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를 읽는 여정

스페인 - 바르셀로나 (18)

by 외노자O
주요 도시 버스 노선도

가우디의 초대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적응을 해야만 환경이기도 했지만, 리스본에서 바르셀로나까지 오는 버스는 파리에서 고생하면서 탔던 버스보다 생각보다 견딜만했다.


어찌 보면 하루 종일 걷다가 앉아만 있어도 된다니... 이런것마저 감사하기까지 하다. 이제는 별게 다 감사하다.

이 버스를 타고 가는 여정은 아스트로가에서 마주한 주교궁으로 인해 시작되었으며 리스본-카사블랑카로 가려던 경로를 급선회해 리스본- 마드리드를 경유해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가는 여정은 열네 시간가량 버스를 탄 거 같은데 이동하는 동안 무던히도 버스에서 잤다.

자도 자도 도착하지 않는 버스에서 중간에 한 번씩 정차할 때면 휴게소에 들를 때였으며 화장실을 가거나 가볍게 오렌지주스와 크루아상 같은 빵을 비몽사몽인체로 입에 가져다 넣으며 그렇게 가기를 열네 시간.

예닐곱 시간이 넘으니 슬슬 좀이 쑤셔오고 허리가 아프다. 이 즈음부터 그러데이션으로 점점 후회가 밀려온다.

나의 인내의 범주는 8시간까지 인 듯하다.

기사님… 얼마나 더 가야하나요…?



저녁 10시에 출발해서 다음날 오후 2시쯤에 도착한 바르셀로나. 아무것도 한 게 없이 버스에 앉아있었지만 그렇다고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들 그렇지 않던가? 차에서 앉아서 이동만 한다고 해서 피곤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거. 버스에서 내려 배낭을 메자마자 파도처럼 피곤이 몰려온다.

지금 숙소에서 잠깐이라도 눕는다면 하루가 왠지 마무리될 것 같았기에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바로 앞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박카스 한 병마시듯이 후다닥 마시고 성가족 성당(사그리다 파밀리어)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이번 여행 자체가 언제 어디에 도착할지 모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정이었기에 입장권을 미리 구매할 수 없었다.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는 마음에 성당에 가서 외관이라도 눈에 담아두자 하는 마음으로 이동한기도 한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멀리서부터 보이는 첨탑은 내 설레는 마음을 쿡쿡 쑤시는 듯하다. 멀리서부터 작게 보이던 첨탑이 점점 가까워졌으며 마주한 이 성당.

도시 한가운데 솟아있는 이 이질적인 건축물은 볼 수록 놀랍기만 하다.

100년이 넘게 진행되어 온 이 건축물은 이미 완공되기도 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었으며 외벽에 있는 장식 하나하나 디테일함이 놀라웠다.


신이 만드신 자연물 보다 높을 수 없다며 근처에 있는 몬주익산보다 1-2m 낮게 설계된 이 성당은 수만은 인파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 높은 높이만큼이나 위용이 대단하다.

처음 마주한 면을 기점으로 한 바퀴 돌아보는데 성당 외관에 다양한 조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 조각들이 뭘 의미하는지, 군데군데 섬세하게 조각돼 있는 저 것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눈앞에 있지만 읽지 못하는 게 까막눈 같은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핑계를 대자면 갑작스러운 행선지 변경으로 미리 시간을 들여 목적지에 대한 사전조사를 하지 않음에 까막눈인 이 상황이 아쉬웠다.

짧은 시간에 이 도시와 관광지를 공부하고 계획을 세우기란 물리적으로 빠듯한 일이었기에 아쉬운 데로 부랴부랴 다음날 일정으로 종일 투어를 신청해 아쉬운 부분을 채워보기로 한다.


예술품의 역사와 배경을 모른다고 보지 못하는 건 아니었기에 최대한 이 예술품에 대한 사진을 찍으며 둘러보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저녁시간. 무지의 탐닉 시간이 지나고 바로 옆 파이브가이즈에 가서 햄버거를 먹으며 한숨 돌렸다.

햄버거를 기다리며 느긋하게 땅콩을 까먹으면서 쉬는데, 어쩌면 유럽여행에서 파이브가이즈는 나름 가성비 괜찮은 식당 같았다. 취향껏 선택한 뒤 디스펜서에서 받아먹는 음료와 짭짤한 땅콩이 계속 제공되기에 이 햄버거집은 대도시를 갈 때마다 애용되는 듯하다.

