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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표류기 13화

순례자의 길 - 레드 플레그

순례자의 길-6

by 외노자O

출발한 지 3주 차가 될 무렵 (비야프란카에서 트라바델로 즈음)

슬슬 신체에 황신호가 들어오는 듯하다. 무릎은 보호대를 차서 괜찮았지만 발목이 점점 말썽이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너무 무리하게 이동했던 탓일까? 다시금 높아지는 경사로 무리가 온 것일까?

자고 일어나면 사라지던 피로와 근육통은 다음날까지 연체되는 게 느껴졌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복리처럼 크게 다가왔다.

애당초 배가 고파서 중간에 간식을 먹거나 특별히 눈에 깊게 담고 싶은 장소가 아니라면 대체로 쉬질 않았는데 이런 일정은 이제 좀 곤란해졌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한다는 말이 이래서 나왔을까? 항상 달리듯이 혼자 가는 내게 레드플레그의 신호가 보였고 이제는 템포를 조절하면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을 걷는 중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또한 오는 길에는 동행을 제안받는 일이 왕왕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하루 평균 걷는 거리와 이른 출발시간을 이유로 그들과 동행을 정중히 거절하였고 나 혼자만의 시간에 더 집중하고 싶어 했기에 무리하게 걷는 이 일정은 점점 몸에 무리를 줬다.

이제부터는 어린 시절 학교 수업시간처럼 의무적으로라도 50분 걷고 10분 쉬고를 반복하며 걷기로 한다.


바람소리가 큽니다..




-오 세브레이로를 지나며


다시 마주한 능선과 산속 풍경은 첫째 날의 피레네 산맥을 떠올리게 한다.

푸른 산맥 위로 보이는 청량함 가득 머금은 하늘.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비행운

푸른 대지와 파란 하늘 사이에 하얀 선 하나가 하늘을 가로지른다.


이 벅찬 풍경을 사진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창백한 푸른 점이 아닌 창백한 하얀 선은 여정중 내 기억의 한 획을 긋기 충분하였다.

창백한 하얀 선(비행운)

다시금 마주하는 산맥들과 푸른 경관은 틈틈이 옆을 돌아보게 한다.

고개를 돌릴따마다 마주하는 자연경관은 매번 웅장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산길 자체가 쉬운 길은 아니지만 이런 아름다움이 주는 응원에 기운을 내어본다.

또한 복불복이었지만 중간중간 마주하는 숨은 보물 같은 맛집들 또한 중간중간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물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곳도 더러 있었다.

예를 들어 케첩 위에 냉동치즈를 올린 뒤 전자레인지에 데워 내놓는 토마토파스타라던가, 소금이 씹힐 만큼 짜디 짠 감자오믈렛이라던가… 신종 인종차별인가? 싶었지만 이런 음식들은 옆테이블 백인에게도 공평하게 제공되는 것이었기에 그런가 보다... 하며 옆테이블과 멋쩍은 눈인사 뒤에 서로 양손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조용히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이런 경우에는 가방에 있는 빵이나 과일 그리고 팩와인으로 입가심을 하며 다음 식당을 기대하곤 하였다.

개인적으로 여정중 감자오믈렛이 가장 맛있었던 집-스페니쉬 오믈렛과 레몬맥주(주소남겨놨습니다) / 케첩 파스타...

https://maps.app.goo.gl/bhHMokygwc3CGKMM8?g_st=ic

그때의 맛을 기억하며 집에서 한 번씩 만들어 봅니다.

산맥을 따라 걷다 보면 방목하며 기르는 양 떼들이 보인다.

몽골에서도 느꼈던 윈도우 배경화면 느낌을 여기서 다시 받는다. 초원의 언덕은 청량한 날씨까지 더해져 CG 같은 느낌의 배경이였기에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지나가는 길 순례자의 길 중 유명하다는 포인트마다 잠시 머물러 사진을 찍어본다.

매우 오랜 기간 자리 잡고 있었다는 순례자의 안내 비석과 800년 이상을 마을을 지키고 있다는 고목 등등..

포인트마다 순례자끼리 사진을 찍어주며 이곳을 오랜 시간 추억하기로 한다.

몸은 힘들지만 촬영자와 모델 모두 웃음이 가득하다.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 중간중간 유명한 장소를 보다 보니 어느새 내내 항상 보이는 안내 비석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숫자만 봐도 성취감이 차오른다.

조금만 더 걸으면 2자리 수로 줄어드는데 마치 이 기분은 예전의 군복무시절 남은 전역일을 세는 것과 비슷했다.

백 킬로대부터는 '부엔 카미노' 뒤에 '거의 다 왔어!'('almost there!')를 외치며 환호성으로 인사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서로의 안부와 응원의 인사를 건네며 가다 보면 잠시 스몰토크를 하며 걷기도 하는데

심심치 않게 이곳까지 오면서 중도 포기를 하는 사람이 꽤 많다는 걸 듣게 된다.


듣다 보면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았으며, 결과적으로 빠르게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닌 느리더라도 꾸준히 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다시 한번 배웠다.

조금 덜 걷는 게 결과적으로는 더 걷는 것임을.


아마도 무리하게 계속 빠른 속도를 고집했다면 건강상의 이유로 완주하기 어려웠을 듯하다.


트리아카스텔라
바람소리가 큽니다.




서쪽에 가까워질수록 날은 점점 궂어만 간다.

비가 쏟아지고 뒤이어 쨍쨍한 맑음은 세상을 습하게 만든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질 시간이 없는 날씨는 변덕스럽기만 하다.

이따금 강하게 쏟아지는 비는 판초우의를 뒤집어써도 다 젖기 일쑤였다. 이른 아침 출발에 앞서 문 밖 빗속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첫 발을 떼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나를 내려놓는듯한 이 첫걸음을 떼는 용기는 큰 알약을 물 없이 삼키는 것처럼 어려웠다. 신발끈을 고쳐 메는 순간까지 고민이 된다.


’ 여기서 하루를 쉬면서 더 보낼까…? 지금까지 열심히 해왔는데 하루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버스를 타고 20km 정도만 이동해 볼까…‘ 그도 그럴게 아침부터 쏟아지는 장대비에 버스정류장에는 순례자들로 붐볐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와 축축하고 답답한 판초우의 속.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들을 지나칠 때마다 걷는 길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내심 나 또한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싶었던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받아버린 환호와 박수에 그들 뒤로 줄을 설 수 없었다.


‘아니… 나도 버스 타고 싶다구요…’

파라스 데 레이





걷다 보면 피부에 와닿게 사람이 많아짐이 체감이 될 때가 있다.

보통 100km 지점부터 순례자들이 급격히 늘어나는데 이는 100km 지점부터 순례자 인증서가 발급된다고 해서 100km 기점부터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이러한 이유에서 많아지는 유동인구는 주변 상권을 살아나게 하는 듯하다.

덕분에 시에스타를 적용하지 않은 식당들은 가면 갈수록 늘어만 갔으며 덕분에 애매한 오후, 그리고 이른 저녁에도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는 가방에 식사거리를 들고 다니지 않았다. 체감상 알베르게 컨디션도 조금 더 좋았으며 여러모로 물건 구매가 수월하였기에 점점 도시로 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이제 정말 거의 다 왔다.

남은 체력을 긁어모아 막판 스퍼트를 내본다.

40km! / 개조심 (아르수아)
시에스타임에도 문제없는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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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