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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Dec 16. 2019

시간 주권을 잃어버린 사람들

책 『일하지 않을 권리』리뷰


지금은 아침 여덟시입니다.

나올 때는 이미 어두워진 뒤일 겁니다.

태양은 오늘 당신을 위해 빛나지 않을 겁니다.



세상사람들이 다 읽었으면 좋겠다. 열심병에 걸려서 쉬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 제발 좀 읽었으면.  

주 100시간 일할 자유를 달라는 민경욱 의원도 꼭 읽어보길. 주 52시간도 많다고, 사람답게 살려면 근로시간을 줄여야한다고 수 많은 연구결과가 뒷받침하는데도 아랑곳 않는 당신의 신념이 나는 무섭다. 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평생 나 사는 집 한 칸, 빚 없이 가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한 달을 벌어서 겨우 생활비와 주택대출을 갚아가고 있고, 졸업한 지 2년이 지나도 학자금대출이 1500만원이나 남아있다. 평생 월급쟁이로 살면서 진 빚을 갚고, 또 갚고, 겨우 다 갚을 때 쯤 죽을 날이 오지 않을까 싶은 삶이다. 먹고 살려고 매일 직장에 나가야하는 노동자라서, 부족함 없이 살고 있을 당신이 내뱉는, 무려 금배지를 달고 내뱉는 그 말이 정말로 무섭다. 야근과 주말근무에 치이다보면 이러다 정말 죽겠다싶은 순간들을 겪는다. 업무상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 중에 과로사, 과로자살 비율이 40%를 육박한다. 너무 많이 일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사람을 살려달라곤 못할 망정 더 죽이자고 말하고 있다. 100시간 일하게 해달라는 요구가 일하다 죽게 해달라는 요구라는 걸 알지도 못하고, 평생 알 일도 없을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너무도 무섭다. 



일하고, 일하기 위해 회복하고, 번 돈을 쓰고, 고용 가능성을 키우라는 경제적 요구가 우리를 지배하면서 경제성을 뛰어넘는 가치 있는 활동에 쓸 삶의 영역을 얼마나 앗아가는지 탐험한다. 15p



“어쩌다가 ‘오, 이거 좋은데’ 싶은 물건을 발견하지만, 그게 없다고 못 사는 건 아니거든요. 그걸 갖겠다고 내가 혐오하는 일을 하러 갈 만큼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아요.” -218p



오늘날, 힘든 하루를 보낸 후 집에 돌아온 부유한 노동자는 무언가 하라고 요구하는 물건들에 포박 당한다. 내 경우에는 집에 가면 넷플릭스에 넘쳐나는 추천 시청목록과 CD가 가득 들어찬 선반, 어서 읽으라 신호를 보내는 충동구매한 책 더미, 상하기 전에 해먹어야 할 요리 재료로 가득한 냉장고와 마주한다. 덜 바쁜 시기에는 이런 것이 커다란 즐거움을 주지만, 너무 바쁜 시기에는 좌절만 안겨줄 뿐이다.



(…) 거지 같은 기분으로 퇴근해 포장 음식을 사는 거예요. 너무 피곤해서 요리할 기운이 없거든요. 그런데 포장 음식을 사는 데 드는 15파운드를 마련하려면 또 돈을 벌어야 해요. 거대한 도돌이표죠.



다들 이렇게 사니까 아무 문제 없는 줄 알았다. ‘더 많이, 더 오래, 더 잘’ 하길 바라는 세상이라, 좀만 덜, 그렇지만 잘하고 싶었다. 주5일내지 7일을 일하는 동안엔 퇴근을 해도 일이 놓아지지 않았다. 못다한 일들이 머리를 헤집고 다니고, 책을 읽고 sns를 하다가도 일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스크랩하고, 그러면서 하릴없이 시간을 축낸게 아니라고 자기위안을 하곤 했다. 일하지 않는 시간은 일을 하기 위한 재충전과 준비 시간일뿐, 제대로된 여가를 즐길만큼 충분하진 않았다. 심지어 꽤 긴시간 여행을 한다해도 “그래, 이러려고 일하는거지”했을뿐이다. 최대한 짧은 시간 높은 효용을 뽑아내기위해 소비를 했고, 소비를 위한 노동을 해야했으며, 노동을 위해 또 소비했다. 결국 일을 위해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가 일자리를 계속 더 많이 만들어야 할 만큼 일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가? 생산성이 극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도 여전히 모두가 평생 일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뭘까? 일은 과연 무엇인가? 만약 더 이상 평생 일하며 살라는 강요를 당하지 않는다면 그밖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회가 저마다 성공을 측정할 방법을 갖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부유한 나라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일을 통하는 것이다. 낯선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는 주로 ...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 질문이 ‘어떤 직업을 갖고 계셔요?’를 뜻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직업을 사회적 지위를 판단하는 잣대로 취급하는 경향은 별로 달갑지 않은 직업을 미화할 때 자주 쓰는 현대의 어설픈 완곡어법에서 드러난다. 청소부는 ‘폐기물 및 위생 관리’ 작업을 하고, 튀김 담당 요리사는 ‘조리부의 일원’이며, 실업자는 ‘구직자’로 부르는 식이다. 이 기이한 현대적 어법을 일별하면서, 터클은 이런 용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꼭 자기가 하는 일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직업으로 지위를 측정하려들며 자기를 희귀종으로 바라보는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정당하게 방어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 27p