그렇게 내심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다시금 대성당을 두세 바퀴 더 돌았다. 입장이 불확실하니 못내 아쉬워서 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보다.

이날부터 성가족성당 티켓을 구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새로고침으로 표를 찾는 시간은 바르셀로나의 체류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방문 계획이 있으시다면 입장권은 꼭 미리 예매해 두시는 게 좋습니다… 꼭이요!)

숙소로 돌아와 씻고 나니 파도처럼 밀려왔던 피로는 내 눈을 덮었고 바로 잠들게 했다.





다음날 아침


오늘은 패키지투어를 신청해서 이동할 계획이다.

8 to 5의 일정의 종일 패키지 투어였으며 8시에 카사 드 바요뜨에 모여 관광을 시작한다.

역시 부지런함과 의지의 한국인... 이른 아침 집결지를 둘러보니 관광을 시작하는 인원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아침 일찍 가이드와 투어객 모두 까사 바뜨요에 모여 가우디가 설계한 주택을 찬찬히 뜯어보며 설명을 듣는다. 설명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나를 제외한 대부분이 신혼여행을 온 듯한 커플들이었다. 조금의 위화감이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다시 설명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독특하고 화려한 외관이 전부일 거라 생각했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 집은 보는데서 그치는 건축물이 아니라 읽어야 할 건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띄는 외관만큼이나 얽혀있는 스토리 또한 인상 깊다.

집주인의 재력은 충분했지만 같은 거리의 화려한 저택들에 비해 유독 존재감이 약했던 이 집은 가우디를 만나며 완전히 다른 운명을 맞는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가우디는 집을 하나의 생명체처럼 다루었다는 느낌이 직관적으로 들었다. 직선은 거의 없으며, 벽과 천장은 부드럽게 이어지며 숨 쉬듯 흐른다. 의뢰자의 취향과 가족 구성까지 고려해 아이가 좋아할 법한 동화 속 이야기를 집 안에 녹여 들었고, 그 중심에는 카탈루냐 전설 속 용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발코니는 해골을 닮았고, 기둥은 뼈처럼 보이며, 파사드는 비늘을 가진 피부처럼 빛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특히 지붕은 가장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드러낸다. 물결치는 타일은 용의 등과 비늘을 형상화한 것이고, 그 위에 꽂힌 십자가 모양의 탑은 바르셀로나의 수호성인 조르디가 용을 물리칠 때 사용한 창을 의미한다고 했다. 결국 이 집 전체는 선과 악의 싸움, 그리고 승리를 담은 하나의 생동감 넘치는 동화가 재현된다.

뒤이어 내부 공간 또한 빛과 공기가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계산되어, 창문의 크기와 타일의 색마저 층마다 다르게 설계되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현재는 개인 주택의 기능을 벗어나 전시 공간으로 남아 있지만, 이 건물은 한때 매각되어 츄파춥스로 유명한 회장의 손녀에게 선물로 전해졌다는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현실의 집이 누군가에게는 실제 동화 속 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까사 바뜨요를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인 까사 밀라로 향한다.

까사 밀라

‘채석장’이라는 별명으로 더 익숙한 까사 밀라는, 까사 바뜨요를 본 밀라 부부가 가우디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또 한 번 의뢰를 맡기며 시작된 건축물이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외관 탓에 완공 직후 혹평을 받았고 투박해 보이는 외벽과 함께 돌덩이 같다는 이유로 채석장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평가가 뒤바뀌었다.

파도와 해초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되었다는 이 건물은, 직선 대신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조 자체가 하중을 분산시키는 방식이라 내부에는 거의 기둥이 없다고 한다. 외관만큼이나 자유로운 내부 구조 덕분에 지금까지도 실제 거주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이 건물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특히 옥상에서는 까사 밀라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 굴뚝과 환기구들은 단순한 설비가 아니라 조각처럼 배치되어 있고, 가면을 쓴 병사나 수호자처럼 보인다. 이 독특한 형상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캐릭터가 바로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라는 설명에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온다.


까사 바뜨요가 하나의 동화를 품은 집이라면, 까사 밀라는 자연과 구조 자체를 담은 건축물처럼 느껴졌다. 두 건물 모두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전혀 다른 인상으로 남는다. 건축물들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 시간을 들여 읽고 생각해야 비로소 보이는 건축물로 기억에 남는다.



