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길-4
어느덧 시간은 훌쩍 지나 걷기 시작한 지 10일이 넘었다.
그동안 다행히도 날씨는 흐리고 맑아지기를 반복하였고 비가 오지 않아 비교적 길은 쾌적했으며 초가을의 기온과 우천소식이 없는 날씨는 무거운 짐을 메고 가는 순례객들의 더위를 빠르게 식혀주었다.
이따금 뭉쳐있는 먹구름에 내심 가방 속의 우비를 점검했지만 다행히 사용하지 않았으며, 매일매일 더도 말고 오늘만 같기를 바라며 걸었다.
우천으로 인한 지체가 없다 보니 마음이 여유롭다.
여전하게도 걸으면서 보이는 것들을 열렬히 눈으로 주워 담았으며 이를 위해 걸음은 빨랐지만, 시선은 느리게 이동한다
때로는 탁 트인 광장에서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때로는 오래되어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물들을 바라보며 나의 기억의 책장에 켜켜이 보관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비눗방울처럼 두둥실 떠다디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먹구름 낀 광장을 밝게 해 주는 듯하다.
여정 중 하루에 최소 한 번 이상은 식당에 들러 메뉴 델 디아(Menu Del Dia)를 주문해 식사를 했다.
‘오늘의 메뉴‘라는 의미의 이 메뉴명은 음료를 포함해 애피타이저-메인-디저트 순으로 3코스가 서빙되며 각 항목마다 본인의 기호에 맞는 메뉴를 선택해 주문한다. 와인이나 맥주를 선택하면 조금의 추가금을 받는 식당도 있었지만 경험상 대부분 받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항상 와인으로 선택했다. 같은 금액이라니까 왠지 물을 선택하면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통 반 병(375ml)을 서빙해 주거나 때로는 한 병을 그냥 주는 경우도 있었다.
육체적으로 힘이 상당히 들었기에 빠르게 빠지는 기운은 먹고 마시는 것들로 빠르게 채워 넣었다.
아침-아점-점심-간식-저녁 대부분의 날들을 이렇게 먹었는데 아침과 아점 그리고 간식은 보통 카페에서 커피와 빵으로, 혹은 마트에서 샐러드, 과일과 빵으로 해결했고 점심과 저녁은 식당에서 그날 기분에 따라 주문했다. 돌이켜보면 거진 하루에 5끼를 먹었지만 다행히 이렇게 먹어도 활동량이 많아 살은 찌지 않았다.
산토 도밍고를 뒤로하며 이른 아침 출발한 일정은 점심때쯤 되어갈 때쯤 벨도라도에 당도했다.
마을 입구를 들어서면서 보이는 몰려있는 인파는 모두 한껏 멋을 낸 것으로 보아 결혼식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신랑으로 보이는 사람 앞에 유난히 눈에 띄는 빨간 자동차는 이 추측에 확신을 실어주었다.
드레스코드가 정 반대인 나는 괜스레 인파의 옥에 티가 될까 봐 빠르게 인파를 빠져나왔다.
지나가는 길. 인파들에게서 새어 나오는 웃음 머금은 시끌벅적함에 나 또한 덩달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듯하다.
많은 인파를 헤치고 나오니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강행군의 긴장이 풀어져서일까. 진이 빠지고 허기가 느껴진다. 마침 규모가 있는 마을이기에 여기서 식사를 하기로 한다.
마을을 가볍게 돌아보고는 영업 중인 식당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차 영업 중인 한 식당에 무작정 들어가 본다.
아쉽게도 영어 사용이 안 되는 식당이었기에 손짓 발짓으로 식사를 하겠다는 제스처를 보인뒤 테이블로 안내를 받았다.
당연한 얘기기만 영어가 안 되는 식당이었기에 영어 메뉴판이 없었다. 종업원이 조심스레 건네준 스페인어 메뉴판을 뚫어져라 보며 스페인어 단어 하나하나를 끼워 맞추듯이 해석해서 주문을 힘겹게 마쳤다.
시푸드랑 스테이크만 대충 해석하고는 ‘서프 앤 터프인가?’ 예상하고 주문했는데 새우구이와 스테이크가 따로 나오는 플레이트였다. 둘 다 먹으면 같은 거 아니겠나 싶어 반은 맞췄네 하며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서일까 작고 조용한 마을에서의 결혼식은 잔치 분위기가 물씬 풍겨 오늘은 이곳에 머물기로 한다.
근처 알베르게에 가서 숙박을 신청하고 동네를 간단히 둘러보니 저녁을 책임질만한 마땅한 식당이 보이지 않아 오늘 묵는 알베르게에서 해결하기로 한다.
여느 때처럼 마을을 수색하듯이 구석구석 탐방을 하고 난 뒤에야 저녁식사 시간을 맞춰 알베르게에 돌아왔다.
알베르게 직원의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갔고 이곳에서의 저녁은 타이완에서 온 자매와 함께 했다. 오래간만에 타인과 함께한 저녁은 즐겁기만 하다.
서로 간의 안부 인사를 시작으로 오는데 힘들었던 점들과 느꼈던 점들을 서로 나열하고 있자면 공통분모가 금세 쌓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공통점들은 이 여정중 만나는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게 만들었다.
