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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표류기 03화

그들 중 하나

몽골-2

by 외노자O

별과 함께 잠들고 이제 이튿날이 밝았다.

알람 없는 아침은 벌써 해가 중천이었다.

어제 백화점에서 사 온 샐러드와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내며 하루를 시작한다.

여전히 변함없는 윈도우 배경화면과 같은 풍경을 보며 가벼운 식사 후 한국에서 가져온 드립백을 내려 마시며 여유를 즐긴다. 시간을 항상 쪼개서 써야 하는 일상에서 이런 느긋함은 길티플래져와 같았다.

마치 옳지 않은 행동을 하며 얻는 이 배덕감 같은 감정은 나를 초조하게, 기분 좋게 만들었다.

정오가 느긋하게 지나고 오늘은 이 감정이 지속되길 바랐다.

소파에 누워 한국에서 가져온 책을 펼치고 음악과 함께 느긋하게 책을 음미한다.

비현실적인 이 상황은 이질적이었으나 양질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게으른 둘째 날을 마무리하고 셋째 날이 밝는다.


오늘은 뭐라도 할 계획이다.

샐러드와 맥주도 좋지만 연속동일한 식사는 금세 물린다.

아침에 간단히 커피를 내려마시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언덕길을 터벅터벅 내려간다.

15분 정도 걸어갔을까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버스를 기다리는 30분 동안 내 앞에서 2번의 버스가 아닌 차량의 정차가 이뤄졌다.

한 번은 택시가 필요한지 묻기 위한 정차였고 한 번은 도시까지 데려다주겠다는 호의였다.

감사했지만 버스를 꼭 타보고 싶었기에 정중히 거절 후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비는 저렴했으며 한국 버스와 매우 흡사한 구조였다.

허허벌판을 가로지르는 버스는 한국의 읍내에서 버스를 타는 느낌이어서 왠지 친근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나와 시내에 도착했다.

매운 게 먹고 싶어 근처 라멘집을 찾아가 식사를 하고 시내 중심부로 이동했다.

짬뽕이 먹고 싶었는데...




걷다 쉬다를 반복하다 보니 금세 더위를 느꼈고 버스로 이동계획을 다시 세웠다.

한국의 T머니가 있다면 몽골은 U머니가 있다. U는 아마 울란바토르의 앞 글자에서 따오지 않았나 예상된다.

버스정류장 근처의 간이 마켓에서 충전은 되지만 카드 판매는 일부 가게에서만 취급된다.

U-Money라는 스티커를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작은 단위의 지폐를 챙기기 번거로워 교통카드를 구매 후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U-money


도심 중앙으로 오니 광장이 보인다.

눈앞에 보이는 수흐바타르 광장은 관광객과 현지인 그리고 수학여행을 온 것처럼 보이는 학급단위의 어린 학생들로 북적였다.

생기 가득한 이 광장 중앙의 동상이 눈에 띈다.

광장 중앙의 저 동상의 주인공은 수흐바타르이며 광장이름은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수흐바타르'라는 위인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이 자리에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렇게 광장 인파에 섞여 차분히 광장을 둘러보고는 근처 캐시미어 의류점에 들러 가족들 선물을 구매했다.

손에 점점 짐이 많아진다.

짧은 도시 나들이는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가벼운 스낵과 라면 그리고 보드카를 추가로 구매 후 숙소로 복귀했다.

느긋하게 쉬니 다시금 밤이 되었고 이제는 당연하게 나타나는 별들에 다시금 마음이 설렌다.

찾아온 별들을 빈손으로 맞이하기가 좀 뭣 해서 오늘 사온 보드카를 챙겨나간다.

제법 쌀쌀한 밤공기와 보드카는 서로 잘 맞는 친구인 듯하다. 별을 올려다보며 한 모금씩.

이렇게 하루에 마침표가 찍힌다.


수흐바타르 광장


광장 옆 캐시미어 집

넷째 날도 둘째 날과 같은 전처를 밟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책을 읽다가 배가 고프면 샐러드와 과일을 먹고, 입이 심심하면 스낵과 맥주를 마시다 저녁에는 컵라면에 보드카를 곁들이며 별을 보는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다섯째 날 집 밖을 다시 나선다.