멀지 않은 위치의 두 건축물에 대한 감상을 마치고 뒤이어 구엘파크로 이동했다.

이동시간은 교통이 정체되어 차량을 타고 20분가량을 이동했을까? 그럼에도 걸어서 이동하기에는 꽤 시간이 걸릴 듯하다.

이동하면서 듣는 에드시런에 바르셀로나 노래가 아직도 인상 깊게 남는다.

활기찬 이 도시에 너무나 잘 매칭되는 곡이라 가는 길 내내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구엘파크

198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가우디의 작품 중 하나이며, 안토니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 백작의 염원이었던 영국의 전원도시를 모델로 하였다고 한다.

공사는 1900년 10월에 시작되었으며 처음 진행된 작은은 여러 주택을 지을 수 있도록 부지의 높이를 맞추는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1903년에 끝났으며 이와 동시에 구엘 공원 근처 외부 울타리 및 자동화와 말을 세워두는 일종의 주차장의 공사도 완료되었다.

또한 물을 확보해 저장하기 위한 다방면의 시스템을 고안하였고 그렇게 1906년 가우디는 구엘 공원 안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파크라길래 단순히 공원을 생각했는데 보통 흔히 생각하는 공원이 아닌 주택단지로 계획되어 건축이 되었다.

60채가량의 고급 주택이 들어설 계획이었지만 높은 언덕과 도심지에서 다소 먼 거리에 위치한 문제도 있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공원에 세워질 집들을 분양하는 것이 사실상 어려워졌다. 그로 인해 결국 가우디와 구엘 그리고 변호사친구 이렇게 3채의 집만이 건축되었으며 일정기간 공원으로 방치되었다. 몇 년 뒤 자금난으로 1922년 바르셀로나 시의회가 구매하였고 시간이 지난 뒤 1926년이 되어서야 시립 공원으로 개방되어 지금의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분양도 이런 미분양이 또 있을까 싶다. 문뜩 부도가 난 헝다그룹이 불현듯 스쳐 지나간다.


그도 그럴게 그라시아 거리나 카탈루냐 광장과는 지금 이동해도 시간이 꽤 소요되는 거리인데 그 당시 도로상황과 이동수단을 생각한다면 쉽지 않은 위치임에는 분명했다.


도착해서 둘러보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핑크색으로 눈에 띄는 가우디의 집이었다.

가우디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거주했다는 그의 생가였던 건물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그의 숨결을 느끼고자 하는 관광객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면 알록달록 길게 늘어진 벤치가 눈에 띈다.

앉는 사람을 생각해 인체공학적으로 곡선을 만들어 앉았을 때 편하게 느끼게끔 만들었다는데, 실제로 앉아보니 허리부터 등까지 자연스럽게 기대어지며 생각보다 편안했다. 차가운 돌이 아니라 체온을 받아들이는 듯한 감촉이 인상적이었고, 벤치 위를 덮은 깨진 타일 조각들은 햇빛을 받아 각기 다른 표정으로 반짝였다.


벤치 너머로는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바다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도시의 끝과 시작이 흐릿하게 맞닿아 있었고, 규칙적으로 늘어선 건물들 사이로 이곳만은 다른 시간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애초에 주택단지로 계획되었다는 사실이 문득 실감 났다. 단순히 풍경을 감상하는 장소라기보다는, 매일 이 풍경을 마주하며 살아가길 바랐던 사람들의 일상이 떠올랐다.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이용해 내려오니 전혀 다른 공간이 전개된다.

기둥들이 숲처럼 늘어서 있는 공간이 나오고 이는 또 다른 분위기를 펼쳐낸다.

나무를 닮은 기둥들은 인위적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연장처럼 느껴졌고, 빗물을 모아 저장하기 위한 구조라는 설명을 듣고 나니 장식으로만 보였던 형태들이 갑자기 기능적으로 다가왔다.

가이드의 설명을 빌어 가우디가 자연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를 그대로 빌려왔다는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공원을 천천히 걸으며 느낀 건 이곳이 ‘완성된 공원’이라기보다는 끝내 실현되지 못한 이상향의 흔적이라는 점이었다.

