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om Next Door_영상미의 절정

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 영화화

by KEN
영화를 몰랐다.
더구나 이 영화가 2024년에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영화라는 것 또한 몰랐다.
스트리밍 플랫폼에 떠있는 수많은 영화 중에, 특별히 관심이 가는 썸네일 화면을 보고 무심히 눌렀을 뿐이다.

그렇게 영화가 진행되는데, 화면이 달랐다. 색감이 달랐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스토리보다는 화면과 음악이 눈과 귀에 들어왔다.

“어? 혹시 <녹터널 에니멀스>를 연출한 디자이너 톰 포드 감독작인가?” 싶었다.
카메라구도와 색감, 워킹에서 언뜻언뜻 톰 포드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찾아보니 다른 감독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영화의 스토리도 매력적이지만, 화면의 구도와 색감, 단 한 장면도 그냥 존재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려낸 것 같은 카메라 워킹과 배우들의 동선까지.
말 그대로 누구나 참고해봐야 할 영상 구현의 교과서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의 마지막, 눈 오는 장면에서 주인공 잉그리드(줄리앤 무어)의 독백이 나올 때
나는 “아!~~~” 하는 감탄사를 쏟아내고 말았다.
눈이 내린다.
우리가 한 번도 쓰지 않은 쓸쓸한 수영장 위로,
함께 걷다 네가 지쳐 누웠던 숲 위로,
네 딸과 내 위로,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그리곤 와이드 샷으로 바뀌며 장면은 컬러에서 흑백으로, 그리곤 음악과 함께 타이틀롤이 흐르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내가 감탄사를 쏟아냈던 건, 바로 그 장면이 주인공인 마사(틸다 스윈턴)가 요청해서 둘이 함께 봤던 영화 <The Dead>의 마지막 독백을 오마주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눈이 내린다.
마이클 퓨리가 잠든 쓸쓸한 교회 마당에도
온 우주를 지나 아스라이 내린다.
그들의 최후의 종말처럼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감동이 채 가시기 전에 영화에 대한 미학적 소고를 기록해 보기로 했다.



미학적 이별의 시학: 영화 <룸 넥스트 도어>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분위기 속에서 깊은 성찰을 그려내는 영화입니다. 줄리앤 무어와 틸다 스윈튼의 섬세한 연기를 바탕으로, 죽음과 존엄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삶의 긍정과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잘 몰랐는데 이 감독은 특히 그 특유의 미장센을 만들어 낸다고 평가되더군요.

역시 이 영화의 핵심 철학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그의 미장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듯합니다.

철저히 계산된 화면의 구도와 색감, 인물의 동선, 그리고 삽입된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과 관계의 변화를 서술하는 주요한 언어가 되었습니다.


색채

영화의 가장 두드러진 미학적 특징 중 하나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색채를 과감하게 활용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죽음과 상실은 무채색이나 차갑고 어두운 색상으로 표현되지만, 알모도바르는 정반대의 길을 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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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하고 때로는 현란하게 충돌하는 색채들은 단순히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영화의 근본적인 철학을 관통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암 투병과 존엄사라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인 마사에게 입혀진 밝고 경쾌한 색상은 죽음이 슬픔이나 좌절의 끝이 아님을 시각적으로 선언합니다. 이는 죽음을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하나의 선택으로 바라보며, 아름다운 삶을 존엄하게 마무리하는 마사의 의지를 색채로 표출한 것이 아닐까 상상하게 됩니다.


특히, 색상에 부여된 상징적 의미는 더욱 심층적인 느낌입니다. 영화의 비평가들은 초록색이 ‘선택의 자유(pro-choice)’를, 빨간색이 ‘생명 존중(pro-life)’을, 분홍색은 '죽음의 평화'를 상징한다고 분석하는데, 이 색채들은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과 관점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은유하는 것 같습니다. 마사와 잉그리드가 서로의 감정을 나누며 관계의 깊이가 더해질 때, 이들의 옷차림이나 주변 소품의 색채가 미묘하게 변화하는 것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윤리적 딜레마를 마주한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를 외부화하는 섬세한 장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색채 미학의 정점은 영화의 주요 모티프인 ‘분홍색 눈’에서도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순수함이나 차가움을 상징하는 흰 눈이 분홍색으로 표현되는 것은 죽음을 바라보는 감독의 전복적인 시선을 보여준 것이라고나 할까요? 이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맞이하는 죽음이 아니라, 삶의 아름다움과 존엄성을 마지막 순간까지 긍정하며 선택하는 평화로운 이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분홍색 눈은 차갑고 암울한 죽음의 이미지를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변모시키며, 아름다운 삶이기에 존엄하게 끝낼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영화의 근본적인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느낌입니다.(관련 영화 장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타이틀롤이 플레이될 때, 스틸 영상이 컬러에서 시안으로, 마젠타에서 레드로 다시 엘로우로 변화되어 가면서 페이드 아웃되는 것 또한 그의 색채를 통한 미학적 표현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자 하는 감독의 고집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Official Trailer 1 / Official Trailer 2 )

그렇다면, 이런 구도와 동선을 카메라로 잘 담아낸 인물은 또 어떤 사람일까요?


