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텍트》(Arrival)을 중심으로...
“언어가 사고방식을 형성한다”는 가설(사피어-워프 가설, 혹은 언어 상대성 가설)을 바탕으로 극화한 영화 및 소설을 찾아달라는 주문에 아래와 같은 결과를 보여줍니다.
직접적으로 사피어-워프 가설을 드러낸 작품: 《Arrival》(컨택트, 2016), 《바벨-17》, 《The Languages of Pao》.
언어를 통한 통제와 사고 제한: 《1984》, 《Snow Crash》.
간접적으로 언어·기호와 사고의 관계를 탐구: 《Code 46》/ 예고편, 《Eternal Sunshine》 등.
물론 이 같은 주문을 하게 된 계기는 있었습니다. 새벽 잠결에 불현듯 떠오른 영화 <컨택트>의 문자 형상 때문이었습니다. 꿈결인지 생시인지 가늠 안 되는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헵타포드 B의 형상이 떠올랐고, 이내 그 영화 <컨택트>를 스트리밍 해서 다시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래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감흥이 다시 되살아 나더군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솔직히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듯싶습니다. 그래서 원작 소설을 사서 읽고서야 '어렴풋이' 의미를 파악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매우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물론 원작인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 또한 그렇습니다.
그 감상을... 옮겨봅니다.
'새로움'을 느끼게 했던 멋진 영화였기에 정리하고팠던 이유입니다.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이다”(비트겐슈타인)
“인간은 사용하는 언어가 사고와 세계 인식을 결정한다.”(사피어 & 워프)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하이데거)
-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와
- 드니 빌뇌브의 영화 <컨택트>
작가와 감독
테드 창의 1998년 중편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와 이를 바탕으로 드니 빌뇌브가 2016년에 제작한 영화 <컨택트>(Arrival)는 외계 언어와의 접촉이 인간의 인지 능력과 시간 인지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두 작품은 단순한 외계인 접촉 서사를 넘어, 언어학, 물리학, 그리고 존재론적 질문(자유 의지와 결정론)을 깊이 탐구하는 지적 과학 소설이랄 수 있겠다.
작품의 기본 구상은 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가 외계 종족인 헵타포드(Heptapods)의 비선형 문자 언어 ‘헵타포드 B’를 습득하면서 겪는 인지적 전환과, 그 결과로 미래를 인식하게 되는 경험을 중심에 둔다. 여기서 비교의 초점은 원작 소설이 보여주는 철학적 엄밀함과, 영화화 과정에서 더해진 극적 긴장과 정서적 공감의 차이에 맞추어진다.
소설은 독자에게 현재의 순간과 이미 정해진 미래를 “주의 깊게 관찰할 것”을 요구하는 반면, 영화는 고난을 알면서도 미래를 “선택”하는 인간의 주체성과 그로 인한 감정적 구원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매체적 차이는 포스트휴머니즘 시대에 인간과 기술(언어), 인간과 우주, 그리고 인간 본성의 진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관한 중요한 담론을 제시한다.
인공 언어와 서사 구조
영화와 소설 두 서사의 근간은 인공적으로 창조된 언어에 있으며, 특히 헵타포드 B의 독특한 구조가 영화와 소설에서 서사 전체의 기본 틀을 형성한다.
루이스 뱅크스 교수가 미군에 의해 고용되어 헵타포드와 처음 접촉하는 과정은 소설과 영화 모두에서 동일하게 진행된다. 헵타포드 B는 말하기 언어인 헵타포드 A와 달리, 잉크를 분사하여 원형 패턴으로 이루어진 기호를 기록하는 쓰기 언어이다. 이 기호들은 문장 전체가 단일한 비선형적 패턴으로 동시에 표현되며, 이는 헵타포드가 시간을 순환적이며 비순차적인 방식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을 반영한다.
사피어-워프 가설의 확장 (인식의 극단적 전환)
이 서사의 핵심 과학적 가정은 언어가 사고방식을 형성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을 극단적으로 해석한 워프주의의 적용이다. 루이스가 헵타포드 B에 숙달되면서 그녀는 인간의 선형적 시간 인지 방식에서 벗어나, 헵타포드처럼 시간을 동시적으로 인식하는 새로운 인지 능력으로 전환된다.