주택단지로서는 실패했지만, 그 실패 덕분에 지금의 구엘 파크가 남았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분양되지 않은 집들, 멈춰버린 계획, 방치의 시간을 지나 결국 시민의 공간이 되었다는 흐름이 이 공원을 더 입체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괜스레 미분양이 심각하게 난 아파트 단지를 대입해 봤지만 전혀 다른 전개의 이 공간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돌아 나오는 길에 다시 한번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은 여전히 유효했지만, 그 거리 덕분에 이곳은 바르셀로나의 소음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가우디와 구엘이 꿈꾸었던 전원도시는 끝내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 미완의 결과물이 지금까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 공원은 실패한 계획이 아니라 시간이 증명한 또 다른 형태의 성공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잠깐이나마 구엘공원을 돌아봤고 뒤이어 몬주익공원을 거쳐 산 세바스티안 해안으로 이동했다.









몬주익 산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간단히 사진을 찍고 내려왔으며 바로 다음 목적지인 산 세바스티안 해변으로 이동했다.


몬주익 산을 내려오자 공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돌과 흙, 나무 냄새로 가득했던 풍경이 순식간에 짠내를 머금은 바람으로 바뀌었다. 산에서 바라보던 바다는 여전히 같은 바다였지만, 해변에 서서 마주한 바다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산 세바스티안 해변에 도착했다.


투어를 진행하는 관광객 모두 이곳에서 개인별로 점심식사를 먹으며 두 시간가량의 자유시간을 가졌다.

식사는 가이드의 추천도 좋았지만 그냥 먹고 싶은 음식을 먹었다.

여행 중 어느새 루틴이 되어버린 것처럼 순례자의 길을 걸으며 중식은 항상 힘이 나는 육류와 와인을 먹었어서 그런지 해산물보다는 육류가 더 당겼다.

그렇게 비교적 간단히(?) 중식을 먹고 바로 해변으로 향했다.

점심은 든든한 고기~

이곳에 오는 도중 가이드의 바르셀로나의 해변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곳 중 하나라는 설명이 떠올랐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다른 해변들과 달리, 어쩌면 이곳은 조금 더 일상에 가까워 보였다. 수영을 마치고 수건을 두른 채 걷는 노인들, 모래 위에 천 하나를 깔고 편히 누운 사람들, 역동적으로 비치발리볼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바다를 향해 아무 말 없이 사색을 하고 이들까지.

여행자보다 이 도시의 주민들이 더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풍경이었다.


나는 모래를 밟고 천천히 걸었다. 늘 그렇듯 밀려오는 파도를 피해 뒷걸음을 치다 물러나는 파도를 향해 다시금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수 차례. 예측하지 못한 조금 거센 파도가 밀려와 발을 적셨고 그렇게 바다가 주는 포근함에 녹아들어 신발을 벗어두고 파도와 함께 모래사장을 걸었다. 그 감각이 어쩌면 몬주익에서 걸어 내려온 발걸음을 정리해 주는 것 같았다. 바다는 생각보다 차분했고,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꾸준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해변가의 활기찬 소리에 반해 요란하지 않은 파도 덕분에 이곳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면 방금 내려온 몬주익 산이 도시를 등지고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 위에서 내려다보던 풍경 속에 이제는 내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졌다.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조망하던 시선이, 지금은 수평선과 같은 눈높이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점이 바뀌자 생각도 바뀌고 마음은 자연스럽게 가라앉았다.


해변 끝자락에 앉아 한참을 바다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평화로운 분위기에 걸맞게 특별한 사건은 없었고, 사진으로 남길 만큼 극적인 장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해변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여행지에서 흔히 마주하는 ‘멋진 풍경’이라기보다는, 이 도시가 보여주는 가장 일상적인 장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런 여유로움이 일상이고 싶었는지, 근처 작은 과일가게에서 내가 좋아하는 황도 서너 알을 구매해 디저트로 파도소리를 들으며 먹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앉아 바다를 마주 본다.

산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다시 바다 앞에 서기까지의 짧은 이동 속에서 바르셀로나는 여러 얼굴을 보여주었다.

산 세바스티안 해변은 이 일정의 중간에서 인터미션처럼 조용히 숨을 틔워주는 공간이었다.

발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이 도시를 이해하는 데 굳이 더 많은 설명은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일상





성가족 대성당


산 세바스티안 해변을 떠나 다시 도시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지기 전,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성가족 대성당이었다. 수많은 사진과 영상으로 남겨진 리뷰들, 그로 인해 이미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건물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마주하자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외관은 이미 하나의 세계관을 담고 있었다.


