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산토리니 (19)
바르셀로나에서 산토리니로 이동하는 새벽비행을 이용했다.
베트남에서 근무당시 분기마다 한 번씩 한국을 오가며 비행기 창가에서 어두운 배경에 흩뿌려져 있는 별을 보기 위해 일부러 새벽비행을 선택하곤 했기에 새벽비행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다.
기내에 승객들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관광지인만큼 다들 상기된 표정과 함께 조금씩 높은 톤의 대화들이 오갔다.
길지 않은 비행이 끝나고 산토리니 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3시쯤 되었으나 무슨 자신감인지 공항에서 숙소까지 걸어서 가기로 결정했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순례자의 길을 걸었다는 자신감에 취해 5km 이하는 그냥 산책처럼 느껴졌었나 보다.
호기롭게 호객행위를 하는 공항의 택시들을 뒤로하고 저벅저벅 걷는 심야의 도로.
그렇게 15분쯤 걸었을까? 가로등의 배치 간격이 점점 더 넓어져 사이사이마다 어둠이 짙게 깔리는 구간이 퐁당퐁당 존재했고 나는 마지못해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점점 후회가 밀려온다.
설상가상으로 구글맵이 안내하는 길은 차가 지나갈 수 없는, 말 그대로 사람만이 이동할 수 있는 도로였기에 일정 구간을 지나자 가로등이 아예 없었으며 불현듯 싸늘한 위기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길을 다시 돌아가자니 이 심야에 20분을 돌아서 더 걸어야 했기에 눈 딱 감고 어둠을 가로질러 가기로 한다.
그렇게 한 5분쯤 더 걸었을까 어디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왜 그 있지 않는가? 소형견이 아닌 대형견이 짖는 소리.
순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이 길로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순례자의 길중에 산짐승에게 공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었다는 얘기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간다.
갈팡질팡하다 결국에는 다시 뒤를 돌아 대로변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이게 뭐라고 그냥 택시 타고 가면 될 것을 쓸데없는 아집으로 한 시간가량을 배낭을 등지고 걸었다.
그렇게 도착하기까지 속으로 소리를 지르며 투덜대며 가기를 삼십 분…
불과 낮에만 해도 바르셀로나에서 느꼈던 감동은 어디 갔는지, 몸도 마음도 지쳐 기진맥진으로 새벽 4시가 훌쩍 넘어서 도착한 숙소.
에어비엔비로 독채를 예약했고 사전에 늦는다는 얘기를 했기에 입장에는 문제는 없었으나 긴장이 풀리니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다시는 심야에 무모하게 그러지 말아야지...
긴장은 풀리고 피곤이 적잖이 쌓였기에 바로 샤워를 하고 핸드폰 알람을 전부 꺼버린 뒤에 잠에 들었다.
5시가 넘어서 잠에 들었고 점심즈음에 배가 고파서 눈이 떠졌다.
숙소 바로 앞 마트에서 감자칩과 맥주 몇 캔을 사 온 뒤 애피타이저와 아페리티프처럼 먹으며 구글맵으로 괜찮은 식당을 찾아본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평이 괜찮은 식당이 있어 크록스를 질질 끌고 나가 식당에서 세트메뉴를 주문한 뒤 포장해서 숙소에서 먹고 식곤증에 다시 잠들었다.
그렇게 게으른(?) 첫날을 보냈다.
다음날.
오늘은 산토리니섬의 유명지 오아마을에 가기로 한다.
방전된 체력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 푹 자며 충전했더니 세상이 다시 맑게 보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 마을에 드레스코드를 맞추기 위해 리스본에서 구매한 옷을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그리고 배낭 깊숙한 곳에 잠들어있던 포카리스웨트 한 병을 꺼내서 밖을 나섰다.
뜬금없지만 그도 그럴게 여행 출발부터 내심 이곳에 오게 될 거라는 믿음 아닌 믿음이 있었다.
그 증거로 인천공항에서 구매했던 포카리스웨트는 산토리니까지 긴 여행을 동반하였으며 이걸 마시지 않았기에 내 배낭 안에서 500ml만큼 꾸준히 지분을 차지했었다.