이모젠 타일러Imogen Tyler는 비노동자를 망신주려는 이런 시도를 ‘빈곤 문화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정부는 대량 실업과 사회 불평등 심화라는 구조적 현실을 외면하며, 빈곤과 비노동 상태를 문화적 행위 문제로 덮어씌우려는 노력을 지속한다. 계급에 따른 사회적 차이가 줄고 있다는 논의를 바탕으로 실업을 일으키는 구조적 요인에 대한 평가는 사라지고 빈곤은 가난한 사람이 감수해야 할 자기 관리 결과로 간주된다.



일에서 나의 가치를, 나의 쓸모를 찾으려고 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쓸모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았고, 무가치한 삶이 되어버리는 줄 알았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고, 일을 하여 사회에 기여하라는 주문만을 받았을 뿐이다. 결국 '일을 하는 나'가 '나'의 전부라고 여기며 살았던 것이다.




혼자 있을 때나 남들 앞에서나 스스로 즐기기로. 일이란 단지 고지서에 찍힌 비용을 지불하기 위한 것임을 인식하기로. 친구들이 힘의 원천임을 항상 기억하기로. 단순한 것을 즐기기로. 자연 속에서 소중한 시간을 보내기로. 대기업과 회사에 소모하는 시간을 줄이기로. 그 대신 좋은 것을 많이 만들기로. 순리를 벗어나기로. 아무리 사소한 수준이라도, 세계와 주위 사람을 변화시키기로......

- <게으름뱅이 연합Idlers’ Alliance 맹세 목록> 중 일부



그렇게 사교적인 사람들이 일터에서는 움츠러들고 억눌리는 기분을 느낀다는 게 이상해 보일 수 있다. 일이란 결국 사회성의 중요한 원천으로 취급될 때가 많다. (…) 내 생각에 그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던 대화란 서로 견해를 공유하고 자기 내면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경험이 풍부한 친구들과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뜻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면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는 환자의 의지와 무관한 독립적인 신체적 장애의 형태를 띠어야만 한다. 상사나 관리자에게 ‘더 이상 못하겠어요. 수면욕, 식욕, 성욕이 떨어지고 있어요. 이 이상 뭘 할 기력이 없어요. 휴가를 주세요’라고 말해서 통할 리는 없을 것이다. 요구가 통하려면, ‘더는 못 하겠어요’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일종의 불능으로서 신체적 어려움, 요컨대 병가에 해당하는 질병이라야 한다.

- 앙드레 고르, 《생태학과 정치Ecology as Politics》(1980)



자본주의가 할당하는 노동과 현대적 업무 방식이 갖는 소회적 특징 아래서, 교육을 통해 창조성과 다양성의 감각을 습득한 사람들은 이후 이를 발휘할 기회가 거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브루스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듯이, “대학을 나온 뒤에는 아무도 이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요”.



일은 내 삶에서 가장 고정적인 영역이었으므로, 일이 힘들어질수록 삶의 중심이었어야 할 것들을 포기하게됐다. 가족, 친구, 건강, 꿈 ... 일에 치인 스트레스를 가족에게 풀고, 나도 힘들고 너도 힘드니 같이 지쳐가고 소원해졌다. 일에 치여 여유를 잃고 좁은 마음에 갇혀 다른 이들을 대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돈이 되지 않고, 오히려 돈을 쓰게만 하니 불필요한 사치행위로만 느껴졌다. 사람관계도 점점 일 중심으로 변했다. 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와 거리를 두게됐다. 점점 그냥 돈이나 벌고 나를 위해서만 소비하면서 살면 편하겠다, 사람들이랑 연 다 끊고 살아버릴까? 하는 생각들을 하게됐다. 마음이 피폐해진건 1년에 한두번도 보기 힘든 친구나 가족이 아니라 일때문이었는데도, 난 친구나 가족을 포기하는 것만을 답이라 여겼다. 




경제적 생존이라는 것이 더 열심히 일하거나, 개인적 관심을 무시하거나, 더 멀리 출퇴근하거나, 잘 시간에 내일 회의를 준비하는 것을 뜻한다면, 이미 모두 다 그 일을 하고 있다.



냉소적인 직원은 자율적 행위자라는 정체성을 부여받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회사가 요구하는 규율을 계속 수행한다. 우리는 사회가 부여한 역할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면서도 여전히 그 역할을 수행하곤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역할을 내면화한 사람 보다 훨씬 더 잘해내는 경우가 많다.

