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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수 Aug 01. 2024

[서평]<회심의 변질>알렌 크라이더

1. 들어가는 말

"2023년 1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12년 개신교인(만 19세 이상 기준) 비율이 22.5%인데 2022년 15.0%까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하락 추세라면 동일한 감소율을 적용했을 때 앞으로 10년 뒤인 2032년에는 개신교인 인구가 10.2%까지 떨어질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수로 보면 2022년 771만 명에서 2032년 521만 명까지 줄어들 것이라는 이야기이다"[1]

    교회와 그리스도교도인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자 복의 근원으로, 복의 통로로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 부름 받고 보냄 받은 것이 우리의 정체성과 소명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속에서 교회와 성도인 우리는 그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언론 보도나 SNS 등 안팎의 수많은 세평 등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 일반인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세상이 교회 및 교회 공동체에 기대하는 기대 수준이 높아 생기는 작용의 한 단면이라고 통칭할 수 있는 문제만은 아니라고 보인다.


    최근에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받았던 몇몇 사례를 살펴본다.


    서울 장위동의 사ㄹOO교회(정Oㅎ 목사)의 재개발을 둘러싼 소요와 소송 사태에서 보듯이 때로는 교회가 물질과 성공신화에 사로잡힌 모습들을 보였다. 서초동 사ㄹO교회(오Oㅎ 목사)가 교회 신축시 공용도로를 점용하였고 이는 명백한 불법이라는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는 등 교회가 그리스도의 정신보다 건물과 교세를 확장하는 등 성장에만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실수가 반복되는 상황이다. 더불어 명O교회(김Oㅎ/김Oㄴ 목사) 등 대형교회의 편법적 세습 등으로 인해 교회가 리더십을 발휘하기는커녕 세평에 오르내리는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위 사례는 이미 세상에 크게 알려진 대표적 사례들에 불과하다. 세상에 비친 교회 및 교회 공동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들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라고 비춰질 개연성이 크다. 그 결과가 교인수 감소 등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현상들은 결과적 산물일 뿐이다. 결국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낸 원인을 주목해야 한다. 그 원인을 찾아 근원적 변화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실천을 유도해야 하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가 아닐까 한다.


    알렌 크라이더는 ‘초기 기독교 역사연구를 통해 현대 문화 속에서 고찰해야 할 선교학적 과제에 공통분모가 있음을 인식’하고 이러한 역사 연구를 통해 ‘미래를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기를 기대했다. 그의 연구에 주요 동기를 제공하고 영감을 줬던 <기독교 역사>(버터필드)의 한 구절을 저자는 <회심의 변질> 서론에 인용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유사한 주제의식을 부여한다. 


‘1,500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마침내 어느 누구도 정부의 강요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노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또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법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거나, 또는 공직 진출을 위한 자격 획득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거나, 여론이 순응을 요구하기 때문에, 심지어 습관과 지적인 나태함으로 정해진 습관대로 교회에 다닌다고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 사실 때문에 1,500년 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현재가 가장 중요하고 가장 흥분되는 기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수많은 자극과 강요가 제시되었기 때문에, 20세기에 접어들어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감소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초기 기독교의 상황과 비슷한 형태로 돌아가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이 초기 기독교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에 대한 적절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2]

    알렌 크라이더는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몇몇 사례와 표면적인 상황 전환을 위한 단편적 처방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 근저에 흐르는 근원적 원인을 찾고자 애썼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회심’ 그 자체에 천착했고, 그 회심이 성경을 근간으로 하여 초대교회에서는 어떻게 이뤄졌으며(‘회심이란 무엇인가’) 그러했던 회심이 어떤 과정을 거쳐 변질되었는지(‘회심이 어떻게 변질되었는가’) 연대기적으로 고찰하였다. 아울러 ‘크리스텐덤(기독교 제국주의)의 특징과 내적 역동성을 고찰’하여 그 ‘다의적이고 모호’한 그 효과성 안에서 저자가 기술했듯이 ‘하지만 추하고 무가치한 크리스텐덤의 다른 잔해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독자로서 살펴봐야 하겠다.