이 음료는 나의 여정의 긴 동반자 중 하나였으리라. 어쩌면 이 별거 아닌 포카리스웨트 한 병이 아까워서라도 이곳에 방문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막상 도착해 보니 일본인 비중이 많았으며 아니나 다를까 관광객 대다수가 커플끼리 와서 로맨틱한 이 섬의 분위기를 만끽 중이었다.
확실히 남자 혼자오기에는 지나치게 섬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런 걸로 위축되어 있기에는 이 섬이 너무 아름다웠기에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마을 이곳저곳을 탐험을 이어나간다.
골목골목 굽이진 길이 많아 구글맵의 지도가 없으면 원하는 위치로 가기 어려운 구조였기에 손에서 핸드폰을 뗄 수가 없었다. 시선은 풍경과 핸드폰을 번갈아 가며 움직였고 마을은 고요했지만 외지인인 나의 시선과 발걸음은 분주했다.
보면 볼수록 파란색과 하얀색의 그리스 국기가 이 마을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란색의 바다와 하늘, 그리고 그 사이를 떠다니는 하얀 구름.
대부분의 건물들 또한 이 두 가지 색으로만 표현되어 있었고, 그 단순한 배색의 통일감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세련되고 멋지게 다가왔다.
둘러볼수록 이 마을은 어쩌면 맞춤 정장처럼 느껴졌다. 이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이 분위기에 맞춰 정교하게 재단된 것처럼, 과하거나 어긋나는 부분 없이 꼭 맞아떨어졌다.
화이트와 블루 컬러의 깨끗한 색감 위로 건물과 골목이 이어졌고, 상점에서 취급하는 상품들마저도 톤 앤 매너를 지켜내며 같은 색의 언어로 이 도시는 내게 말한다.
어디를 바라봐도 시선이 걸리는 지점이 없었다. 다시 말해 모난 곳 없다는 얘기다.
정제된 풍경 속에서 오히려 편안함과 세련됨이 공존하는 걸 느꼈다.
사진으로 수없이 보아왔던 장면들이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오아 마을은 이미지보다 훨씬 조용하고 단정했다.
과시할 필요도 없었지만,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느려졌다. 이곳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었고 서두를 수도 없었다.
복잡하게 얽힌 골목들 사이로 풍경을 소비하듯 지나치기보다는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는 쪽이 더 잘 어울렸다.
바다를 향해 열린 작은 틈새마다 파란빛이 스며들었고, 하얀 벽에 반사된 햇빛은 마을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기에 차가운 느낌보다는 따뜻하게 푸른 느낌이 들었다.
이 도시 하나가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단순히 예뻐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규칙을 끝까지 지켜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색을 줄이고, 요소를 덜어낸 대신 완성도를 선택한 결과가 이 마을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오아는 그렇게, 내게 하나의 거대한 작품의 도시로 다가왔다.
오아마을을 이곳저곳 돌아다닌 뒤 근처 대형마트에서 두 손 가득 장을 본 뒤 숙소로 돌아왔다.
체류기간이 일주일이었기에 느긋한 마음으로 이 섬을 탐방하기로 하고 양손 가득 식료품을 싸들고 오늘은 야외활동을 빠르게 마무리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좋은 숙소때문이였을까? 아니면 나태함이 도져서일까?
알베르게에서 고생하던 게 생각났는지 널따란 침대를 굴러다니며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그렇게 이틀을 까먹었다.
배달의민족까지 있었다면 아마 일주일 내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중간에 배가 고프면 근처 식당에 가서 밥을 먹거나 그마저도 귀찮을 때면 마트에서 장을 봐왔던 음식들을 먹고 나서 다시금 포근한 침대에서 하염없이 누워서 유튜브를 보다 잠들었다.
산토리니까지 와서 유튜브로 산토리니 영상을 보고 있었던 게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숙소의 안락함과 함을 느끼며 산토리니까지 포기할 수 없어서 그랬나 보다.
넷째 날 오후가 돼서야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점심을 잔뜩 먹은 뒤 식곤증에 잠에 들었고, 시간이 얼마 흐른 뒤 문뜩 목이 말라 침대에서 냉장고를 향해 걷던 중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아! 살면서 이곳을 오면 얼마나 와보겠는가.