서로의 몰골은 패잔병 같은 몰골이지만 깊어져가는 눈빛은 사람을 더 빛나게 만들어 주는 듯하다.
나도 그렇고 상대도 그렇고 소극적인 성격이라고 밝혔으나 금세 어색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그도 그럴게 식당을 둘러보면 대부분의 테이블이 상기된 표정과 즐거운 웃음소리 연이어 터져 나왔었고 식당을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루를 마무리해 가는 과정에서 풀리는 긴장과 음식과 술이 들어가니 편안해지는 분위기도 한몫했으리라.
여정중 느낀 점이지만 식당에서 주문하는 것과는 다르게 알베르게에서 주문하는 메뉴 델 디아는 다소 복불복이 있는 듯하다. 썩 괜찮은 알베르게가 있는 반면 영 아니다 싶은 알베르게도 간혹 있다.
그런 날은 2차로 근처 바에 들어가 가벼운 안주와 주류를 주문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다행히 오늘은 괜찮았으며 샹그리아를 벌컥벌컥 마시고서는 밀려오는 술기운을 빌려 일찍 잠에 들었다.
일정 중 음식은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보통 한국인들은 어디를 여행 가도 보통 맛집들을 우선적으로 찾아보지 않던가? 나 또한 그러하며, 그렇기에 매일매일이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었다. 직장인들의 최대 고민인 점심메뉴 고민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특히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할 때마다 석식 메뉴를 골똘히 고민한다. 그날 제공되는 메뉴가 마음에 들면 알베르게에서 해결하고 아니다 싶으면 인근 식당을 이용했다.
이 날도 어김없이 고민을 하였고 마침 빠에야가 제공된다는 안내문에 어제 식당에서 먹었던 빠에야가 내심 아쉬웠기에 가정식 느낌의 빠에야가 궁금해서 석식을 신청한다.
그리하여 오늘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샐러드, 빠에야에 와인이 나오는 평범한 메뉴였지만 식사를 하며 마주 앉은 순례자들은 서로 다른 국적과 서로 다른 관심사로 인해 서로의 흥미를 자극한다.
마침내 옆에 앉은 프랑스 친구는 LOL이라는 게임의 페이커 선수를 극찬하며 한국사람을 보자마자 “Do you know Faker?” 라며 그의 대단함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프랑스인에게 한국선수를 아냐고 역으로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소소하게 게임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쯤 앞테이블에서 한 순례자가 오늘 생일이라는 얘기와 함께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이후 주변 모두 그의 생일을 축하해 주며 노래를 부른다. 감사함을 표하는 생일의 주인공과 주변에 축하하는 순례자들을 보고 있자면 이곳에서도 사람들의 삶은 다를 것이 없었다. 모두들 한마음으로 타인의 탄생을 축하해 주고 기뻐하며 함께 저녁을 즐긴다.
생일 축하와 함께 저녁 식사를 마무리하며 내일을 위해 일찍 잠에 들었다.
내일 목적지인 부르고스에 가기 위해서.
순례자의 길 중 대도시로 꼽히는 부르고스는 가는 길 또한 아름다운 게 많았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걷는 이 여정이 어딘들 아름답지 않겠냐만은 소도시에서 대도시로 상경하는 들뜬 기분이 가는 길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나 보다.
가는 길은 새파랗게 높은 하늘의 연속이었고, 맑은 하늘 아래로 이따금 불어오는 순풍은 기분 좋게 땀을 식혀주었다.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웅장하고 세련된 성당의 외관에 여행자들과 순례자들의 핸드폰 카메라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정돈되고 너른 광장을 나아가면 마주하게 되는 웅장한 건축물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파란 하늘을 찌를 듯이 뾰족한 첨탑이 눈에 띄는 이 고딕양식의 건축물은 13세기에 착공이 시작되어 16세기에 완공이 되었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대성당은 이 지역의 확실한 랜드마크였다.
지친 몸을 잠시 추스를 겸 그늘진 바닥에 가방을 등지고 주저앉아 이 광경을 가만히 목도하며 땀을 식혔다.
땀이 식으면서인지 이 건물에 압도되서인지 올라오는 한기에 소름감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말라가는 땀과 함께 차갑게 진정된 마음을 추스르며 성당 주변을 차분히 걸어본다.
적지 않은 인파가 있었지만 순례객들이 많은 탓인지 서로가 배려하는 분위기였기에 인파에 비해 쾌적한 탐방을 할 수 있었다.
배낭을 메고 한참을 돌아봤던 탓일까 문뜩 느껴지는 허기짐과 동시에 대도시에 오니 매운 게 당겨 근처 식당을 찾아본다. 마침 근처 일식(라멘)을 파는 식당이 있기에 서둘러 이동해 식사를 하고 이곳에서의 하루를 보낼 준비를 한다.
큰 도시다 보니 알베르게가 많았으며 그만큼 순례객들도 많았다.
근처 적당한 알베르게를 들어가 빠르게 체크인을 하고 가볍게 샤워를 마친 뒤 도시를 마저 탐방 후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