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 _ 권지성 교수의 저서를 중심으로
권지성 교수의 논지는 앞서 살펴본 토마스 뢰머 교수의 『신의 발명(The Invention of God)』이 제시한 핵심 주장과는 분명히 다른 결을 지닌다. 이러한 학자들 간의 관점 차이를 발견하는 일은 독서의 또 다른 즐거움일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지적 지평이 한층 확장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래 글의 말미에는 두 학자의 학설을 비교하여 정리해 두었다.
제2성전기 구약성서의 지혜 담론과 토라: 통합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
요약
권지성 교수의 『Wisdom Discourse and Torah in Second Temple Judaism: Challenging the Integration Paradigm』은 제2성전기 유대 사상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지혜의 토라화”라는 통합 패러다임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한다. 그는 담론-비판적 방법론을 통해, 제2성전기의 텍스트와 사상이 하나의 통합체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복수의 담론이 상호작용하며 공존한 지적 생태계였음을 입증한다.
지혜가 율법에 종속된 부차적 전통이 아니라, 토라와 병존하며 상호 비판적 관계를 유지한 독립적 지적 전통임을 밝힘으로써, 제2성전기 유대교의 본질을 “통합의 역사”에서 “다원적 공존의 역사”로 재정의한다. 이는 고대 유대 지성사의 이해뿐 아니라, 성서 신학 전반의 해석 틀을 새롭게 갱신하는 결정적 전환점을 제시한다.
I. 통합 패러다임의 배경과 저자의 도전
(1) 전통적 합의의 정의: 지혜의 토라화 혹은 통합 패러다임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 지혜와 토라의 관계는 해당 시대의 지성 문화와 문헌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핵심 주제였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학계의 전통적 합의—즉 권지성 교수가 그의 저서 『Wisdom Discourse and Torah in Second Temple Judaism: Challenging the Integration Paradigm』에서 비판적으로 도전하는 견해—는 소위 통합 패러다임(Integration Paradigm) 또는 합류 모델(Confluence Model)로 불린다.
통합 패러다임은 지혜 문학이 본래 보편적이고 세속적인 사유의 산물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점차 종교적·신학적 형태로 발전하였고, 궁극적으로 제2성전기 동안 토라의 권위 있는 법적 전통 속에 흡수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지혜는 토라의 종교적·법적 체계 안으로 ‘토라화(Torahization)’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론적 설명은 특히 헬레니즘 시대를 배경으로, 지혜와 토라가 하나의 단일한 신적 권위 체계로 수렴되었다는 해석을 제시한다. 그 결과, 초기 유대교의 사유 구조가 ‘지혜에서 토라로’ 나아가는 목적론적 통일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이 모델의 핵심 근거로는 집회서(벤 시라서) 24장이 자주 인용된다. 해당 본문에서 레이디 지혜는 모세의 율법과 명시적으로 동일시되며, 이는 지혜 전통이 최종적으로 모세 율법이라는 정경적 권위 아래로 편입되었다는 증거로 간주되어 왔다.(주1) 따라서 전통적 학계는 이 구절을 토대로 지혜의 보편적 교훈이 이스라엘의 언약적 율법 체계에 종속되었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2) 핵심 논지: 지혜의 독립적 정체성과 제2성전기의 다원주의 재천명
저자는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통합 패러다임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연구는 제2성전기 유대교의 지혜 전통이 단순히 토라의 권위 아래 흡수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토라의 법적 전통과 구별되는 독립적 정체성과 신학적 지향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는 점을 논증한다.
권 교수는 제2성전기 유대 사상이 본질적으로 다원적(pluralistic)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당시의 지적 활동은 단일한 법적 정체성으로 통합된 것이 아니라, 문학적 형태와 신학적 방향에서 다양성과 상호 공존을 특징으로 하였다. 따라서 지혜 전통은 토라에 ‘흡수’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담론들이 비계층적 방식으로 병존하던 지적 환경 속에서 독자적 위상을 유지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그는 또한 전통적 통합 패러다임이 후대의 랍비적·정경적 관점—즉 토라가 유일하고 궁극적인 권위를 가진다는 관념—을 보다 유동적이었던 제2성전기의 실제 지적 상황에 소급 적용한 오해라고 비판한다. 이에 따라 권 교수는 당시의 유대 사상 세계를 언약, 창조, 묵시적 지식 등 다양한 권위의 원천들이 경쟁적으로 공존하던 복합적 지형으로 재해석한다. 이러한 다원주의적 틀은 초기 유대교 정체성이 단일한 ‘토라 중심주의’가 아니라, 복수의 신학적 전통이 상호 긴장 속에서 형성된 결과임을 드러낸다.