2. 저자의 주요 논지


1) 회심에 대한 이해 


    저자가 해석하는 ‘회심’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의 글 앞부분에 기술된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복음서는 회심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며 “나를 따르라”[3]고 하셨을 때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선택해야만 했다. 즉 예수의 초청이 자신들의 삶에 가져올 총체적인 변화에 순복 하든지, 아니면 “근심하며 떠나가든지”[4]. 그것은 사람들의 신념belief, 소속belonging, 행동behavior에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예수는 비용과 보상에 대한 생생한 가르침을 통해 제자도로의 부르심을 강조한다.예, 요15:12-20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제자도로의 부르심은 입교 의식, 침례라는 단어로 표현되었으며, 선교사이자 신학자였던 바울에 의하면, 이것들은 비용죄로 얼룩진 삶의 방식의 죽음을 수반하는 회심과 보상“의의 종”이 되어 새로운 주인을 섬기는 거듭난 삶 – 롬6:18을 극적으로 각색한 것이었다. 회심은 곧 변화를 의미했다.[5]


    즉 저자는 ‘삶의 총체적 변화’로서의 회심을 강조하고 있다.

    회개, 회심을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특정한 시점을 계기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폭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전향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저자는 책에서 개인적 변화 차원에 국한하여 회심을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고 급진적이고 총체적 회심이라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즉 <초대교회의 회심을 돌아보다>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초기 기독교의 회심이 어떠했는지를 추적하여 살피고 있다.


    주목할 것은 저자가 기술했듯이 ‘멸시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 운동은 성장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던 312년, 로마 제국 인구의 약 10퍼센트가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이전 3세기 동안 교회는 통계상으로 매 10년마다 평균 40퍼센트씩 증가했다’(p.46)며 매우 이례적인 일로 보고한다.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유로 저자는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주변인이었지만, 그들의 삶은 호기심을 자아낼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매력적인 삶이 교회 성장의 열쇠였다. (중략) 케실리우스나 터툴리안은 모두 대중 전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으며, 이러한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략) 그리스도인들은 눈에 띌만한 복음전도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신자들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의 공동생활을 지시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했고 광범위하게 가르쳤지만, “수십 년 동안 복음 전도”를 실시한 적이 없었다.[6]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 매력적이어서,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했던 초기 교회의 모습과 신앙인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장면이다. 즉 이러한 매력적 삶을 살도록 하는 그 동인(動因)을 저자는 참된 회심 즉 신념(Belief)의 변화, 소속(Belonging)의 변화, 행동(Behavior)의 변화를 수반하는 회심을 통하고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연결 – 행동의 변화 – 교리 학습’의 과정을 순서대로 거친 다음에야 침례 예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교리학습 즉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까지 적게는 3년에서 길게는 5년까지 그의 ‘행동의 변화’가 수반될 때까지 예비자들을 교회에서 가르치고 검증했었던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실질적이고 총체적인 삶의 변화가 일어났고, 그러한 결과가 타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보인다.