좀처럼 오기 힘든 관광지에 와서 이렇게 누워서 잠만 자다 갈 수 없었기에 구글맵으로 어디 괜찮은데 없는지 뒤적거리다 괜찮은 전망포인트가 있어 느긋하게 숙소 밖을 나섰다.
마을 중심지에서 약 20분 정도를 걸었고, 마을과는 다소 떨어진 섬 가운데의 탁 트인 전망대라 그런지 바람이 제법 세게 불어왔다. 바람에 실려 온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고, 그 덕분에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숙소를 나와 40분쯤 걸었을까, 다소 험했던 길 끝에서 시야가 한순간에 트였다. 막혀 있던 풍경이 한꺼번에 열리듯, 지중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게 펼쳐진 바다는 잔잔했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유람선 하나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급할 것 하나 없는 속도였다. 그 모습이 묘하게 이 섬의 시간감각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다는 고요했고, 그 고요함이 마음과 발걸음을 붙잡았다.
예상보다 훨씬 평온한 풍경 앞에서, 잠시 말문과 생각이 막혔다.
돌담에 걸터앉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파도 소리는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왔고, 생각보다 강한 바람은 옷자락을 꽤나 흔들어댔다.
가만히 실눈을 뜨며 섬의 윤곽을 눈으로 따라가 각 마을의 위치를 하나씩 짚어보았다.
‘저쪽은 오아, 그 아래가 피라. 저 멀리 맞은편은 아크로티리. 내일은 저 방향으로 가볼까? 아니면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볼까?‘
계획이라고 부르기엔 느슨했지만, 이곳에서야 비로소 여행의 남은 일정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 무렵 노을을 기점으로 다시 몸을 일으켜 돌아오는 길에 나섰다. 오는 길이 험준했기에 어두운 밤에는 다소 이동이 곤란할 듯했다.
암석과 자갈이 즐비한 경사로를 나왔고 다시 마을에 들어와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낮 동안 길을 따라 이어지던 풍경 위로 하나둘씩 조명이 켜졌고, 파랗던 하늘은 점점 검푸른 색으로 물들어 갔다. 그 변화의 과정이 유난히 또렷하게 느껴졌다.
핸젤과 그레텔에서 과자 부스러기가 길을 안내하듯이, 마치 길이 나를 숙소로 안내하는 것처럼, 조명은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고 그 사이사이로 어둠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낮의 산토리니가 밝고 정제된 모습이었다면, 이 시간의 산토리니는 불필요한 것을 모두 덜어낸 뒤의 모습에 가까웠다. 소리도, 움직임도 줄어들었지만 대신 풍경은 더 깊어 보였다.
다섯째 날
오늘은 레드 비치를 갈 계획이다. 전날 전망대에서 시선이 가는 방향대로 계획을 잡았다.
섬 중앙을 기준으로 7시 방향에 있는 붉은 암석이 펼쳐진 해변이었고 마을 중앙에서 버스를 타고 30분가량 이동했다.
차편은 한 시간에 두 번 정도 있는 듯하였고 섬 내부에서 MTV나 경차를 렌트해서 이동하는 관광객도 더러 보였다.
나중에 둘이 올 기회가 생긴다면 렌트를 해서 이동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본다.
버스에서 내려서 해안가로 도착하니 페리를 통해 인근을 투어 하는 배편이 있었으나 걸어서 이동하기로 했다.
이동하기 전 와인 한잔으로 잠시 기운을 내었고 이후 걸어서 십여분 이동하니 어렵지 않게 레드비치를 찾을 수 있었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적벽색 배경을 바탕으로 그와 대비되는 푸른색의 바다가 눈에 띈다.
해안가로 내려가는 길목은 거리의 악사가 바이올린을 켜는 중이었다. 소리를 따라 언덕을 넘었고 해안가로 내려갈수록 음악소리는 희미해졌고 파도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온다.
약 50여 명 정도의 인파가 이 해변을 즐기고 있었으며 나 또한 신발을 벗고 반바지가 젖지 앉는 수심까지 입수해 이 해변을 거닐었다.