아쉽게도 내부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투어객 중 상당수는 신혼여행으로 온 여행객들이었기에 오래전부터 입장 티켓을 구했기에 투어가 끝나고 성당에 입장하였으나 나는 여전히 입장 티켓을 구하지 못했으며 열심히 취소표를 찾아도 쉽사리 예약을 할 수 없었다.

아쉬운 대로 대성당 앞 광장에서 한동안 그 모습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어쩐지 이 건물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건네는 듯했다. 하늘로 뻗어 올라간 첨탑들 사이로 어둠이 내려앉으며, 낮과는 또 다른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미완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이 성당을 현재진행형으로 느끼게 했다.



가이드의 설명에 귀는 열어두었고 눈은 온전히 성당 외부의 디테일한 조각상들에게 매료되었다.

독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부모님의 반 강요로 성경을 두 번 정도 통독을 한 경험도 있었고, 교회에서 악기로 봉사를 하며 지낸 기간이 10년 가까이 될 만큼 기독교에 대하여 어느 정도 경험이 있었기에 스토리에 대해서 최소한의 기본지식이 있는 상황이었고 그로 인해 성당 벽면의 구간구간마다 가이드의 설명이 깊이 와닿을 수 있었다.


모르면 넘어가지만 알고도 넘기기는 쉽지 않다.

설명을 듣는 과정은 모두가 감탄의 연속이었다. 나 또한 그 중 하나였고, 외부가 이런데 내부는 얼마나 대단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덕분에 취소표를 예매하기 위해 새로고침을 쉬지 않았고 결국 그날 저녁 다음날 오후의 입장권을 하나 예매할 수 있었다.


나는 2시간가량 가이드의 성당 외부 설명을 경청했고, 눈으로 훔쳤고 그것들을 담았다.


그렇게 오후 5시가 넘었고 종일투어가 끝이 났다.

8 to 5의 일과가 알찬 하루였다.



투어가 끝나니 저녁때가 되기도 하였고 긴장이 풀리고 진이 빠지니 단 게 갑자기 당겨온다.

배가 고파졌고, 저녁 메뉴를 고민할 복잡한 생각을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저녁은 간단하게 가는 길에 마주한 츄러스와 젤라또로 해결했다.

따뜻한 기름 향이 남아 있는 츄러스를 한 입 베어 물고, 그 뒤를 차가운 젤라또로 마무리하는 조합은 예상보다 잘 어울렸다.

거창한 식사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어쩌면 이 도시의 리듬에 더 잘 맞는 저녁처럼 느껴졌다.


조금은 선선해진 공기에 숙소에서 조금 휴식을 취한 뒤 옷을 갈아입고 다시 한번 이 도시의 밤을 느끼기 위해 나른함을 박차고 다시 나왔다.


카탈루냐 광장을 지나며 도시의 분위기는 다시 한번 바뀌었다. 낮의 분주함은 조금 가라앉고,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여유가 섞여 있었다. 광장은 여전히 중심에 있었지만, 낮보다 덜 긴장된 얼굴로 여행자와 시민을 맞이하고 있었다. 버스와 지하철, 거리의 불빛들이 교차하며 이곳이 바르셀로나의 심장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이윽고 고딕지구로 들어섰다.

너른 광장에 들어섰고 중앙에는 가우디가 디자인했던 가로등 불빛 아래 따뜻하게 빛나는 이 공간은 벌써부터 차분하지만 깊게 이 도시를 안내하는 듯하다.

거대한 어트렉션을 체험하듯 골목은 갑자기 좁아졌고, 돌로 된 바닥과 오래된 벽들이 밤의 공기를 더 깊게 만들었다. 골목길을 지나며 발소리는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낮에는 미처 보이지 않던 시간의 흔적들이 밤이 되자 또렷해졌다.


고딕지구를 걷는 동안 이 도시는 단순히 관광지가 아니라, 수백 년의 시간을 층층이 쌓아 올린 공간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낮에는 가우디의 상상력이 도시를 이끌고, 밤에는 중세의 흔적이 골목마다 스며들어 있었다. 하루 동안 걸어온 길들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정리되며, 이 도시는 쉽게 요약될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중 마주한 다양한 배경과 풍경들, 그리고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명소의 실제 모습까지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영화 향수에서 주인공이 첫 살인을 하는 장소와 처음으로 향수에 대해 제대로 배우게 되는 향수 가게 또한 이 거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현대적인 분위기의 세련된 상점부터 올드타운만이 주는 기품 있고 따듯한 분위기까지 상반되지만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산만하지 않고 차분하게 다가온다.