SF 장르에서 인공 언어의 구축은 인지 구조 변화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오랜 전통을 따르지만, <네 인생의 이야기>와 <컨텍트>는 이 개념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매체는 언어 학습 과정의 강조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소설은 헵타포드 B의 구조와 언어 습득의 인지적 메커니즘을 상세히 다루며 지적인 탐구를 심화하는 반면, 영화는 시간 제약상 이러한 언어학적 세부 사항을 대폭 생략하고, 루이스가 언어의 중요성을 군사 및 관객에게 시각적으로 반복해서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는 영화가 과학적 논리보다는 워프적 전환의 결과(시간 예지 효과)와 그에 따른 정서적 경험을 우선시했음을 알 수 있다.
오역의 유도와 그에 따른 낯설게 하기 장치
루이스 뱅크스가 언어의 오역 가능성과 문화적 함의를 설명할 때 인용하는 '캥거루(Kangaru)' 이야기는 두 매체 모두에 등장하는 중요한 교육적 장치이다.
[참고] 루이스 뱅크스는 외계 언어를 섣불리 해석할 경우 의도와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오역의 예시로 ‘캥거루 이야기’를 꺼낸다.
- 영국 탐험가가 호주 원주민에게 저 동물이 무엇이냐고 묻자,
- 원주민은 “캥거루(Kangaroo)”라고 대답했단다.
탐험가는 그것을 그 동물의 이름으로 알아듣고 기록했지만, 사실 원주민이 말한 뜻은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겠어(I don’t know / I don’t understand)”였다는 것.
즉, 탐험가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의사소통 불가의 표현을 ‘이 동물의 이름’으로 잘못 기록해 버렸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
이는 단순한 단어 대 단어의 번역을 넘어, 외계인의 세계관과 인식 체계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관객과 독자에게 설득하는 역할을 한다. 나아가, 외계 언어를 통해 인지적 진화를 경험하는 이 서사는, 인류의 선형적이고 인과론적인 현실 인식을 비판적으로 해체하는 '낯설게 하기 장치'로 기능한다. 외계와의 조우는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에서 인류가 미지(未知)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재검토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참고] 헵타포드의 인식체계, 구체적으로 그들의 언어 인식 체계를 이해해야만 영화와 소설의 맥락을 따라갈 수 있다.
1. 헵타포드 B의 특징
- 인간 언어는 시간적으로 순차적(linear)인 반면, 헵타포드 B는 동시적·순환적 구조를 가진다.
- 각 기호는 원형(둥근 원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작점과 끝점이 구분되지 않는다.
- 하나의 원 안에 수많은 곁가지 획과 곡선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 전체 모양이 하나의 문장, 혹은 복잡한 의미 단위를 나타낸다.
2. 해석 방식
(1) 부분 → 전체가 아닌, 전체 → 부분
인간 언어는 단어와 문장을 순서대로 읽어가지만, 헵타포드 B는 처음부터 문장의 전체 구조를 동시에 파악해야만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2) 획의 길이와 곡선의 변형
원형의 각 곡선, 점, 굵기의 차이는 어휘·문법적 요소를 반영한다. 즉, 직선적 ‘단어 나열’이 아니라, 기호의 배열과 변형이 곧 문법.
(3) 시간 인식과 연계
헵타포드 B를 익히면 사고방식 자체가 바뀌어, 시간을 선형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동시에 인식하게 된다. 영화에서 루이스 뱅크스가 미래를 ‘보는’ 것처럼 경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언어 습득이 곧 인식의 변화로 이어지는 영화적 장치이다.
3. 루이스 뱅크스의 해석 과정
초기에는 단순한 기호–대응 관계로 시작한다.
그러나 곧 기호 전체가 독립적인 완결 의미 단위라는 사실을 깨닫고, 언어적 선형성으로 접근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훈련 과정에서 루이스는 문장을 동시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미래의 기억을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경험하게 된다.
4. 영화적 함의
언어 상대성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을 극적으로 구현한 영화이다.
헵타포드 B는 단순히 번역 가능한 언어가 아니라, 사고와 시간 감각을 재구성하는 언어이다.
따라서 해석은 “읽기”라기보다 “통째로 경험하기”에 가깝다.
여기서 잠깐! 이 언어를 실제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거 아세요?
