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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Jan 28. 2020

슬픈 예감은 틀리지를 않고, 고통은 쉬이 지나지를 않고

좋은 며느리 말고, 좋은 가족이 되고 싶었다 2

올해는 설이 1월에 있다. 그리고 격주 간격으로 시부모의 생일이 있다. 유난히 길고, 갑갑하고, 끔찍한 달이다.

12월 중순이던가 말이던가. 잠을 못자고 밥이 잘 안 넘어가는 시기가 또 찾아왔다. 연말이라 중요한 일들이 대부분 마무리 됐고, 연말 휴가까지 생겼다. 그럼에도 내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이번엔 안 자고 왔으면 좋겠어."

시어머니 생일에 시가에서 안 자고 오겠다는 선포. 대중교통으로 한시간 반 거리인데도 매번 그집에 가면 자고오는게 불문율이었다. 

"그래. 그럼 엄마한테 점심만 먹고 오겠다고 말할게."

남편과 시어머니의 통화. 바쁜 며느리를 감안해서 시부모가 직접 오시겠단다.

자차로 왕복 2시간거리.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인데, 안 자겠다고 선포한 게 괜히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그럼 전날 오셔서 주무시고 가시라고 해."

"알겠어. 얘기해볼게." 

당연히 시부모는 좋다고 하신다. 나는 왜 아직도 착한 며느리 행세를 하고 싶은건지. 남편은 왜 또 눈치가 없는지. 그래, 이번까지만.. 또 주문을 외웠다.

늦게 오시는 시부모 시간에 맞춰 늦은 저녁상을 차려놓고, 다음날 내가 찾아놓은 맛집으로 만족스럽게 식사를 했다. 그러고는 커피를 마시고, 함께 장을 보고서야 시부모는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전 시아버지가 설이 지난 직후 주말에 가족여행을 가겠다며, 시간이 되면 같이 가자신다. 그거까지가면 연속3주다. 아무말도 안했다. 남편도 말이 없다. 그런 여행을 같이 가자고 하려면 생일이라도 합쳐서 하든지. 설이라도 오지말라든지. 5주 중에 4주를 꼭 같이 보내야 직성이 풀릴까. 내가 이렇게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하는데도? 나에 대한 배려보단 본인들에 대한 대우가 더 중요한 사람들. 이걸 애정이라고 포장하는 게 마뜩찮다. 시부모가 가고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대에 쓰러지다시피했다. 고생했다는 말 한 마디 없는 남편. 이걸 결코 고생이라고 생각지 않는 사람.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나중에 한 소리 안 듣겠지.


2주 뒤 주말, 시아버지의 생일이다. 이번엔 우리가 갔다. 설날을 한 주 앞두고, 거의 주말마다 쉬지도 못하고, 격주 간격으로 시부모를 만나니 컨디션이 최악이다. 토요일 저녁시간에 맞춰 갔다. 시아버지가 술은 뭘로 마실거냐고 묻는다. 요즘 속이 좋지 않아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 시아버지의 서운한 기색. 시아버지는 평소 내가 빈 잔을 채워주는 걸 즐기신다. 어느 순간 술시중이 마뜩찮아 남편에게 시켰더니 서운해하신다. 게다가 오늘은 술도 안 마시겠다니 더 서운하신모양. 시어머니는 어쩐지 아파보이더란다. 그래, 말을 하니 알아주시는구나. 알아주니 고맙네. 밤 9시 40분. 밥 먹고 케이크 먹고 잠깐 남편과 앉아 쉬고 있었다. 시어머니 왈.

"너흰 우리랑 놀아줘야지 너희끼리 게임하면 되니?"

"그럼 고스톱이라도 칠까요 어머니? 한 열시반까지해요 그럼~"

"아니 한시간은 해야지. 10시 40분까지하자."

10시 반을 넘기고, 10시 40분에 기어코 마지막 판을 돌리신다.

아파보인다더니, 당신 딸이 아팠어도 이랬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한시간을 넘겨서 고스톱을 치고 씻고 잤다. 

몇 시에 갈거냐는 말에 친정에 가야해서 점심 전에 갈거라고 했다. 데려다주시겠단다. 그러마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리는데 급하게 등뒤에 시아버지의 말이 꽂힌다.

"24일에 보자!"

설이면 설이지 왜 24일일까. 나중에 보니 24일은 설 전날이었다. 


추석 전날은 시할아버지 기일이라 제사차 저녁에 갔고, 설은 전날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시부모가 내려놓겠다는건 뭘 말한걸까. 시부모 생일도 1박2일로 매번 챙기고, 김장, 어버이날, 명절 전날, 당일 며느리 노릇 다 하고, 가족 여행에 기쁨조로 대동해주길(지난 연애기간 내내 요구되었던 것이다. '00이가 있어야 분위기가 살지~', '00이 없으면 재미 없어', '00아 재밌는 것 좀 해봐' 등등) 바라는데 대체 뭘 내려놓은걸까. 난 이런 상황이 너무 예상이 갔고, 그래서 남편이 자기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게 도저히 공감이 안됐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를 않고, 고통은 쉬이 지나지 않는다. 명절이 오기까지 일주일 동안 내내 숨이 막혔다. 그나마 반공기는 먹었는데 이제 정말 세숟갈만 먹어도 목울대에서 밥이 넘어가질 않는다. 


남편은 설 전날, 당일 아침에도 아무말이 없다. 알고보니 바빠서 못 간다고 했고, 거짓말 하기 싫다며 실제 출근을 했던 것이다. 남편이 제 부모한테 한 거짓말들을 나는 알고 있는데, 의사 앞에서 병명과 연관 있는 내용까지도 감췄던 걸 나는 알고 있는데, 왜 이런 문제만 거짓말을 못하는 청렴결백의 아이콘이 되어버릴까. 그래, 뭐, 이렇게라도 크게 부딪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려나. 야근을 마치고 큰집 근처의 텅 빈 친정집으로 함께 갔다. 가는 길에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고마워, 나때문이지?"

"꼭 그것만은 아니고. 일이 많기도 하고."

실제 남편은 일이 많았다. 뭐, 어쨌든 이렇게나마 노력해주니 고맙지. 


텅빈 집에 도착해서 함께 야식을 먹고 남편은 잠이 들었다. 새벽 한시 반. 최소 다섯시간 뒤면 일어나서 씻고 남편의 큰집으로 가야한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는다. 내일 가서 또 무슨 소릴 들어야 하나. 날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내야하나. 쥐죽은듯이 있을까, 할말을 해야할까. 오만가지 걱정이 든다. 점점 시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커진다. 연애기간 쌓아왔던 애정은 이미 다 무너져서 아슬아슬한 모래성으로 남은 상태다. 회복할 수 있을까. 


여섯시가 조금 넘어 눈을 떴다. 씻고 옷을 챙겨입고 나가서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를 타고 남편의 큰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나는 깍지를 낀 모양으로 손을 꽉 잡았고, 남편은 펼쳐진 상태 그대로다. 이게 우리의 상황 같았다. 나는 남편이 간절하고, 그집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곤 남편 하나다. 하지만 남편은 아니다. 남편의 손은 맞잡은 손이 필요하지 않다. 버겁기만 하다. 내 존재는 부여잡고 싶은 게 아니라 놓아버리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간절한 건 나뿐이다. 


이제 큰 집 문 앞이다. 그냥 눈 한 번 질끈 감자. 빨리 해치우고 나와버리자. 그렇게 큰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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