일출이 빠른 건지 이른 아침 열린 커튼틈 사이로 햇빛이 쏟아진다. 침실을 나와 시원한 게 당겨서 맥주캔을 따려는데 문뜩 한국에서 먹던 그 시원한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얼음 없이는 드립백으로 차가운 커피를 마실 수 없다. 대충 나갈 준비를 한다.

작은 가방에 책을 욱여넣고 u-money카드를 챙겨 다시 시골길을 나선다.

가는 길은 포장이랄 게 없다. 그냥 흙으로 된 비탈길

허나 터벅터벅 내려가는 이 길에는 여러 가지가 보인다.

완만한 언덕에 푸른 초목들 그 뒤에는 드문드문 세워진 몇 가구의 집들. 하찮은 목표를 가지고 걸어가는 이 길이 출사표 같기도 다른 세계를 탐험하는 탐험가 같은 기분이 든다.


버스를 타고 다시 한 시간을 이동해 번화가에 내려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가 핸드드립을 주문하고 구석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친다. 느긋하지만 또다시 느긋한 시간을 마주한다.


가게이름이 박힌 원두와 드립백을 파는 카페답게 커피는 맛있었고 분위기도 좋았다.

그렇게 커피에 대한 욕구가 해소되고 몸에 카페인이 들어오자 도시를 돌아다녀보고 싶었다. 특정 장소를 정하고 무작정 걸어가 보며 도시의 배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본다.

걷는 길에 보이는 한국 편의점과 한국 화장품가게 그리고 이마트는 실소를 터트리게 했지만 모든 게 즐거웠다.

지나가는 길 수흐바타르 광장에 들러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하나 구매하였고 이 도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를 원했다.

이 도시에 거주하는 그들 중 하나처럼.


한국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아닙니다;;

뒤이어

시내버스를 타고 궁전박물관(복드칸)에 들렀다.

이 땅의 오랜 역사 담겨있는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이 박물관에는 관람객이 나 혼자 뿐이었다. 이 유물들과 독대를 하며 이곳에 다시금 녹아들기로 한다.

금으로 되어있는 유물들을 보며 비싸겠지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하고 초상화들을 보며 괜히 눈싸움도 해본다.

천천히 그리고 빤히 보다가 잠시 바람을 쐬고 싶으면 건물을 나가 정자 근처에 걸터앉아 바람을 쑀다.

이 중압감과 고즈넉한 게 공존하는 분위기가 좋았다.

종종 혼자 떠났던 강릉여행. 오죽헌에 가서 대죽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느끼는 자연의 그 무언가와 비슷하다.

그렇게 하염없이 작품과 정자사이를 오가며 앉아 있다 보니 일순간 우르르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한국인 관광객들과 함께 가이드가 설명해 주는 얘기들이 점점 가까워지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건물 내부 사진이 없네요..




아마도 몽골이라는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아서 한국어를 피해 달아난 것 같다.

뒤이어서 몽골 현지의 느낌을 더 받아보고 싶어 전통 시장에 갔다. 가는 길 쉽지 않았지만 도착하고 나니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시장에 갔던 느낌이다. 이제는 눈높이가 달라져있지만 그럼에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 나고 자랐던 향수를 불러온다.

의류를 비롯해 가품 액세서리를 파는 점포들을 시작으로 포목점, 농사용품점, 게다가 러시아제 망원경을 파는 점포들도 보인다. 둘러보니 의류를 취급하는 점포가 많았으며 안으로 더 들어가면 몽골 전통의상과 가죽제품 점포가 보인다. 마침 우중충한 날씨에 조금 쌀쌀해서 가죽재킷을 하나 구매하기로 한다.

베트남에서 단련된 흥정기술이 자연스레 나온다. 점포주인과 함께 나 또한 꺼내는 핸드폰 계산기. 권투 경기 시작 시 터치글러브를 하듯 그렇게 시작된 흥정공방은 재킷과 장갑 같이 구매해서 30% 가까이 깎았다.

그렇게 이 여행의 무드에 맞게 느긋하게 둘러보니 벌써 저녁식사 시간이다.



한국 재래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모처럼 느껴지는 북적거림과 도시느낌에 신이 났었는지 근처에 보이는 멕시코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했다.