웃기는 일이지만 정말 있습니다...
여기(Reddit 글)를 참고해 보세요. 그렇다고 이 언어가 진짜라고 믿지는 마시고요.^^
결정론의 물리학: 페르마의 원리와 목적론
시간 여행이 아닌 무시간적 인지심리
<네 인생의 이야기>의 가장 독창적인 철학적 기여는 헵타포드의 시간 인지 방식을 일반적인 '시간 여행'이나 '예지력'의 범주로 국한하지 않고, '무시간적 물리학'에 기반한 '외계 심리학'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루이스 뱅크스가 습득하는 것은 시간을 따라 전진하거나 후퇴하는 능력이 아니라, 시간을 시작과 끝이 동시에 존재하는 하나의 4차원적 다양체(manifold)로 인식하는 '동시적 의식'이다.
인간과 헵타포드의 사고방식 차이: 인과론 vs. 목적론
원작에서 헵타포드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가장 엄밀하게 설명하는 핵심 개념은 페르마의 최소 시간 원리이다. 이 원리는 빛이 두 지점 사이를 이동할 때 가장 짧은 시간이 걸리는 경로를 따른다는 고전 물리학의 원칙이다.
이 원리에 대한 인간과 헵타포드의 해석 차이는 인과론과 목적론이라는 상반된 우주 인식 방식을 대변한다.
- 인간적 사고방식 (인과론): 인간은 빛이 물리 법칙(굴절률)에 따라 수동적으로 경로를 따라가며, 그 결과가 우연히 최소 시간 경로가 된다고 해석한다. 즉, 과정이 결과를 낳는다는 것.
- 헵타포드의 사고방식 (목적론): 헵타포드는 빛이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데 가장 빠른 경로를 택하려고 '의도'했다고 인식한다. 이는 결과(도착 지점)가 이미 정해져 있고, 과정은 그 결과를 달성하기 위한 최적의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의미.
이러한 목적론적 관점에서, 헵타포드들은 수동적인 자동인형이 아니라, 모든 사건을 동시에 경험하고 그 전체에 내재된 '목적'을 인식하며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그들의 선택은 결과를 초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전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동시에 역할을 수행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만들고, 그 차이로 인한 관객 개개인의 기존 보유 인식과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원작과 영화가 만들어 내고자 하는 세계인 것이다.
영화적 해석의 전환
영화에서는 원작에 표현된 이러한 페르마의 원리에 대한 심층적인 물리학적 논의를 대폭 축소했다. 이는 대중 영화의 서사적 효율성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복잡한 과학적 개념을 희생하는 대신, 시간 인지 변화의 결과를 루이스의 개인적인 고뇌와 정서적 수용의 영역으로 옮겨 놓아 정서적 공감대를 극대화했다. 영화의 비선형적 서사 구조는 루이스의 인지적 전환 과정을 시각적으로 체화하여 관객이 그녀의 시간 인지 방식에 동기화되는 효과를 낳았지만, 원작이 제시한 결정론적 세계관의 과학적 엄밀성이 약화된 것은 아쉬움 중의 하나이다.
존재론적 선택과 필연성: 자유 의지의 재정의
자유 의지와 필연
루이스 뱅크스는 미래를 아는 것이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미래를 실현하기 위한 '의무감'을 부여한다는 통찰을 제시한다. 소설의 핵심 주장은 인간이 단지 시간을 선형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자유 의지가 있다고 믿을 뿐, 사실은 숙명적으로 정해진 것 외의 다른 것을 할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루이스의 '선택'은 종국적인 결과를 '야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짜여진 '훨씬 더 큰 태피스트리(복잡하고 다채롭게 얽힌 것들의 총체)' 속에서 하나의 실타래 역할을 수행하며 필연성을 입증하는 행위로 재정의된다.
딸의 죽음 설정 변경의 주제적 함의
소설과 영화는 루이스의 딸, 한나의 죽음 설정에서 중대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두 매체가 결정론을 다루는 방식의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작에서 딸은 성인이 되어 '우발적인 암벽 등반 사고'로 사망한다. 이 사고는 표면적으로는 루이스가 개입하여 막을 수 있었을 것처럼 보이지만, 루이스는 비선형적 시간 속에서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이 설정은 사소해 보이는 선택조차도 이미 정해진 필연적 사건과 다를 바 없다는 원작의 엄격한 결정론적 논리를 유지한다.
