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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Dec 31. 2019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후기

#실격당한자들을위한변론

#김원영 #사계절



나는 비장애인으로(적어도 사회적으로 인정? 받을 만한 장애가 없다) 살아와서, 장애에 대한 이해폭이 상당히 낮다. 노력하지 않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나.

아는 것이 없으니 장애인을 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장애인'으로 뭉뚱그려 '기호화'해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쓰구이야마유리엔의 장애인들은 일본의 한 교수가 지적했듯이 그저 '기호화'되었다.14
14 리쓰메이칸 대학 생존학연구센터 나가세 오사무 특별초빙교수(장애학)는 '라이브도어'와의 인터뷰에서 "이름을 공표하지 않고 열아홉 명의 인간을 기호화해버리는 것은 '장애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용의자의 생각과 유사하지 않은가"라고 비판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피해자 개개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사회가 슬픔과 분노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장애인 살상 사건 후, 혼돈의 일본 사회', <비마이너http://beminor.com> 2016.8.5).  
<김원영, 실격 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p43>




이에 관하여 철학자 데릭 파핏Derek Parfit은 비동일성 문제Non-Identity Problem라는 이름으로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어떤 혜택을 주거나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할 때 모순된 상황에 봉착한다. 혜택을 주려는 행위,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시도는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영향을 받은 미래는 원래 혜택을 주거나 피해를 줄이려 했을 때 태어나게 될 아이들이 아닌 다른 아이들이 출생하는 원인의 일부가 된다. 유전자 진단기술을 통해 아이의 장애를 없애려는 행위는 원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려던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의 출생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원래 태어나려던 아이에게 혜택을 준다거나 피해를 입힌다는 말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Derek Parfit, Reasons and Persons, Oxford university Press, 1984, pp.351~377)?
<김원영, 실격 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p117>


출생과 동시에 손해로 여겨지는 존재.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그들이 느낄 좌절감... 임신중절수술이 불법인 우리나라에서 중증 장애가 의심되는 아이에 대해서는 허용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였다. 그 존재, 그 당사자에 대해선 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걸까. 부모도 야속하지만, 그 부모가 '손해'라 여길만큼 많은 금전적, 정서적 비용이 오롯하게 전가되고 있는 현실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들이 온전히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이동권이나 건강권 등이 제한되지 않도록 하는 일을 '비용'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단 한 사람도 배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 아닌가.


"너희가 버스를 못 타는 게 너희 잘못은 아니야." 
특정한 세계관은 내밀하고 조용히 세상에 퍼져가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권리의 언어로 결정結晶되어 사람들의 말에 담긴다. 말은 흐르고 흘러 눈앞에 등장하고, 몸에 감촉되는 '물질'이 된다.
<김원영, 실격 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p217>


좋습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30년동안 집구석에서 갇혀 지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주더니, 자신들이 당장 30분 늦으니까 저렇게 욕을 하는군요. 이제 그 병신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시다. 당당한 병신으로 살아봅시다.
<김원영, 실격 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장애인에 대한 권리를 얕으나마 옹호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편견과 시혜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도 같다.

아니, 어쩌면 보편적인 인권의 측면에서 접근하면서, 오히려 장애라는 특수성을 외면하고 수면 아래로 침잠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진 장애인권에 대한 언어는 장애혐오자들의 언어와 다르지 않았고, 가해자의 위치에 수도 없이 있어왔을 것이다. 


신체에 대한 혐오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진정한 부정이고, 그에 대한 무심함이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완전한 무시가 아닐까? 장애인이나 병에 걸린 사람들이 우리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며 성금을 보내고, 구세군에 거금ㅇ을 쾌척하면서도 막상 그 신체와 5분도 같이 앉아 밥을 먹지 못하고, 그 신체가 버스에 올라타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 신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를 짓는 일에 반대한다면 그 자체로 혐오이며 다른 해명이 필요하지 않다. 근육병과 골형성부전증에 따라 붙는 거창하고 낭만적인 운명 '서사시'에 매혹되어 종교적 감수성을 느낀다고 한들 이는 그 존재에 대한 사랑과는 관련이 없다. 몸을 욕망해야 한다.
<김원영, 실격 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엄마가 몸이 불편해지면서 내가 얼마나 장애혐오적이었는지, 차별적인 사람인지 크게 깨달았다. 엄마는 몸의 기능이 저하될지언정 여전히 자기 삶의 주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가족들은 엄마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엄마를 객체화 하곤 한다. 과도하게 엄마에게 집중하고, 원치 않는 도움을 건네려한다. 주변 사람들의 안쓰럽다는 표정과 관심은 곁에 있는 나조차도 불편하게 한다. 이젠 그러지 말아야겠다. 배려하되 간섭하지 않으면서 선을 지키도록 노력해야겠다.


비장애인으로 살아온 내게 장애에 대해 더 격렬히 고민하도록, 무지를 일깨워준 책이다.

너무도 편하게 간과하고 있는 장애인권의 영역을 어설프게나마 상기하며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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