳은 나의 활동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후원이나 정부 기금 등으로 내 급여를 충당하고, 그건 내 노동의 대가다. 많은 사람들의 선의와 공공의 기금이지만 마냥 시혜는 아니다. 그 좋은 마음들이 나의 쌀이고, 치약이고, 공과금이고, 휴대폰 요금이다. 단지 활동을 위해 필요한 활동비가 아니라, 내가 인간으로 존엄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임금'이다. 


활동가는 태생적으로 노동소외가 클 수 밖에 없는듯하다. 제삼자운동으로 전락하기도 쉽고, 일의 결실이 너무도 추상적이고 막연한 경우가 많다. 승리라는 것이 묘연한 활동들이 많은데다, 행여 승전 후에도 전리품은 그 누구의 것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그 작은 승리들이 종래엔 자신의 활동의 지향과 맞닿아있으리라 기대하며 버티지만, 그게 너무 멀고도 멀고 일종의 정신승리에 가깝다는 걸 깨닫기도 한다. 누군가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사회 전반의 이익과 닿아있다는 포장이 없다면 결국은 남의 투쟁이 된다. 나는 나의 삶을 바꾸기 위해 나를 둘러 싸고 있는 사회를 바꿔내려는 것인데, 내 삶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소외감이 드는 때가 있다. 때론 내 가치관에 맞지 않는 요구들을 해야하고, 사회 전반의 권리증진으로 끼워맞추기엔 역부족인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자신을 설득해가면서 싸워내야하고, 그 싸움의 끝에서 허탈감을 붙들고 괴리감에 빠지곤 한다. 


결국 현실에서 나는 남의 싸움하라고 채용한 사람들이고, 쓸모에 의해 쓰여진다. 적극적, 자발적, 헌신적으로 하라고 요구하긴 하지만 그 자신이 뭘 적극적으로, 뭘 자발적으로, 뭘 헌신적으로 하고 싶은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난 활동가의 활동이 당사자의 싸움이 되기 위해선 활동가 당사자들의 권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래저래 모두에게 좋은거지 뭐, 라는 마냥 좋은 얘기말고. 그 싸움의 승리를 함께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건 어떻게 하는건데? 하고 황망해할지 몰라 친절히 설명드리면, 그 조직이 왜 존재하는지를 물으면 된다. 인간다운 대접 받기 위해, 차별 받지 않기위해, 노동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싸우는 곳이라면 활동가의 삶도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조직이나 단체 회원들이 나아지는만큼 함께 나아져야하고, 존중받는만큼, 노동소외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갖게되는만큼 활동가들도 그런 부분의 개선이 있어야한다. 왜 활동가는 더 열심히 더 앞에서 싸우는데 그 결과를 향유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나? 왜 회원들의 결과는 단기적으로, 가시적으로 드러나야하고, 활동가들의 결과는 장기적으로, 비가시적으로 드러나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활동가와 회원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사고가 조직의 구성원인 활동가를 소진시키는 주된 동력이라 생각한다.

사진출처: 비마이너


결국 돌고돌아 요지는 하나다. 활동가도 노동자고, 하다못해 사람이다. 사람대접하면된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30년도 전부터 외쳤는데, 활동가에겐 기계처럼 일을 뽑아내도록 요구하는 것은 모순아닌가. 인간답게 살고싶다고 수십년전부터 외쳤는데, 활동가의 인간성을 헌신에 양보하길 바라는 건 역설이 아닌가. 활동가도 사람이라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조직이 지속하기 위해선 그 조직이 '사람'에 의해 굴러가고 있음을 항상 기억했으면 한다. 나는 정말 많은 단체와 조직들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활동하기를 바란다. 정말, 그래서 하는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