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분노유발 서적이다!
만약 16세기에 살고 있다면, 나 또한 칼뱅에게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살아있는 채로.
당시에 화형을 당한 카스텔리오처럼 나 또한 그(칼뱅)의 '예정설' 교리를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고, '유아세례'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신뢰하고, 신자만이 세례(침례)를 받을 수 있다는 신학을 따르기 때문이다.(칼뱅의 TULIP 교리 참조, 신학적 입장 차이는 별도의 기회에 논한다)
칼뱅이 신의 이름으로 행한 그의 전체주의적 정치행태는 자기 신념에 함몰된 광신자의 그것일 뿐이다. 이는 히틀러의 광기와 특성적으로 유사해 보이기까지 하다.
신정국가를 건설한 칼뱅의 독재와 폭력에 맞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용호하며 관용을 부르짖은 위대한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 카스텔리오의 감동적인 싸움을 20세기 최고의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킨다! (책 표지에 인쇄된 출판사의 소개문)
출판사는 칼뱅의 폭압적 독재에 맞선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전체주의의 원형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를 (제네바 시에서) 집행했던 칼뱅의 독재와 폭력에 집중하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분노의 탄식을 쏟아냈다.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 있을까? 신의 이름을 빙자한 칼뱅의 그 끝없는 권력욕과 인간성 말살의 참상은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라는 질문이 계속된다.
자기 자신의 의견 말고는 모든 의견을 억압하려는 광신주의에 대항하여, 이 세상의 모든 적대심을 해결할 수 있는 이념, 곧 관용의 이념이 세워진 것이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194쪽 재인용
관건은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은 이러한 현상이 비단 16세기에 국한되어 나타난 병리적 현상에 머물지 않는다는데에 있다. 잘못된 신념에 빠진 인간의 잘못된 믿음은 21세기의 이 땅 대한민국에서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텔리오가 그의 저서에서 했던 말을 재인용해 본다. 이 시대에도 벌어지고 있는 또 다른 박해와 관련하여 주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종교적인 박해는 이미 예언자 다니엘의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의 생활방식에서 공격할 만한 점을 찾아내지 못하자, 그의 적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신념을 공격해야겠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이와 똑같이 행동한다. 적이 도덕적인 행동에서 흠잡을 것이 없으면 그의 '학설'을 붙잡는다. 이것은 너무나도 교활한 행동이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231쪽 내용 재인용
위의 글은 1560년대 초반의 카스텔리오의 것이다. 마치 오늘날을 경험했던 것처럼 예언적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박해의 또 다른 행태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이는 서울신학대학교의 박영식 교수 해임의 건이 되겠다.(아래 학교 당국의 해임 결정에 대한 기사와 그에 따른 박영식 교수의 인터뷰 기사 참조) 그를 내치기 위해 교단은 카스텔리오의 표현처럼 '교활하게도' 그의 '신학적 입장'을 문제 삼았다. 마치 16세기에 칼뱅이 그러했던 것처럼 계획적이고 집요하게 좌표를 찍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죄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것을 정치적인 또는 행정적인 것으로 치리하는 우를 범했다. 칼뱅의 독재와 폭력의 양상이 오늘날에 다시 도드라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들 자체가 이미 아주 잔인한 짓이다. 그러나 그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비행을 그리스도의 옷자락으로 덮고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행했을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더욱더 무서운 죄를 범한다"
- 카스텔리오의 말,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202쪽 재인용
<믿음의 반대말은 회의懷疑가 아니라 확신>이라는 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잘못된 확신은 그 결과가 대부분 폭력적이다.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광신적 행위는 더욱더 폭압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몰염치하기까지 하다. 카스텔리오가 칼뱅을 염두에 두고 했다는 위의 말에 주의해 봐야 할 것이다.
'그는 어느 시대에나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은 어떤 종교적인 이상이나 세계관의 이상을 가지고 자신들의 폭력 행위를 장식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피는 모든 이념을 더럽히고, 폭력은 모든 사상을 타락시킬 뿐이다. 미겔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의 명이 아닌 장 칼뱅의 명령에 따라 불태워진 것이다. 모든 기독교 정신은 그런 행동을 통해서 지상에서 더럽혀졌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202쪽 재인용
"광신자 개개인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광신이라는 불치의 정신이 위험한 것이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231쪽 재인용
정신의 인간은 냉정하고 독선적이고 피에 굶주린 인간들에게만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고, 테러의 태도를 취하는 모든 이념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귀 기울일 때다.
바른 신앙관과 바른 세계관을 가지는 것, 이는 목숨만큼 소중하다.
- 필자의 독서 후 한 줄 감상
책을 읽고 보니 소위 칼뱅주의 5대 교리를 어떠한 관점에서 제정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겠다. 칼뱅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절대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밝은 양심으로 이 세상을 돌아다닐 권리가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주님의 공포'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겸손하게 몸을 굽히고 자신이 구원받을 길 없이 부족하다는 감정 속에서 부서져가야 할 존재인 것이다.'(74쪽 참고) 즉 인간은 오로지 계몽과 개조의 대상일 뿐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던 그의 인간관에 비춰봤을때, 개개인에게 자유의지를 허용한다는 것은 그들 칼뱅주의자들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다는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결코 동의될 수 없는 독선의 그것을.
시대는 발전한다. 사조思潮도 확장된다. 인간의 의지와 지식, 사유의 폭과 깊이 또한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음을 알고 반영되어야 한다. 역시 신학을 대하는 태도, 신조나 교리를 대하는 태도도 보완되고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16세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시대의 관점으로 성서를 해석하려 드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각과 지금의 시대정신을 고려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바른 신념, 바른 세계관은 바른 신앙관을 이루는 근간이다.
박해를 받던 그 시절에 카스텔리오는 그러한 야만성에서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로 '관용Toleranz' 즉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톨레랑스를 제안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기에 계신다면, 그분은 절대로 여러분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강조했었던 의미를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삶에 있어서 특히 신앙인의 삶에 있어서는 언제나 '예수께서 지금 이곳에 오신다면, 그는 어떻게 했을까?'를 상기해 봐야 할 것이다. 언제나 "예수께서 그렇게 가르치더냐?"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출발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