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혁명의 러시아 1891~1991』을 읽고
나는 지금 나의 삶이, 내가 사는 이 세상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순덩어리에, 잔인하고, 불완전하다. 더 나은 세상이 분명 존재할거라 생각한다. 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해 발판을 다지는 중이리라. 그럼 더 나은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사람들의 이기심과 본성적 게으름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 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 혹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일까? 그럼 왜 소련은 망했을까? 역사상 최대의 공산주의 유토피아 실험이었던 소련을 들여다보게된 동기다.
자신들의 소비에트를 통해 농민들은 귀족의 토지와 사유재산을 나누었다. 그들은 자신의 고유한 평등주의적인 사회정의의 규범에 따라 그렇게 했고, 10월 26일에 '소비에트 회의'에서 통과된 토지에 관한 법령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중앙권력은 단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코뮌은 몰수한 경작지를 각 가구의 '먹는 입'의 수에 따라서 할당했다.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지주 역시 만일 자신의 노동력으로 경작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 통상적으로 한 조각의 텃밭을 분배받았다. 농민공동체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토지와 노동의 권리는 기본 인권으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생각했던 공산주의는 이런 모습이었다. 모두가 삶에 필요한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고, 토지나 건물, 생산시설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불로소득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기회와 과정의 공정이다. 원하는 사람에겐 노력의 기회가 주어지고, 노력에 따라 결과가 주어지는. 물론 노력만큼 생산할 수 없는 사람들(장애인이라든지)에 대한 배려는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부모를 잘 만났다는 게 인생을 좌지우지할만큼의 기회가 되어선 안된다.
생각보다 초기 소련의 농촌에선 공산주의가 잘 실현된듯하다. 토지와 노동의 권리를 인권으로 생각했다니. 이렇게나 훌륭한 발상을! 확실히 몸을 써서 직접 생산하고, 그 결과를 함께 향유하는 경우엔 공동체의식이 잘 자리잡는 것 같다. 우리나라도 품앗이나 두레처럼 농촌에 공동체적 관습이 오래도록 유지됐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공감이 간다. 하지만 그런 공동체의 모습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언제나 임박했지만 결코 도래하지는 않았다.
국가는 계획경제를 주도하고 집단농장체제를 강요하였고, 생산물의 상당수에 대한 통제권을 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농촌공동체는 '공산주의 국가'의 개입이 커질수록 망가져갔다. 생산성이 저하되고, 농가는 활력을 잃었다. 국가는 5개년 계획경제가 성공했다고 선전했지만 농촌은 더욱 피폐해졌다. 물론 공장도 마찬가지였다. 국가의 선전과 달리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신기루일 뿐이었다.
훗날 많은 사람들은 1930년대를 기억하면서 자신들이 현재보다는 미래를 위해서 살고 있다는, 그때 가졌던 느낌을 이야기했다.
기약 없는 내일을 위한 삶.. 왠지 낯설지는 않다. 30년대 소련 사람들은 그런 마음이었다. 기근과 질병, 공포정치라는 현실의 유일한 위안은 더 나은 미래뿐이었다. 여전히 신기루를 좇았다.
담당 무관은 소련의 거부를 설명하면서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스크바 정부는 소비에트 독일로 이르는 길이 히틀러를 통과한다고 확신하고 있소."
스탈린의 사고방식에서는 나치주의와 민주주의(사회주의적이건 자유주의적이건 간에) 간에 어떤 도덕적인 차이도 없었다. 그것들은 똑같이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었고, 서로 다투게 하여 모스크바 정부의 혁명적 목표를 성취하도록 할 수 있었다.
소련 몰락의 원인은 공산주의에 대한 지도부의 잘못된 판단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의문이드는 건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도부가 이렇게까지 편협적이고 폐쇄적이고, 마키아벨리즘적이어야 하는가다. 지도부의 그릇된 정치로 인해 몰락한 것인지, 체제 자체가 그릇된 정치의 원인이 되는건지.. 아직 의문이 남는다.
소련 사회의 일곱 가지 기적
1. 실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
2. 누구도 일하지 않는다. 하지만 경제게획은 실현되어 있다.
3. 경제계획은 실현되어 있다. 하지만 가게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4. 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지 줄이 늘어서 있다.
5. 어디를 가든지 줄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우리는 풍요의 문턱에 서 있다.
6. 우리는 풍요의 문턱에 서 있다. 하지만 모두가 불만족하고 있다.
7. 모두가 불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 '찬성!'이라고 투표한다.
소련 말기에 주고받았다는 농담이다. 소련사회의 병폐가 함축적으로 드러나있다.
소련의 몰락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몰락 직전 러시아는 석유수출로 GDP의 상당부분을 충당하며 경제성장을 이뤘는데, 유가의 급락으로 국가의 형편이 급격히 나빠진 것이다. 국민들은 더욱 가난해졌고, 국가에 대한 회의가 커졌다.
또한 스탈린의 죽음 이후 고르바초프(신임이 두텁지 못했다)가 집권하였는데, 고르바초프는 잃어버린 국민들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이라는 노선을 택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소련공산당의 재판에서 심판받아야 할 대상은 단지 혁명의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들뿐 아니라, 그런 범죄에 동조했던 국가 전체이기도 했다. 그 당시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가 표현했던 것처럼, "우리는 공산당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심판하고 있다".
스탈린이 저질렀던 대량학살, 무차별적인 정치범 수용 및 척결 등에 대해서 재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생산물들에 대한 통제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시장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했다. 이렇듯 개혁과 개방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도리어 몰락을 불러왔다. 개혁과 개방을 통해 국민들은 기존의 가치관과 다른 정보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정치범의 석방이 이루어지면서 반체제적인 학습도 곳곳에서 이뤄졌다. 또한 외신을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외국에서 보는 소련의 모습도 직면하게 되었다.
또한 동유럽에선 민주화운동이 거세졌고, 각 소련국가들은 국가주권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와 더불어 고르바초프는 소련연방 탈퇴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국민투표에서 연방에서 탈퇴하자는 의견이 2/3를 넘지 못해서 부결되었는데, 그에 따라 느슨한 연방체제를 위한 신연방조약이 추진됐다. 보수 강경파는 이를 막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시민들의 저항으로 실패했으나 고르바초프의 입지는 낮아졌다.
그와중에 발트3국이 독립을 선언했고, 점차 빠른 속도로 소련국가들이 연합에서 빠져나갔다. 그렇게 1991년 소련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 국기가 올라왔다.
세계의 한 축이었던 소련이 몰락한 원인을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찾을 수는 없다. 거대한 연합체제가 무너진게 하나의 단순한 원인때문이라면 그게 더 이상할지 모르겠다. 내내 체제의 종말은 예견된듯보였다. 사람때문이든, 체제 자체의 허술함이든. 인류 최대의 공산주의 실험은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시 같은 실험을 할 순 없을 것이다. 오류를 발견한 이상 모른채 다시 시작할 순 없는 법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역시 많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그게 체제 전복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고 있지만, 그건 더 나은 대안을 아직 찾지 못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이 인류의 최선일까. 더 나은 세상의 모습은 없는걸까. 진보를 꿈꾸는 한 사람으로서, 고민이 더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