반면, 영화는 한나(이름 Hannah는 앞뒤가 같은 회문 palindrome으로, 영화의 주제인 비선형적 시간 인식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선택된 것)의 사망 원인을 '치료 불가능한 희귀 암'으로 변경한다. 이 변경은 딸의 죽음이 '문자 그대로, 구체적으로 필연적'임을 관객에게 명확히 전달하여, 루이스의 고통스러운 '선택'을 감정적이고 숭고한 희생으로 포장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루이스가 비극을 알면서도 "모든 삶은 본질적으로 가치 있으며, 좋든 나쁘든 모든 경험은 의미 있기" 때문에 그 삶을 '선택'한다는 감정적 구원에 집중한다. 즉, 영화는 원작의 철학적 불편함을 해소하고, 대신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 긍정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결정론을 완화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 하겠다.(테드 창의 동양적 정서가 스며든 원작 대신에 서양인의 정서에 맞춰 수정을 가한 연출적 타협이라는 생각)
또한, 남편(영화에서는 이안, 원작에서는 게리)과의 이별 역시 영화에서는 루이스가 미래의 비극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남편이 떠난다고 명시적으로 설정하여 극적인 명료성을 높였다. 이는 원작에서의 모호성을 일부 완화한 부분이라 하겠다.
소설과 영화적 장치 사이의 선택
헵타포드 '도착' 방식의 차이
소설과 영화는 외계 존재와의 첫 접촉 방식에서 확연한 스케일의 차이를 보인다.
- 원작의 '체경(looking glasses)': 소설에서 헵타포드들은 지구 궤도에 머무르며 "체경"이라고 불리는 장치만을 지상 여러 곳에 보내 인간과 소통한다. 이 방식은 조용하고 학문적인 접근을 유도하며, '지식교환 가능성'에 대한 논의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 영화의 '12척 함선': 영화에서는 12척의 거대한 우주선이 지구 여러 지점에 직접 착륙한다. 이런 대규모 착륙은 즉각적으로 군사적 긴장감을 극대화하고, 영화의 제목(Arrival)에 걸맞은 글로벌 이벤트로서의 규모를 확보한다.
이러한 설정 변경은 서사적 초점을 개인적이거나 지식의 교환 등의 협력에서 전 지구적 위협과 군사적 대응으로 전환시키고, 장르적 요구에 부응하는 블록버스터의 형태를 취하기 위한 영화적 조치로 읽힌다.
- 외계인의 방문 목적 차이
원작에서의 침묵: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헵타포드들은 특별한 설명을 남기지 않고 지구를 떠난다. 독자는 루이스의 개인적인 인지적 깨달음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에서의 선물: <컨택트>에서는 헵타포드들이 인류가 3000년 후에 자신들을 도울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인류를 돕기 위해 왔다고 명시적으로 밝힌다. 그들이 인류에게 남긴 '무기(weapon)'는 사실 시간을 여는 '도구' 또는 '선물', 즉 그들의 비선형적 언어이다.
비선형 서사의 영화적 구현
<컨택트>는 비선형적 편집 기법을 사용하여 루이스의 시간 인지 전환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관객은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루이스와 그녀의 딸 한나의 상호작용 장면들을 '과거의 회상(플래시 백)'으로 당연히 가정하게 된다. 이는 인간이 시간을 선형적으로 인지하는 경향을 역이용한 영리한 활용이다. 영화는 이 장면들이 사실은 루이스가 헵타포드 B를 통해 얻은 '미래의 비전'임을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야 밝혀낸다. 이 비선형적 구성은 관객의 인지적 발견 과정을 루이스의 경험과 동기화시킴으로써, 시간과 기억에 대한 주제적 깊이를 더하고 감정적 몰입을 강화하는 효과를 노린다.
