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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Dec 24. 2019

나는 시댁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일상 속에 자리잡은 권력관계에 맞서는 포부

결혼을 하고나니,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엄마가 사는 집을 얘기할 땐 무슨 말을 써야하나 난감하다. 

친정이라는 말은 왠지 입에 붙지 않고, 본가라고 말하려니 자취할때와 구분이 안된다.

우리집은 맞는데, 우리집이라고 하면 현재 꾸리고 있는 가정과 혼동된다. 

엄마집이라고 하자니 부친과 동생들도 살고 있고, (지역명)집이라고 하자니 두 집 살림 같고.


근데 남편의 부모가 사는 집은 너무 명확하다. 

시댁

물론 남편이 우리집을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시부모의 일을 먼저 챙기는 일들이 어쩔 수 없이 꽤나 빈번하지만, 

남편은 내가 제안하면 거기에 응하는 것으로 넘치는 책임을 다 하고 있으니까.

아주 간혹 부를 땐 어머님댁이나 (지역명)집이나, 너네집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왜이렇게 시댁을 말할 일이 많을까.

남편에게 말할 땐 자기네집으로 얘기하고, 제3자와 이야기할땐 시댁이라고 얘기한다.

남편은 뭐라고 할까. 

혹여 엄마집에 갈일이 있다면, 처가에 간다고 말하겠지.

시댁은 왜 댁이고, 처가는 왜 가일까.

시부모는 왜 시부모님이고, 우리 엄마아빠는 왜 장인장모일까.

그나마 남편은 우리 부모한테도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부른다.

어디가서 장인장모라고 하는 것까지야, 의사소통의 편의성을 위해 어쩔 수 없으니. 


왜 말이 이렇게 위계적으로 굳어진걸까.

시댁이 시댁이고, 처가가 처가인 이상 사위와 며느리의 위치가 다른 건 너무 자명한 일이다.

나는 이제 시부모를 시댁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뭐라고 할진 잘 모르겠다. 시가라는 말을 입에 붙이려 노력할 것이다. 

그나마도 입에 안 붙으면 시부모님댁 정도로 불러야하나.

그냥 서로 어머님아버님댁이라고 부르는 게 깔끔하지 않나, 모르겠다.


이미지 출처: 채널A 화면캡쳐본


제3자와 이야기할땐 여전히 난감하다.

난 시가라고 부르겠지만, 이 단어는 내게도-상대에게도 어색하다. 

부연설명이 필요한 말이지만, 차라리 불편하기로 한다.

나는 이제 세상이 절로 바뀌지 않는다는걸, 불편하지 않고 바꿀 수 없다는 걸 안다.

누군가 피터지게 싸우고 별난 인간으로 취급받고, 찌푸린 눈살을 감내해야 바뀌는 거란 걸 말이다.


심장이 머리에서 발까지 널을 뛰지만, 손이 부들부들 떨리지만, 행여 눈물이 나겠지만, 

두 눈 부릅뜨고 싸울 것이다.

세상 유별난 인간, 나야나하면서

누가 눈을 째리면, 네가 뭔데 날 그렇게 봐하고 들이 받으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 용납되지 않을 때까지 불편하게 살 것이다. 


별 것도 아닌 걸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을 수 있다.

그럼 왜 별 것도 아닌 걸 못 고치나.

생각보다 사람은 단순하고, 

사람이 언어를 만들었을지언정 언어가 사람을 지배한다.

언어는 사고를 정의하고, 생각보다 무섭게 사람의 사고체계를 지배한다.

말을 바꾸지 않고 생각을 바꿀만큼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면, 세상은 벌써 평등하고도 남았겠지.

하지만 우린 그리 대단한 사람들이 못되고, 말이라도 바꿔야 뒤늦게 생각이 좇아올 수 있다.


별 것 아니다.

너무 작은거다.

그 작고, 별 것 아닌 것부터 시작하자.

원래 세상은 어벤저스가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이, 조금씩 바꿔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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