2) 회심의 변질 역사적 고찰


    이러한 초기의 회심이, 콘스탄티노스의 기독교 공인을 거치고 기독교라는 종교가 주류로 올라서면서 초대교회의 철저한 회심이 어떤 식으로 축소되고 변질되어 갔는지 그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핍박을 받던 소수자의 종교가 비그리스도인을 억압하는 힘의 종교로 변화하는 모습 또한 조명된다. 황제가 믿는 종교, 사회적 명망을 보장받는 종교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면 오히려 상당한 이득을 얻게 되는 시대가 되는 과정을 해설한다.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회심은 단회적 신념의 변화가 아니라 신념(Belief), 소속(Belonging), 행동(Behavior) 즉 3B의 변화였음을 역설한다. 당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들은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뚜렷한 행동의 변화를 면밀하게 검증받아야 했다. 그 검증의 방법은 경제의 재분배, 물질의 나눔 등의 실천이었다. 즉 내면, 개인 윤리의 변화만이 아닌 삶의 총체적 변화를 요구했던 것이다. 군인 같은 직업을 가졌다면, 살인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거나 혹은 군대에서 나와서야 신앙 문답 예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초대교회는 박해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죽음과 멀리 있지 않았다. 자칫하면 공동체가 발각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옥석을 가려내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기도 했었던 것이다. 신앙을 가졌을 때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교육을 거쳐 침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비로소 회원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전통은 콘스탄티노스의 313년 밀라노 칙령을 기점으로 기독교가 합법화되고 특권적 지위를 부여받은 이후 변질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우선은 황제가 그의 인생 말년에 이르러서야 교회 전통에 의해 정해진 변화의 여정에 복종하는 등 지연된 회심이 그 첫 번째 변질이다. 회심에는 개인의 소속, 믿음, 행동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신앙문답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리 교육 또한 체계적으로 받지 않았으며, 독학에 따른 독자적 신앙관을 가졌던 것이 그다음이겠다. 아울러, 교회 공동체인 신자 그룹에 완전히 속해 있지도 않았다는 것 등이 변질의 시작을 알리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황제인 콘스탄티누스는 행동의 변화가 그의 생애 중에 수반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임종 직전의 회심 사건을, ‘미래의 교회에 불길한 전조가 되었다’고 평가한 저자의 진단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겠다. 잘못된 행동양식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 등이 그것이다. 


    더불어, 황제의 회심은 교회에 영속적 영향을 미쳤다. 거의 ‘국가교회화’되어 교회 회원이 되므로 얻게 되는 이득은 이후 교회로의 강력한 유인책으로 작용했다. 회원이 되면 공적의무의 면제, 부의 축적 가능, 승진의 보장, 사회적 명망 확보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후에는 강제력까지 동원되었다. 416년 오직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자만이 제국의 군인과 공무원이 될 수 있었고, 526년 유스티아누스는 모든 유아의 세례를 포함하여 회심을 강제화 하는 칙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강제력의 의한 회심을 유도한 것으로, 사실상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운동의 정당성으로서 지적했던 “하나님의 권능이 거의 불필요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해석하고 있다.(p92) 이는 결과적으로 이후의 크리스텐덤 즉 기독교 제국주의의 부적절한 위험 현상으로 귀결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에 나타나는 교부들도 초대교회가 회심의 요건으로 신념, 소속, 행동의 변화를 균형 있게 요구했던 것과 달리 부분적 개별 요소 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축소, 변질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4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은 신념을 강조하는 학습은 시켰으나, 행동과 소속감은 소홀히 다뤘고, 안디옥의 크리소스톰은 그간의 회심의 단계적 순서를 뒤바꾸었다. 즉 기존에는 행동의 변화를 검증하고 확인한 후에야 교리학습의 기회를 주고, 이후 비로소 침례를 행하여 회원으로 받아들였던 것에 비해 크리소스톰은 짧은 기간의 신앙문답과 침례식 거행, 이후에야 그들의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 힘쓰도록 했다(p.107)고 기술하고 있다. ‘크리소스톰은 교리보다는 선교와 목회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p.108). 이러한 저자의 진단을 오늘날의 교회 및 교회의 사역 전통과 비교해 볼 때 시사하는 바를 찾아볼 수 있겠다.


    어거스틴 또한 예비자를 회심으로 이끄는 기본적인 동기로 두려움을 강조했으며, 신앙문답 단계가 끝나면, 즉 ‘기독교 신앙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에 동의하기만 하면, 뒤이어 간단한 예식을 거행’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초대교회에서 행동의 변화를 3~5년 동안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매력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검증한 후에야 침례식을 거쳐 회원으로 받아들였던 점에 비추어, 너무나도 간소하고 전혀 행동의 변화를 확인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회원 자격을 부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과연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어거스틴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어거스틴은 행위의 결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결국 현재의 교회에서도 그 전통이 유지되고 있음은 깊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크리스텐덤의 선구자인 어거스틴 이후 교회와 세상은 구별될 수 없을 만큼 서로 뒤섞여 버렸다’(p134)는 저자의 일갈이 시리도록 아프다.