영화 향수에서 주인공이 첫 살인을 한 장소


그렇게 하루의 마지막은 화려함보다는 차분함에 가까웠다. 도심에서 공원으로, 산에서 바다로, 성당에서 골목으로 이어진 하루는 특별한 사건 없이 흘러갔지만, 그래서 더 차분하고 또렸히 남는다. 이 도시는 큰 감탄보다 작은 장면들로 빼곡히 채워져 기억되는 여행지라는 것을.

그날 밤 고딕지구의 골목을 걸으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전날 알찬 하루를 보냈고 오늘은 마음에 들었던 장소를 리마인드 하며 나만의 템포로 다시 체험하기로 한다.

우선 밝을 때의 고딕지구가 궁금했다. 올드타운만이 주는 감성은 낮과 밤이 명확히 달랐기에 우선적으로 고딕지구로 향했다.

하루의 시작인 조식은 근처에서 간단히 치킨샌드위치와 스텔라 한 잔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어제 늦은 시간이어서 어제 미처 보지 못한 향신료 가게에 먼저 방문했다.

이곳은 영화 향수에서의 주인공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향수가게로 촬영되었고 향수만큼이나 향기롭고 감칠맛 나는 향신료들을 취급하고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머릿속으로 재생해 보며 이 장소를 다시금 대입해 본다.


영화 향수에서 주인공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향수가게(현실은 향신료가게)


그렇게 밝은 배경의 고딕지구를 돌아다니다 피카소 박물관에 도착했다.

오전이어서 그런지 입장객들은 적었으며 덕분에 느긋히 그림과 작품들을 감상했다.


학창 시절 미술 교과서에서 봤던 것 같은 그림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이미지들이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그동안 알고 있던 피카소는 아주 일부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피카소 하면 흔히 떠올리는 강한 이미지보다 조금 더 차분하고 솔직해 보이는 그림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는 피카소의 대표작보다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작업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형태가 완전히 흐트러지기 전의 그림들, 아직 그의 고민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작품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위대한 화가이자 거장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이 계속 시도하고 흔들리던 시간에 더 가까워 보였다.


같은 주제를 두고 여러 방식으로 그려낸 그림들을 따라가다 보니, 끊임없이 바꿔보고 다시 그려보는 집요함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간단히 설명을 읽고 다시 그림을 바라보는 단순한 반복만으로도, 이 사람이 쉽게 만족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림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충분히 전해졌다.


오전이라 관람객이 많지 않았던 덕분에 원하는 작품 앞에 여유롭게 머물 수 있었다. 모든 그림을 이해할 수 도 없었고, 그러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몇 장면만 눈에 담고, 그 앞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늘 그렇듯 이런 식의 관람이 편안했다.


박물관을 나서며 피카소라는 이름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특별한 재능 이전에, 계속해서 시도하고 바꿔 나갔던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았다.

고딕지구의 조용한 골목 안에서, 그렇게 그의 명성에 가려진 노력의 과정을 조금이나마 엿 본 기분이었다.


구구구구구구구국구구국구



피카소박물관을 나와 정적인 공간과 대비되는 공원으로 동선을 잡았다.

멀지 않은 곳에 개선문이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향했다.

방문했을 당시 웅장한 개선문 너머로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득했는데, 비눗방울로 공원을 장식 중인 한 아저씨로 인해 생동감이 부쩍 살아나는 느낌이다.

평일 낮 점심시간 즈음이었고 개선문 뒤로 펼쳐지는 공원에는 사람들의 활기가 가득해 그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괜스레 활기가 돋고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렇게 잠시간의 공원 산책을 마치고 뒤이어 시내버스를 타고 산 세바스티안 해안으로 다시 향했다.



버스를 타고 30분가량을 이동하니 도착한 어제의 해변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구름 낀 어제와는 다르게 화창한 날씨로 더 맑은 하늘과 깨끗한 해안의 분위기를 연출했고 나는 어제 못 다 누린 해안가에서의 여유가 못내 아쉬웠는지 오늘은 조금 더 편안한 복장을 입고 와 모래사장에 누워 나도 그들처럼 일상인 것처럼 여유를 만끽해 본다.