영상

<룸 넥스트 도어>는 시각적 화려함 뒤에 숨겨진 구조적 정교함을 통해 인물들의 내면적 거리와 관계의 변화를 표현합니다. 촬영감독 에두 그라우가 완성을 시킵니다. 치밀하게 계산된 화면 구도와 각도, 카메라워크와 인물들의 동선은 이들에게 있어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인물들의 심리 상태까지를 반영하는 중요한 서사적 기능을 구현해내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영화의 제목인 '옆방(The Room Next Door)'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 정서적 거리까지를 포함한 의미로 보이는 것이죠. 사실 영화에서는 잉그리드가 마사의 옆방이 아니라 아래층 방을 사용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만큼 죽음을 앞둔 타인의 고통에 아무리 친한 친구일지라도 온전히 함께하지 못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심리적 상태를 표현한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스크린샷 2025-09-24 오후 4.18.28.png Edward Hopper, People In The Sun, 1960,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US
스크린샷 2025-09-24 오후 5.05.01.png 영화에서의 장면

영화에서 인물들의 동선과 구도는 그들의 정서적 교감을 섬세하게 드러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태양 아래의 사람들>을 마사와 잉그리드가 직접 재현하는 장면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림 속 인물들처럼 선베드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과거와 현재를 공유하는 이들의 행동은 단순히 예술 작품에 대한 오마주를 넘어섭니다. 이는 죽음이라는 통제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 두 사람이 함께 삶을 재구성하고, 스스로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며,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연대감을 다지는 행위로 그려집니다.


이 씬은 영화를 멈추고 그 카메라의 구도와 색감을 한 없이 감상하게 했던, 철저하게 계획된 장면처럼 읽혀져, 감탄하면서 봤던 장면입니다. 이처럼 알모도바르는 시각적 재현을 통해 인물들의 관계를 심화시킬 뿐만이니라 그 관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탁월함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음악과 배경음을 포함한 사운드스케이프입니다.

이 영화에서 소리는 단순한 배경 음악의 역할을 넘어, 인물들의 내면을 탐구하고 감정적 서사를 심화시키는 핵심적인 도구로 활용됩니다.


음악

알모도바르 감독과 함께 한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의 음악은 영화의 드라마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줍니다.

사운드트랙에 포함된 곡들의 제목은 영화의 서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음악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적 로드맵의 일환임을 나타낸 것이기도 해 보입니다. 음악은 관객의 감정을 조율하고, 인물들의 내적 갈등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증폭시키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 Ingrid Doubts (잉그리드가 마사의 제안에 고뇌하는 장면): 갈등, 불안, 주저함의 심리적 긴장감 표현
- Death in My Hands (잉그리드가 마사의 약을 회수하는 장면): 압도적인 책임감과 두려움을 표현
- The Goodbye (마사와 잉그리드가 이별을 준비하는 장면): 슬픔, 애정, 고요한 평화로움과 교감
- Snow Is Falling Upon the Living and the Dead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잉그리드의 독백)
- Pink Colored Snowflakes (핑크색 눈이 내리는 상징적 순간): 죽음에 대한 전복적이고 따뜻한 시각, 생의 존엄성 표현


소리: 새소리

영화는 음악적 스코어 외에도 비음악적 음향을 극적으로 활용하여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하곤 합니다. 전직 종군기자였던 마사는 말년에 음악을 듣는 것을 너무 고통스러워합니다. 대신 새소리는 유일하게 감상 가능하다고 표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는 마사의 내면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를 암시합니다. 음악은 대체로 정교하게 짜인 서사, 즉 과거의 기억과 감정의 폭발을 상징하는 반면, 새소리는 인위적인 서사가 배제된, 자연의 즉흥적이고 순수한 소리입니다. 마사의 이러한 변화는 그녀가 과거의 트라우마와 싸움의 기억에서 벗어나, 순수한 현재의 순간 속에서 평화를 찾고자 하는 바람을 보여준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새소리는 여러 장면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됩니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신에서 다시 등장하며 마사의 딸인 미셸에게로 이어지는 장면을 연출합니다. 마사가 숲 속의 집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평온함을 느꼈던 그 장소에서, 미셸 또한 같은 소리를 듣는 것이죠. 이 장면은 죽은 마사와 살아있는 딸 미셸 사이에 새로운 감각적 연결고리를 형성합니다. 마사가 남긴 새소리의 유산은 딸에게 전달되어, 미셸이 엄마의 부재를 넘어 새로운 방식으로 엄마를 이해하고 애도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는 느낌입니다.