캐주얼한 느낌의 펍. 퀘사디아와 타코 그리고 간단히 마실 것을 주문했다. 이름만으로도 실패하기 쉽지 않은 메뉴. 기계는 기능이 적을수록 고장이 나지 않는다. 요리도 들어가는 게 적을수록 실패하기가 어렵다.

(재료가 좋다는 전제하에)

역시나 여기도 예상이 되는 그런 맛을 보여준다. 친절한 분위기에 즐겁게 식사 마치고 나니 왠지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뭔가 아쉽다. 뭐라도 하나 더 하고 느긋하게 숙소에 돌아가자 하는 마음에 주변을 찾아본다. 괜찮은 재즈펍이 눈에 띄었다. 고민은 적을수록 좋다. 바로 이동한다.

간단한 저녁


예약은 안 했지만 다행히 맨 끝 구석자리가 남아있어서 안내를 받았다.

이런 소규모 공연장은 항상 즐겁다. 대형 콘서트도 좋지만 이런 공연장은 연주자들과의 관객의 바로미터가 매우 짧기 때문에 현장감이 극도로 살아난다. 어린 시절 활동했던 밴드의 추억도 떠올릴 겸 마티니 한 모금을 마시며 게슴츠레 공연을 뜯어본다. 몽골이지만 몽골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여행 마지막날을 기념하기 위한 한국인 한 테이블을 비롯해 공연장은 여러 인종이 섞여 있었고 구석의 나. 이렇게 관객 테이블은 모두 채워졌다.


드럼, 더블 베이스, 피아노 그리고 여성보컬 이 세션이 가져다주는 재즈는 이 밤을 더 낭만 있게 만들어준다.

혼자 라이브펍을 자주 갔었으나 이번만큼은 감회가 새로웠다. 이미 별이라는 낭만에 취해있어서인지 나는 금세 재즈와 칵테일에 물든다.

그렇게 1, 2타임 공연을 듣고 버스 막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바를 나온다.


돌아가는 길은 낭만으로 가득 찬 밤이다.

넓어진 마음에는 새로운 공기로 채워졌으며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온다. 도시의 밤은 빛났지만 하늘은 어둡다. 숙소에 갈수록 길은 어두워졌지만 흥얼거리는 나의 하늘은 촘촘히 밝아졌다. city of stars를 흥얼거리며 가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숙소.

그렇게 여섯째 밤이 마무리된다.





6일 차

또다시 빈둥거리면서 쉬었다.

비가 와서 어디 나가기가 싫었다. 좀 더 풀어서 얘기하자면 비를 머금은 흙길을 걷기 싫었다.

아마 나는 농사꾼은 못될 것이다.

아침에 따듯한 커피를 내려마시고 소파에 누워 책을 읽다가 졸리면 그대로 잠드는 게 다였다.

글로 써서 보니 참 게으르기 짝이 없다.


그렇게 다음날이 되었고 숙소에서 짐을 챙겨 나갔다.

곧 만나게 될 투어 일행과의 만남을 위해 시내에 머물 계획이었다.

불현듯 어제 바트뭉흐가 연락이 왔었고 간단한 안부 뒤에 나의 계획을 이해한 바트뭉흐는 선뜻 나를 새로운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내심 이 캐리어와 백팩을 들고 버스를 탈 생각에 고민이 되던 차 감사히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따로 주소를 보내주지 않아도 한번 와본 기억이 있는지 숙소 앞에서 이제 내려오라며 전화를 한다.

정들었던 숙소를 뒤로하고 다시 도심으로 이동한다.

2박만 할 예정이라 에어비엔비에서 조금 작더라도 위치가 좋은 숙소를 골랐다.

결정적으로 마음에 드는 카페 앞이었던 게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숙소에 도착해 가볍게 짐을 풀고 난 뒤 고민 없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8일 차

카페가 근처라 이제 드립백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충 차려입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근처에서 밥을 먹었다.

역시 편의성이 좋다. 블록마다 있는 CU편의점도 그렇고 식당에서 말만 하면 금세 가져다주는 시원한 생맥주 그리고 맛있는 커피까지. 세속적이지만 삶의 만족감을 주는 요소들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낀다.

내일은 투어 팀 일행 중 먼저 오는 2명과 만남이 약속되어 있다.

일상의 휴일 같은 하루를 마치며 투어 일행과의 여정을 기대하며 이렇게 나의 독백 가득한 일정이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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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