불편하게 느껴지는 영화적 의도: 백인주의적 세계관
(1) 외계 함선과의 군사적 갈등 증폭과 중국 장군 서브플롯
<컨택트>는 원작에 없는 중대한 정치적 서브플롯을 도입한다. 바로 중국 장군 샹 캐릭터와 그가 주도하는 국제적 갈등이다. 영화에서 주요 극적 위기는 헵타포드와의 불완전한 소통으로 인해 전 세계 강대국들이 외계인을 침략자로 오해하고 철수를 요구하며 핵 공격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다. 특히 샹 캐릭터는 이 갈등의 중심축을 형성하며, 루이스는 미래의 지식을 사용하여 그에게 중국어로 소통함으로써 글로벌 전쟁을 막는 영웅적인 역할을 수행한다.(어김없이 여기서도 소위 '슈퍼맨 히어로 서사'가 적용된다)
이러한 서브플롯은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첫째, 루이스의 언어 능력이 개인적인 깨달음을 넘어 '세계를 구하는' 정치적, 대외적 효용성을 갖게 된다는 것.
둘째, 루이스가 미래의 정보를 '선택적'으로 사용하여 갈등을 해소하는 행위는, 원작이 강조했던 '엄격한 결정론'의 구조를 위해하고, 극적인 긴장을 확보하고자 일부 타협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원작의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루이스는 미래를 바꿀 수 없지만, 영화는 그녀에게 순간적으로 '세계 평화를 가져오는 선택'을 수행하는 주체적 역할을 부여한 것 등은 영화적 서사에서 오점 중의 하나가 되겠다.
(2) 네오-오리엔탈리즘적 알레고리
일부 비평가들은 <컨택트>의 정치적 서브플롯과 헵타포드의 이미지를 '네오-오리엔탈리즘'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헵타포드 B가 먹물을 사용하여 원형으로 그려지는 '표의 문자적' 특성은 북미 대중문화 속에서 중국 문자에 대한 인식과 중첩되는 경향이 있음은 주목할만하다. 궁극적으로 미국인 주인공 루이스가 이 '표의문자 문명권'을 상징하는 듯한 존재(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하고, 그 지식을 통해 중국 장군과 소통하여 세계 평화를 이끌어내는 서사는, 문제는 중국 해결은 미국의 서사, 특히 근래의 트럼프 지지 세력들(미국 중심주의자들)에 의한 반중 정서를 일찌감치 그려냈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마치 언어학적 유토피아를 지정학적 알레고리로 치환한 것처럼 보이는 결과이다.
(3) 서구 중심주의의 한계
영화는 결론부에서 루이스가 이 언어를 통해 궁극적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할 "만국 공통어"에 대한 책을 출판하며, 언어 습득이 개인의 내적 변화를 넘어 명시적인 정치적 유토피아로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원작의 철학적 모호함 대신, 각색 과정에서 명확한 목적성과 헐리우드식 대중적 희망을 부여한 것이다.
정리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와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는 공통된 언어학적·철학적 주제를 공유하지만, 각 매체의 특성과 요구에 따라 메시지와 구조에서 중대한 변곡점을 만들어냈다.
원작은 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의 조용하고 지적인 내면 탐구를 통해 시간의 비선형성과 결정론이라는 냉정한 물리학적 사실을 심층적으로 파고든다. 소설의 결론은 독자에게, 비극적인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음을 알면서도 삶의 모든 순간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충실한 수행자의 태도를 요구한다. 이는 고통과 기쁨을 모두 포용하며, 자신의 삶을 헵타포드 B의 원형 문장처럼 한꺼번에 끌어안는 차분한 숙명론적 수용으로 읽힌다.
반면 영화는 원작의 지적인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글로벌 위협(열두 척의 함선과 중국 장군의 서브플롯)을 도입하고, 딸의 죽음을 ‘필연적 질병’으로 설정함으로써 서사적 긴장과 정서적 몰입을 극대화했다. 영화는 결정론적 운명을 인식하면서도, 삶의 모든 순간이 가치 있기에 기꺼이 비극을 ‘선택’하는 루이스의 주체적 행위를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컨택트〉는 복잡한 사피어–워프 가설과 페르마의 원리라는 과학적 토대를 대중적이고 효과적으로 풀어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소설이 지향했던 물리학적 엄밀성과 결정론에 대한 불편함이, 영화의 드라마적 구조와 희망을 주는 유토피아적 메시지를 위해 일부 희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소통의 실패가 어떻게 전 지구적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자발적 운명 선택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드라마로 완성된 것으로 감상할 수 있겠다.
멋진 영화와 원작 소설을 비교 감상하는 즐거움이 계속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