주위를 돌아보면 주변에는 베이지색 민둥산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 부분만 이질적인 붉은빛을 머금고 있는 게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다.
다음날
레드 비치에서 하루를 보냈고, 오늘은 블랙 비치에서 시간을 보낼 계획에 숙소를 나섰다.
그렇게 이곳에서의 마지막 일정이 다가와서야, 그제야 나의 나태함이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다. 산토리니로 여행을 온다면, 오아 마을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머지 일정은 모두 이곳의 해변에서 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곳의 시간은 느긋했고, 또 충분히 좋았다.
버스를 타고 이동했고 도착하니 하얗고 파란색의 건물이 먼저 눈에 띈다.
샛길에 있는 꽃담길을 가로질르니 이윽고 마주한 검정 모래사장과 그와 대비되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나는 가볍게 발을 적시고 난 뒤 이 여정의 무드에 맞게 바로 뒤에 썬베드로 향했다.
해변 앞에 놓인 썬베드에 몸을 맡기고 누워 시원한 음료 한 잔을 손에 든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이어졌다. 계획도 목표도 없는 일정이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이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어찌 보면 숙소에서 침대에 누워 느긋하게 있는 거랑 뭐가 다른가 싶기도 하겠지만 바다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다시 파도 소리에 시선을 맡기는 단순한 반복 속에서 마음은 점점 가벼워진다.
이곳에서는 ‘무엇을 했는지’보다 ‘어떻게 쉬었는지’가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파도가 철썩이며 해변으로 밀려올 때마다 아이들은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물가를 따라 달렸다가, 다시 도망치기를 반복한다. 검은빛 모래 위에 남았던 발자국들은 오래 남아 있지 못했고, 파도 한 번에 흔적 없이 지워졌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이곳의 시간은 붙잡기 위해 아등바등하기보다는 자연스레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쪽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로운 분위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기분이 든다.
특별한 사건도 없었고, 예상치 못한 변수도 없었다. 모험과는 정반대에 놓인 ‘휴양’이라는 단어가 이곳만큼 잘 어울리는 장소도 드물 것 같았다. 긴장할 이유도, 대비할 필요도 없는 풍경과 상황 속에서 이 지역은 그저 안락한 휴식의 공간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조급함은 없었고, 마음이 앞서지 않았고, 시간 또한 서두르지 않았다.
이 평안한 시간을 지나며, 그리고 이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바다에 제대로 닿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멀리서 바라보던 바다가 아니라, 시간을 나란히 보내며 함께 머문 바다였다. 산토리니에서의 기억은 그렇게 화려한 장면보다 느긋한 호흡으로 남았고, 여행의 끝자락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조용히 정리되고 있었다.
마지막 7박의 일정을 마치며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산토리니를 떠나 아테네로 향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부단히 움직였다.
숙소 호스트에게 부탁해 공항까지 이동하는 차량을 부탁했고 처음 산토리니에 입도할 때의 고생을 다시 하고 싶진 않아 차량을 이용하기로 했다.
고생은 한 번이면 족하다. 그렇게 변수 없이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의 공항은 한산했고, 섬에서의 느린 시간은 그곳에 그대로 남겨둔 채였다. 짐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몸과 마음은 도착했을 때보다 분명 가벼워져 있었다.
짧은 비행 동안 창밖으로 보이던 바다는 점점 멀어졌고, 산토리니의 하얀 풍경도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쉬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충분히 쉬었고 충분히 머물렀다는 감각 덕분에 미련은 오래 남지 않았다. 어떤 장소는 오래 기억에 남기 위해서, 오히려 담담하게 떠나는 편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크크로폴리스를 향해 아테네로 넘어갔다.
아테네에 도착하자 공기의 결부터 달랐다. 섬의 바람 대신 도시의 움직임이 느껴졌고, 느슨했던 호흡은 자연스럽게 다시 일상의 리듬을 찾아가는 듯했다.
이제부터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산토리니에서의 느긋한 시간은 그렇게 하나의 장으로 정리되었고, 여행은 다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