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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Dec 27. 2019

문제는 '장애'가 아닌 장애라는 말을 사용하는 의도였다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 후기 1

최근 한겨레에서 올해의 책 20권을 뽑았다.

국내서 10권, 번역서 10권.

#창비 에서 출판된 #김지혜 씨의 『선량한 차별주의자』 도 그 중 한권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22261.html?fbclid=IwAR0JRWGGzhbUrsYrUhQsuVM3gN8QWSATr1XspXv5nOeZCte-YQoJyik7_f4#csidxbeefa13cdddff158ac3beecc51e9871


내가 꼽는 올 해의 책도 단연 이 책이다. 물론 그 외에도 훌륭한 책들이 많았지만, 이 책만큼 뒷통수를 때려 맞은(?) 책도 없다. 책의 서술이 너무 명료하고 따뜻해서 '어떻게 이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지?!' 싶은 마음에 공익법재단 공감에서 진행하는 북콘서트에도 다녀왔다. 거기서만난, 저자로서가 아닌 인간 김지혜란 사람도 역시나 낙관적이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렇게까지 저자와 책이 일관되기가 어려운데... 이 사람을 빼다박은 것인지 사람이 책을 빼다박은 것인지. 아무튼 좋은 책과 사람이었다.


이 책은 다문화학을 가르치는 저자가 뱉어버린 차별의 말에서 시작한다.저자는 자신은 차별하지 않는다고, 적어도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고 실제로 평균의 사람들보단 덜 차별한다고 생각했다. 오랜기간 인권과 관련한 활동을 해왔고, 가족중에도 중증 장애를 가진 가족이 있다. 그런 자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차별의 말이 나왔고, 누군가의 지적으로 알게 된다. 이 책은 자신의 말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은 저자가 스스로를 돌이켜보며 쓴 책이다.



"결정장애"


사실 나는 이 말이 왜 차별적인 말인지, 책 한 권을 다 읽도록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도 흔히 쓰는 말이고, 오히려 장애라는 말이 흔히 쓰일수록 장벽을 낮춰 좋은 것이 아닌가 했다. 북콘서트에 가서야 그 말이 왜 문제인지를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장애'가 아닌 장애라는 말을 사용하는 의도였다.

우리나라에서 장애라는 말은 결핍, 고난의 의미로 쓰여진다. '장애물'이라는 표현만 봐도 명확하다. 장애라는 것은 정상이 아닌 것, 그러니 없어져야 할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장애는 다름일 뿐이다. 사람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신체의 기능이 다른 사람과 다를 수 있다. 누구는 시력이 2.0인데 내가 0.5라면, 내가 비정상이고 누군가가 정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시력이 다른 것이다. 너의 시력은 틀렸어,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린 장애인의 장애를 기능의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보고 있다. 

결정장애라는 말이 잘못된 것은, 결정을 '하지 못함'의 의미로 장애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이다. 남들과 달리 결정을 잘한다고해서 장애라는 말을 쓰진 않는다. 부족할때 우린 장애라는 말을 붙인다. 이미 장애라는 말에 우리가 덧입힌 선입견으로 인해, 결정장애라는 말이 차별의 언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디 '결정장애' 뿐이랴. 



"매킨토시는 백인으로서 자신이 누리는 일상적 특권들을 수집했고, 백인특권white privilege의 46가지 예시를 담은 글을 발표했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음식을 입에 넣고 말한다고 사람들이 내 피부색을 가지고 비웃지는 않을 것이다.


(…) 예를 들어 남성특권 목록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되었다.

·나는 밤에 공공장소에서 혼자 걷는 걸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운전을 부주의하게 한다고해서 나의 성별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많은 사람과 성관계를 한다고 해서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유럽에 가서 어색한 발음으로 영어를 하면 대놓고 비웃음을 당한다. 심지어 영어를 잘하더라도(내 얘기는 아니지만), 음식 취향에 대해서도 비웃음을 당한다. 그건 동양인을 향한 조롱이다. 내가 백인이라면 그렇게 안했을 지 모른다. 


나는 대낮에도 좁은 골목에서 까만 모자를 푹 눌러쓴 남성과 마주치면 흠칫한다. 늦은 밤 택시를 타면 전화하는 척을 하기도 한다. 폐쇄된 남녀 공용화장실은 사용을 자제한다. 생리나 성관계 경험을 숨기고, 관련한 발언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남자였어도 이랬을지, 잘 모르겠다.


나는 백인도, 남성도 아니라서 백인/남성특권은 없지만 비장애인, 이성애자, 비채식주의자의 특권이 있다. SNS에 내 연애/결혼 생활을 공개하는데 아무런 두려움이 없고(뭐 이별 후에 대한 각오정도야 있을 수 있지만, 이성애자의 이별은 그리 유난한 것도 아니지 않나), 내 전신 사진을 올리는 것도 거리낌이 없다. 엘레베이터가 없는 건물도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어느 식당이나 가리지 않고 들어가서 맘껏 먹을 수 있다. 나는 그런 삶에 익숙해서, 장애인/동성애자/채식주의자와 함께할땐 내 기준에서 장소를 고르고, 말을 고른다. 마치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성애인양, 육식을 하는양, 비장애인인양 말할 수 있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는 "몰랐다"고 두루뭉술 넘어갈 수 있다. 


저자는 차별은 언제나 발생하고, 너무 많이 발생해서, 누구나 차별을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러고 있다고 얘기한다. 물론 저자인 자신을 포함해서. 그러니 내가 무슨 수로 차별하지 않고 살아가겠는가. 남성이 여성을, 여성 이성애자가 남성 동성애자를, 남성 동성애 비장애인이 여성 장애인을 ... 차별의 고리는 마치 은하계처럼 끝도 없이 이어진다.


'동성애자를 존중하지만 내 자식은 안 그랬으면 좋겠어'

'장애인도 공평하게 같은 조건에서 시험을 봐야해'


아무 문제 없이 들린다면 당신도 차별주의자다.

내 자식은 안 그랬으면 하는 사람의 시선으론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같게 보일리 없다.

장애의 유무와 관계 없이 들이미는 기계적 평등(시각장애인에게 지필 시험을 보라고 하는 것처럼) 위에서 장애인은 얼마나 더 노오력해야할까.


"차별에 관한 책을 한권 마치는 이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차별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나를 둘러싼 세상을 자각하고 나 자신을 성찰하며 평등을 찾아가는 이 과정이 나는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헛된 믿음보다 훨씬 값지다는 것은 분명하다. "


차별에 관해 책 한 권 쓸만큼의 고민을 했을 리 없는 내가,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정도의 선한 마음과 얕은 고민만으론 절대 차별하지 않는 삶이 될 수 없다. 난 여전히 차별하며 살아갈 것이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나는 끊임없이 나의 잘못을 경계하고 주의하려 한다. 좀 더 알고, 좀 더 조심해야지. 


앞으로 #차별 에 대해 생각할 때 이 책을 두고두고 펼쳐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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