눈과 죽음

서두에 눈에 대한 인용과 그 감상적 느낌을 적었던 바가 있습니다.

이제는 그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영화의 미학적 세계는 두 가지 핵심 장면을 통해 그 의미를 절정에 이르게 합니다. 이는 알모도바르 감독의 시각적, 청각적 언어가 총체적으로 결합되는 순간이랄 수 있겠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 위에 내리는 눈 (제임스 조이스 인용의 반복)

영화는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소설 <죽은 사람들>(The Dead)에 등장하는 구절 "눈이 내린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를 세 번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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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소설 제임스 조이스의 <The Dead>와 영화의 원작 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

첫 번째 인용: 영화 초반, 마사의 입을 통해 낭독되는 이 구절은 죽음을 앞둔 한 개인의 사색과 자기 연민의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이는 죽음이 삶을 덮는 압도적인 운명처럼 느껴지는 마사의 초기 감정을 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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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인용: 이 부분은 인용이라기보다, 잉그리드와 마사가 밤을 새워 본 영화 중의 마지막 장면, 즉 영화 <The Dead>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독백을 마사가 따라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그려집니다. 원작 소설이 영화화된 실제 영화의 장면을 사용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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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의 The Dead 시청과 인용문 따라하는 장면

세 번째 인용: 영화의 마지막 신에서 잉그리드가 미셸을 바라보며 낭독하는 이 구절은 가장 개인적이고 감동적인 울림을 줍니다. 제가 멍하니 영화의 마지막을 기다리며 보다가 “아!”하고 장탄식을 했던 바로 그 장면입니다. 잉그리드는 이 구절에 "네가 지쳐 누워 있던 숲 위로, 네 딸과 내 위로, 산 자와 죽은 자 위로"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덧붙입니다. 이를 통해 그녀는 추상적인 문학적 묘사를, 마사가 남긴 유산인 딸과 그녀 자신을 포함하는 구체적인 애도의 메시지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 순간, 조이스의 구절은 마사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로 인해 남겨진 사람들의 관계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시적 장치가 됩니다. 물론 그 마지막 대사로 인해 나의 눈과 마음으로부터 촉촉함과 먹먹함의 감동을 이끌어 내기까지 했습니다.

스크린샷 2025-09-24 오후 5.08.27.png 마사의 딸과 잉그리드가 선베드에 누워 내리는 눈을 맞는 마지막 장면, 이 장면에서 잉그리드가 세 번째 인용을 합니다.
눈이 내린다.
우리가 한 번도 쓰지 않은 쓸쓸한 수영장 위로
함께 걷다, 네가 지쳐 누웠던 숲 위로
네 딸과 내 위로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영화의 마지막은 앞선 모든 미학적 요소와 주제 의식이 한데 모여 감정적 정점을 이룹니다. 마사의 죽음 이후, 잉그리드는 마사의 딸 미셸과 재회합니다. 미셸은 오랫동안 멀리했던 엄마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찾아왔고, 엄마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그 집에서 엄마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특히, 마사가 자주 앉았던 선베드에 미셸이 누워있는 모습은 단순한 행동의 모방이 아니라, 세대를 초월한 정서적 화해와 유산을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 아닐까 생각됩니다.

잉그리드와 미셸이 함께 기대서(선베드에 누워서)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마지막 신은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응축합니다. 이들은 마사를 잃은 슬픔을 공유하며, 눈이 내리는 초월적인 순간을 함께 맞이합니다. 잉그리드는 이 평화로운 순간에 마침내 조이스의 구절을 읊조립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죽음을 두려워했던 처음의 모습에서 벗어나, 이제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삶의 한 부분으로 온전히 받아들인 한 인간의 평온함과 숭고한 감정을 담고 있는 느낌입니다.




글쎄요. 제게 있어서 이 영화는 근래 봤던 영화 중에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영상미라고 뭉퉁그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구도와 색채, 동선이 거의 완벽에 가깝게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아무튼 제 기준의 랭킹으로는 탑 레벨에 위치한 영화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를 플레이하다가 어느 순간에 멈춰도, 말 그대로 화면이 작품이 되는 영화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몇 번 더 돌려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곱씹고 싶어지는 영화입니다.

얼른 글을 마무리하고, 영화를 다시 한번 더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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