 

3) 크리스텐덤 및 특징


    크리스텐덤을 이해하기 위한 사례로 저자는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왕을 들었다.


     ‘5세기말 클로비스 왕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고, 침례를 받았으나 ‘왕은 자신의 갑옷을 벗기는 했지만 침례탕에서도 그는 끝까지 투구를 벗지 않았다’ (중략) 이후 3천 명의 병사들도 동시에 침례를 받았다. 이는 기독교가 서유럽을 정복하면서 일어나게 될 집단적 부족 침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p.170)


    이후, 기독교를 앞세운 군주들에 의해 약자들에게는 폭력과 협박으로, 강자들에게는 혼합주의로 접근하면서 변질되어 갔던 역사를 고찰한다. 결국 ‘회심은 “크리스텐덤”이라는 문명화로 귀결’(p175)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크리스텐덤은 정통 기독교적 신념을 가진 구조적 이데올로기를 제공한다. 사회의 정치, 제도, 가치, 운영지침 등의 형성에 관여되었다. 비공식적 관습 즉 혼합주의 특성을 보이며, 스토리텔링 위주의 종교적 교훈을 가르치는데 그치고, 성경적 교훈 및 삶에의 적용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약 1000년 경 이후, 크리스텐덤은… 유대인들을 제외하고는 중세 유럽의 모든 사람들을 다 포함하게 되었다’(p179) 즉 믿음이나 행동의 변화는 전혀 수반되지 않은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전부가 되었던 것이다. 유아세례가 관례화 되었고, 교회와 세상을 나누는 대결구도가 정착되었으며, 성직자가 고귀하게 되었다는 성직자주의로 평신도와 구별하였다. 선교는 강조되지 않고 회복, 갱신, 재복음화 등 목양하고 유지하는데 온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을 의미한다.(p.183)


    저자는 서구의 기독교화를 잘 보여주는 크리스텐덤 즉 기독교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현시점 즉 물질의 풍요, 생태 환경의 파괴, 관계의 위기, 극심한 빈부의 격차가 존재하는 현 상황에서 회심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교회의 삶과 선교는 어떠해야 하는지 질문한다. 



3. 논지의 검증


    교계 일단에서는 알렌 클라이더의 본 저서 내용과 관련하여 재세례파의 시각일 뿐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교부인 어거스틴에 대한 평가 및 영적 소수자의 기독교에서 제국의 기독교로의 변질로 해석하는 저자의 논지에 대한 불편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불편함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저자가 그의 논지대로 즉 회심은 변질되었고, 그 과정에서 크리스텐덤 현상이 있었다고 해석하는 주된 동인(動因)이 무엇인지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더구나 저자가 책의 서두에서 밝힌 신약에서의 회심에 대한 것 즉 ‘목숨을 건 총체적 변화로써의 회심’과 신념(Belief), 소속(Belonging), 행동(Behavior)의 변화를 수반하는 회심에 대한 해석은 그 근거가 명확하여 회심의 정의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


    아울러, 크리스텐덤으로의 변화과정을 역사적 고찰을 통해 논증하고 있는 저자의 각각의 주장과 근거들은, 서평자의 역량 범위 밖이라 논박하기 쉽지 않다. 다만, 주지하고자 하는 것은 저자의 주장보다는 의도에 있다고 하겠다. 각각의 사례 및 근거들의 해석을 통해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교회 및 이를 구성하고 있는 회원들에게 초대교회의 회심을 통해, 바른 신앙(신념), 바른 행동과 그리스도인으로서 매력적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는 주장으로 읽혔기에, 이의 적용을 위한 충분한 고민이 추가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4. 결론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회심’을 꼽는 것은 이견이 없다. 