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있으니 규칙적인 박자처럼 파도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멀리서 운동하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이따금 들려온다.

그렇게 지금이 몇 시 인지 잊고서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해안에서 누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배도 고파지고 오늘 입장 예정인 성가족 성당의 입장 시간이 점점 가까워진다.




설레는 마음은 입장시간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져갔고, 결국 입장 두 시간 전부터 성당 근처를 도착하게 만들었다.

역시 근처 갈 만한 장소는 파이브가이즈였고 다시금 방문해 햄버거로 식사를 하고 땅콩으로 간식을 먹으며 설렘과 기대감을 잠재웠다.

일용할 양식



결국 들썩이는 감정은 입장시간보다 한 시간가량이 남았을 때부터 주변을 돌며 내가 입장할 이 건물 자체를 다시금 둘러봤다.

그리고는 입장 대기줄에서 줄을 섰고 드디어 이 지역의 화룡점정과 같은 성당에 입장하게 된다.

드디어 입장!

드디어 고대하던 입장의 순간이었다. 위엄이 느껴지는 두꺼운 철문을 지나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입장객들 모두가 비슷한 표정으로 잠시 말을 잃는 듯 보였다. 누군가는 고개를 들었고, 누군가는 걸음을 멈췄다. 감탄이라는 말보다, 이 공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에 가까웠다.

사그라다=성, 파밀리아=가족 즉 성스러운 가족이란 이름의 이 성당은 말 그대로 성스러움이 가득한 곳이었다.


처음 보여지는 광경은 따사로운 오후의 태양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해 성당 안으로 조용히 퍼져있었다. 그렇게 빛은 한 방향에서 쏟아지는 게 아닌 공간 전체를 감싸듯 체류했다.

그 색감과 온도 덕분에 이 웅장한 곳에서 이색적인 평화로움에 가까운 인상을 주었다. 종교적 의미를 깊이 알지 못해도, 이 빛들이 신성하게 보이는 감각만큼은 설명 없이도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리고 중앙으로 이동해 천장을 올려다보니 끝이 쉽게 가늠되지 않았다. 높은 층고에서 오는 개방감은 압도적이었으며 구조물 하나하나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으면서도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느낌을 주었다. 만약 현대적인 방식으로 천국을 표현하라고 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중앙을 지나며 빛의 색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해가 뜨는 방향은 파란빛을 머금고 있어 차분했고, 해가 지는 방향에는 붉은빛이 스며들어 공간은 상대적으로 따뜻했다. 시간대와 위치에 따라 성당 내부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듯했는데, 그 변화마저 계산된 일부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아름답다’고 말하기엔 이 공간은 너무 많은 감각을 동시에 자극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에티튜드 또한 조용했다. 저마다 포징을 취하며 사진을 찍는 손길은 분주했지만,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낮아져 있었다. 누구도 크게 안내하지 않았지만, 나를 비롯한 모두가 이곳에서는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공간이 사람의 태도를 결정짓는다는 말을 이곳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공간에 압도된 느낌이 지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성당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이미 이토록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는데도, 여전히 공사 중이라는 점이 오히려 특별하게 다가왔다. 미완이라는 상태는 이 건물을 불완전하게 만들기보다는,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유산이면서 동시에 현재진행형인 장소라는 점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흔한 관광지와는 분명히 달랐다.


한참을 내부를 둘러본 뒤에야 비로소 이곳이 왜 바르셀로나의 상징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결코 담기지 않는 감각들이 이 공간 안에 있었다.

이 성당은 보는 곳이 아니라, 잠시라도 머무르며 느끼는 곳이었다.


내게 가장 오래 남은 순간은, 의도적으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을 때 찾아왔다. 한쪽 벽면 가까이에 서서 사람들의 흐름을 잠시 비켜 보고 있을 때였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바닥과 기둥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고, 그 색이 겹치는 지점에서는 예상치 못한 색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빛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차분히 구석에 앉아 이 공간을 탐닉하던 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묘하게 자리를 옮기며 공간의 표정을 바꾸고 있음을 알아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분했던 바닥이 어느새 따뜻한 색으로 물들었고, 기둥의 그림자는 길이는 변해갔다. 그 변화는 눈에 띄게 빠르지도, 완전히 느릴 정도도 아니어서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야 움직였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이 성당이 ‘보여지는 건축물’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빛이 머무는 자리마다 분위기가 달라졌고, 그에 따라 머릿속의 생각도 조금씩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이 자연현상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설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자연적으로 전달되는 감각이었다.