- 플레밍, 스파이서(2003)



헤파이토스는 노동자가 헌신적인 마음가짐과 개인적 도의를 느끼게끔 장려하기 위해 설계한 ‘팀’이나 ‘가족’ 같은 조직 내부 용어를 통해 노동자가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다그쳤다. ‘팀’, ‘가족’ 같은 이상은 직장을 경제적 의무보다는 윤리적 의무를 지는 장으로 재규정하여, 노동자를 조직적 목표에 더욱 강하게 옭아맨다. 케이시는 헤파이토스에서 전형적인 노동자는 ‘의심할 바 없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 회사와 생산품에 헌신적이며 사명감과 충성심을 지닌 사람, 회사를 위해 또 자신과 팀을 위해 기꺼이 고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내 삶이 일을 중심에 두고 굴러간다는건 조금만 주의깊게 들여다봐도 알수있었지만,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남들이 다 그렇게사니까, 이렇게 일에 치어 사는게 당연한거라고만 생각했다. 오히려 일만이 사람의 존재가치를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일하지 않는, 직업적 인정을 높이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 이들을 ‘한심하게’ 보기도 했다.




반복되는 힘겨운 일상을 감내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모든 이에게 ‘일’이 갖는 일련의 이미지는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경우에 일은 기쁨을 느낄 원천이나 자기표현 방식이 아니라, 하루 중 큰 부분을 뚝 떼어내버린 빈 공간으로서, 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드디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의 오후 다섯 시가 올 때까지 반드시 견뎌내야만 하는 과정이다.



[일하는 괴로움]

그 공간이 싫고, 그것이 상징하는 모든 것이 경멸스러웠지만, 일자리를 찾으려 몸부림치며 잠재적 고용인에게 열정적이고 순응적이며 융통성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경제적 진공 상태로 ‘자유롭게’ 풀려나는 것 또한 두려웠다. 나는 아침이면 아직 일자리가 있다는 안도감과 밤새 그 공간이 날아가 버리지 않았다는 실망감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대형마트 앞에 도착하곤 했다. -이보르 사우스우드Ivor Southwood, 《끝없는 무기력Non-Stop Inertia》(2011)



자본주의는 결국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필요를 생산하기 위한 체계인 것이다. 시장이 언제나 맞닥뜨리는 도전은 소비자가 계속해서 바라고 갈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예견했듯, 독점자본주의는 시장에 내놓는 물건을 소비할 주체를 만들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필요에 맞춘 공급이 아니라 공급에 맞춘 필요다.” 허니컷은 사업 목표란 반드시 ‘불만족을 조직적으로 창조’하는 것이라야 한다고 말한 제너럴 모터스 연구소장 찰스 케터링Charlse Kettering을 인용한다.


삼십년을 굳혀온 견고한 생각에 균열을 내준 책이다. 일이 나를 대변한다는 건 환상이다. 나는 나로 존재해야한다. 왜 일때문에 많은 걸 포기하나, 일을 하라고 부추기기 위해 더 많은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에 대해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나? 뼈때리는책. 우연히 집어들었지만, 『일하지 않을 권리』는 정말정말 유익한 책이다! #일하지않아도괜찮아




이 관점에서 스트레스, 불안, 우울 등은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일 중심 사회와 그에 뒤따르는 불안과 소외, 그리고 몸이 생장하고 회복할 능력을 넘어서는 생활 속도 강요가 일으키는 심각한 폐단의 징후다. 이 현대적 질병을 전문가가 진단하고 의학적으로 치료해야만 하는 개인적 병리현상으로 보는 대신에, 일 중심 사회가 가하는 압박이 사실상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몸의 한계뿐 아니라 지구라는 행성의 한계가 사회 변화 필요성을 경고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단절점]

게으름뱅이로서 나는 맹세한다. 터무니없이 오랜 시간을, 특히 몇몇 기업 양아치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려 투쟁하기로. 가능한 한 스트레스가 나를 침범하지 못하게 막아내기로. 천천히 먹기로. 리얼 에일을 자주 마시기로. 더 많이 노래하기로. 더 많이 웃기로. 토하기 전에 정시 근무라는 회전목마에서 내려오기로.



최근의 경제적 위기가 우리에게 준 교훈이 있다면, 위기 그 자체는 진정한 사회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위험이 아무리 높아진들, 한 사회로서 우리가 대안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이상을 열린 마음으로 대하지 않는 한 긍정적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상향적 사고는 언제나 다른 방법이 있다고 주지시킨다. 사회 문제를 현재 체계 속에 끼워 맞출 터무니없는 방법만 찾아다닐 게 아니라, 위기로부터 새로운 요소를 조합하도록 유도한다.



제목이 자극적이긴 하지만 읽어보니 “경제적 종속관계에 매이지 않고 일할 권리”가 더 정확할 것 같다. 아프지도 다치지도 않고 일할 수 있게, 거지같은 회사면 언제든 때려치고 적성과 흥미를 탐색할 수 있게, 비인격적 모욕을 참아가며 일하지 않게, 나로부터 시작해서 사회의 안전망을 마련하고 구조를 바꿔가야한다는 것. 결국엔 소비를 줄여 노동을 줄이자~ 거나 기본소득 도입하자~ 로 끝날 줄 알았는데 결말도 생각보다 괜찮다. 일 안 하면 당장 죽을 것 같은 당신들 모두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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