     <회심의 변질>에서 알렌 크라이더는 ‘개인의 회심’ 보다는 ‘교회 공동체가 회심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과정을 관리해야 하는가’라는 관점으로 책을 기술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는 새로운 대상자에게 접근하여 접촉하고, 이후 3~5년여에 걸쳐 철저한 행동의 변화를 유도한 후, 검증된 인원에 한해서 침례를 베풀어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그 과정을 보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렇게 회심한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 즉 교회가 매력적으로 되어, 개인들이 점진적으로 교회로 유입되는 것을 담담히 조망하려 했다고 보인다. 이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독자들과 교회들에게 역사에서 배우는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회심의 대상을 개인적인 일 즉 개인적인 신앙생활 및 적용의 관점으로 기술한 책이 짐 월리스의 <회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짐 월리스는 오늘날 기독교가 말하는 회심 및 회개가 너무나도 개인화 및 내면적인 것으로 축소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회심이라는 것을 어딘가로부터(from) 어디인가로(to) 향하는 총체적인 과정 즉 회심을 회개로부터 방향성을 가진 긴 여정으로 정의한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새로운 시작은 회개와 함께 시작된다. 회개는 회심의 과정에서 첫 발걸음을 떼는 일이다. 회개는 과거를 정직하게 직면하고 그것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회심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완전히 돌아서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7]


    ‘회개로 시작한 회심은 신앙으로 나아간다. (중략) 회개가 어디인가로부터의 돌아섬이듯, 신앙은 어디인가를 향한 돌아섬이다. 회개는 우리의 죄를 보고 거기서 돌아서는 것이다. 신앙은 예수를 보고 그분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다. 회개와 신앙은 함께, 회심을 구성하는 두 움직임을 형성한다.’[8]


    즉 회심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verb)’라는 것이다. 돌아섬의 마음 자세 변화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과거와의 단절을 수반한 돌아섬과 또 다른 변화된 길로의 진전을 의미하고 있다. ‘회심은 언제나 실제적인 사안이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현실로부터 분리된 회심이라는 개념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9] 라는 저자의 주장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가 기도와 전도, 선교에 역대 가장 활발하게 힘을 쏟고 있다고 하는 현시대에서 그 활동에 반비례하는 성도들의 감소는 결코 쉬이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많은 교회들이 ‘선교하는 교회’를 넘어서서 ‘선교적 교회’가 되고자 하는 비전들을 세우고 다양한 사역들을 전개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만 이러한 사역들이 교회의 확장 및 사역의 기술적인 부분으로만 활용된다면, 알렌 클라이더가 그의 저서를 통해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는 내용을 주지해 봐야 할 것이다. 


    많은 교회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고 있다. 이러한 호소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 되돌아봐야 한다. 목회 기술적 구호를 넘어 실질적인 성도들의 행동의 변화를 수반한 교회 전체의 변화를 깊이 있게 모색하여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모습과 신앙관을 정립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교회는 교회대로 초대교회의 회심을 숙고해 봐야 할 것이고, 구성원들 또한 초대교인들의 그 목숨을 건 회심에 동참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과거로부터 배우는 그러한 교회들은 미래에 기여할 진실한 것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마지막 문장을 맺었다. 크리스텐덤을 우리 안에서 멈추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인 우리들 각각에게는 ‘하나님께서 바른 방향으로 회심시키시기를’ 기도한다. 끝.




[1] <한국교회 트렌드 2024> 목회데이터연구소 편 서문 중에서 인용

[2] <기독교 역사> 버터필드 저. 중에서, <회심의 변질> 25쪽 인용

[3] [막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4] [막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5] <회심의 변질> 1장 신약에서의 회심 중에서

[6] <회심의 변질> 51쪽 인용

[7] 짐 월리스의 <회심> 23쪽 인용

[8] 짐 월리스의 <회심> 36쪽 인용

[9] 짐 월리스의 <회심> 37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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