그 앞에 서 있는 동안에는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왜 정말 아름다운 순간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기보다 눈으로 직접 보고 오래오래 기억에 남기고 싶지 않던가.

나 또한 이곳이 그랬고 그랬기에 기록으로 남기기보다는, 그저 그 시간 속, 그 장소에 일부해 있고 싶었다.

빛이 지나가고, 색이 옮겨가고 다시금 원래의 톤으로 돌아오는 그 과정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태양계의 흐름에 따라 하루는 매일 반복되겠지만

아마도 그 빛은 매일 같은 자리에, 같은 색으로 머물지 않을 것이다. 계절과 시간, 사람에 의해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줄 테고, 그날 내가 보았던 장면은 오직 그날에만 존재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의 기억은 사진과 같은 찰나의 기억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잠시 머물렀던 빛의 시간으로 남아 있다.


완공되면 이 장소만큼은 다시 방문하게 될 것 같다.

지금의 순간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내부 관람을 마치고 성당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온도와 소리의 차이였다.

성당 안에서 부드럽게 머물던 빛과 공기는 문을 나서는 순간 분명하게 끊어졌다. 바깥의 햇빛은 더 직설적이었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다시 또렷해졌다.

세속적인 느낌이 직설적으로 들었던 게 성당 앞을 배경으로 틱톡에 올릴 춤을 추며 촬영하는 사람들, 호객행위 하는 사람들, 언성을 높이며 옥신각신 하는 사람들 등등 저마다 자기주장을 펼치기 정신없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상반된 배경에 잠시 다른 세계에 머물다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무자비한 소음공해를 피해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다시 올려다본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내부에서 느꼈던 인상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쪽이 빛과 공간으로 완성된 세계였다면, 외부는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구조물 그 자체였다. 크레인과 발판들, 아직 닿지 않은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며 이 성당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다시 실감하게 했다.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이 건물을 현재에 단단히 묶어두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성당을 떠나며 뒤를 한 번 더 돌아봤다. 잠시 머물렀던 내부의 고요함이 바깥의 분주함과 겹치지 않고, 서로 다른 기억으로 분리되는 느낌이 명확히 들었다.

이곳은 분명 오늘 하루의 중심이었고, 쉽게 정리되지 않고 여운이 긴 장면으로 남았다.


그리고 해가 저물 무렵, 다시 고딕지구로 향했다.

오늘 늦은 밤 비행기로 이동할 예정이었는데 남은 시간 이 바르셀로나를 마무리하기 좋은 곳을 고민한 결과의 장소였다.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반전 없이 골목 사이에 내려앉아 있었다. 곳곳에 비눗방울과 함께 아이들이 웃고 뛰는 소리와 함께 활기가 도는 이 장소가 코스요리의 마지막 달콤한 디저트처럼 이 도시의 여정을 마무리하기 좋았다.


그렇다고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그런 특별한 목적 없이도 시간을 흘려보내기에 이곳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오래된 벽과 낮은 건물들 사이에서, 오늘 하루 동안 마주했던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있었다. 오늘의 시작인 이 고딕지구에서 바다로, 성당에서 다시금 이 골목으로 이어진 하루는 그렇게 천천히 정리되어 갔다.


그리고 늦은 밤, 공항으로 향했다. 카탈루냐 광장 앞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이동했으며 그렇게 바르셀로나에서의 여정이 갈무리되어 간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했고 비행기에 올라 좌석에 앉았을 때에야 이 도시의 일정이 끝났음을 체감했다.

못내 아쉬웠는지 사진 찍었던 사그리다 파밀리어를 비롯해 이 도시의 사진들을 수차례 넘겨봤다.


그리고는 이제 이동할 목적지에 대해 빠르게 계획을 정비했다.

다음 목적지는 그리스의 산토리니였다.


비행기는 활주로를 떠나고,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점점 작아졌다.

성당 안을 채웠던 낮의 빛들과, 골목의 조명과 어둠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게 불 빛이 반짝이는 듯하다.

그렇게 이곳에서의 일정이 반짝이듯 빨리 마무리되었고 다시금 또 다른 반짝이는 풍경을 향해 이동한다.

산토리니로…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