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하고 싶은 말 하는 거 쉽진 않아요
"이건 불공평하잖아. 그걸 왜 참고있어?"
"좋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렇게 시키지도 않은 일 열심히 하시면 다른 사람들이 점점 더 힘들어져요."
"내가 하기 싫은 걸 왜 하면서 살아야돼요? 그건 제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일이에요."
"꼭 퇴근 시간 이후에 연락해야 했어요?"
"전 자기 권리에 무뎌진 사람들이 말하는 변혁이든 혁명이든 변화든 운동이든 그런거 믿지 않아요."
"아니요, 그건 제 권리에요. 그걸 침해하려면 통보가 아니라 양해가 필요한거죠."
"나이를 어디로 처먹고, 그 나이에 예절도 모르는 게 자랑이야?"
"그게 차별이고 혐오잖아요."
아니요, 싫어요, 등등..
사람들이 종종 나에게 말한다, 너는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아서 좋겠다고. 사실 난 하나도 안 편하다. 오히려 사람들이 듣기 싫은 말 억지로 하는 게, 하기 싫은 거 참고 억지로 하는 것보다 10배는 힘든 것 같다. 나는 내가 뱉는 말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나를 미워하게 할 말이라는 걸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또 정확히, 나는 누군가에게 미움 받는 걸 못 견뎌하는 사람이다. 이렇게나 정확하게 알고도 그걸 하는 일은 결코 좋지도, 편하지도 않다.
나는 사람들에게 (표면적으로나마) 예쁨 받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던(는) 사람이다. 억지로 웃고, 억지로 분위기를 띄우고, 억지로 목소리 톤을 높이고, 적당히 구슬리고. 그게 나는 정말 잘 맞았고, 사람들이 그런 나를 좋아하는 게 좋았다. 그런데, 도저히 그게 되지 않는 순간이 왔다. 머리가 띵하는 그런 경험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 축적되는 모든 것들로 인해서. 이렇게 강압적이고 무례한 사람에게도 친절해야하나. 왜 나는 웃지 않으면 안돼? 남들이 원하는 표정과 말투와 행동으로 살아가는 걸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거 잠깐 맞춰주는 게 그렇게 힘드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자. 물리적 폭력의 피해자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나?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학교폭력 피해자에게 "그거 잠깐 맞아주는 게 힘드니?"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건 누구에게도 동의되지 않는 말이고, 설령 본인이 동의한다해도 그 피해자에겐 무례한 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왜 나에겐 그런 폭력적인 상황을 다들 참으라고 하는 걸까. 심지어 잠깐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그 순간 짓밟힌 마음은 결코 '잠깐'만에 회복되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를 멋대로 재단하고, 그 회복에 필요한 시간도 알아서들 정한다. 내 마음은 아직 지나오지 못했는데, 그 "잠깐"을 "아직도" 힘들어하냐며 타박하듯 묻는다. 애초에 내 마음이 괜찮은 건 관심이 없는거지. 그저 내가 유별나게 구는 행동이 멈춰지는 게 중요한거다.
가끔은 나도 남들한테 미움 안 받고 적당히 맞춰주며 살아볼까도 생각한다. 지난 설처럼, 아니, 거의 매일. 매일 나는 미움 받기 싫은 나와 그래도 아닌 건 아닌 나 사이에서 갈등하고 투쟁한다. 실은 '미움 받기 싫은 나'를 설득하지 못한 채로 '그래도 아닌 건 아닌 나'가 혼자 저질러버리는 거다. 말을 하기 전부터 이게 그 사람의 심기를 얼마나 건드릴지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극적인 어휘를 고치지 않고 내뱉기 위해서 열 번도 넘게 시뮬레이션을 한다. 좀 돌려서 표현해볼까. 그런 생각도 수없이 하지만, 그건 내 기분을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그 사람에게 거부감을 덜 주려고 말을 고치다보면, 그건 그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게 되어버린다는걸 지난 수년간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다. 좋게 말하면 정말 좋은 줄 아는 게 무례한 사람들의 공통점이니까. 그 말을, 내가 생각한 그대로 내뱉기 위해서 나는 심호흡을 열 번도 넘게 해야하고, 심장이 곤두박질치고, 말하고 나서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로 긴장을 한다. 그런데도, 꼭, 그 말을, 힘들어도, 하는 거다. 남편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오늘도 '미움 받기 싫은 나'는 내 삶에 타협이 필요한 건 아닐까 고민했다. 그러다 빨간머리앤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떤 미래가 기다리든 난 현재 상황의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계속 도발할거야."
그러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저절로 바뀔 거란 기대는 이대로 유지해달라는 주문 만큼이나 안일하고 나쁘다. 나는 계속 지금이 좋다는 사람들을 '도발'할 것이고, 그게 모두에게 나아지는 길이라고 믿는다. 나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말에 이미 내 행복은 안중에도 없다. 이런 삶은 분명 힘들고 고단하지만, 남들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조금 덜 힘들게 사느니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행복하기 위해 더 힘들고 사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계산이다. 그리고 당신도 그러기를 바란다. 이건 분명 힘들지만, 정답과는 좀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이런 모난돌이 많아지면 분명 모두가 조금씩 덜 힘들어질 것이라는 약을 팔아본다. (급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