저자는 개념적 정밀화를 통해 ‘토라’의 의미적 범위를 재조정한다. 히브리어 토라(הָתּוֹרָה)는 정경적 오경 전체, 모세 율법의 법전적 내용, 혹은 단순히 ‘가르침’이나 ‘훈계’의 의미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용어이다. 권 교수는 후기 지혜 문헌들이 사용하는 토라 개념이 종종 법적 제도화가 아니라, 지혜적 교육 즉 삶의 지혜와 도덕적 통찰을 전하는 교훈적 전통을 가리킨다는 점을 밝혀냄으로써, 기존 학계의 개념 혼동을 바로잡는다.
II. 이론적 틀: 담론-비판적 분석의 정당성
(1) 담론-비판적 방법론의 채택과 적용
저자는 제2성전기 지혜 문헌과 토라 전통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담론-비판적 접근(Discourse-Critical Approach, DCA)을 채택한다. 그는 단순히 문학적 비교(인용, 암시, 반향)에 머물지 않고, 언어와 지식 체계가 특정 사회적 환경 속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의미를 생산하는가에 주목한다.
DCA는 세 가지 분석 수준을 통합한다.
- 미시적 수준에서는 텍스트 자체의 언어 자료를 면밀히 관찰하고,
- 중간 수준에서는 담론의 실천적 맥락(즉, 누가 어떤 목적과 권위로 말하는가)을 분석하며,
- 거시적 수준에서는 사회·권력 구조와의 상호작용을 탐색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지혜’와 ‘법’이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정체성과 권위, 그리고 지식 체계를 생산하고 규정하는 담론적 행위의 결과물임을 밝힌다. 즉, DCA는 제2성전기의 지혜와 토라를 기능적 담론의 수준에서 이해하게 함으로써, 두 전통을 형식적·정경적 틀로만 구분하던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한다.
(2) 정적 형식과 역동적 기능의 구별
저자의 담론-비판적 접근은 특히 전통적인 형식비평이 빠지기 쉬운 “정적 분류의 함정”을 비판한다. 기존 연구는 텍스트를 외형적 구조나 어휘만으로 구분하여, 율법적 표현이 포함된 문헌을 곧장 ‘토라 전통’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권 교수는 이러한 방법이 텍스트의 담론적 기능과 의도를 간과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대신, “정적 형식”이 아닌 “역동적 기능”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겉으로는 율법적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수행하는 역할이 지혜 담론의 맥락에 속한다면, 해당 텍스트는 여전히 지혜 전통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지혜’와 ‘토라’의 관계는 단순한 종속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제도적·지식적 공동체(필사자 학파, scribal schools) 간의 긴장과 경쟁 관계로 이해된다. 잠언, 욥기, 전도서, 집회서, 솔로몬의 지혜서, 바룩서, 그리고 쿰란의 지혜 문헌 등은 모두 고유한 교훈적·잠언적·우주론적 장르를 유지함으로써, 각 학파의 자율적 정체성과 담론적 독립성을 입증한다.
따라서 만일 지혜 전통이 토라의 법적 담론에 완전히 흡수되었다면, 별도의 지혜 필사자 집단이나 독립된 장르의 존속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반대로 지혜 장르의 지속적 생존은 곧 지혜 학파의 사회적·지적 자율성이 여전히 유효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된다.
(3) 분석 대상 텍스트의 범위와 구성
권지성 교수의 연구는 정경과 외경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텍스트를 대상으로 한다.
그의 주요 분석 대상은 다음과 같다.
- 정경 지혜 문헌: 잠언
- 정경 율법 문헌: 신명기
- 외경/경외경 문헌: 집회서(Ben Sira), 솔로몬의 지혜서, 바룩서
- 쿰란 공동체 문헌: 4QInstruction 등 지혜 관련 사본들
이 가운데 신명기는 언약적 법률 담론의 대표적 전형으로 분석되어, 지혜 텍스트들과의 비교를 위한 기준점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구조적 비교를 통해 권 교수는 각 텍스트가 법적 규범 체계에 동화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담론적 언어와 신학적 기능을 통해 자율적 정체성을 유지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III. 정경 핵심부의 분기: 신명기와 잠언의 재평가
(1) 지혜의 영향을 받은 율법 담론 ― ‘법의 지혜화’로서의 신명기
저자는 신명기를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 법률 제정과 율법주의적 담론의 대표적 전형으로 설정한다(신 4:1). 그는 신명기가 단순히 법적 규범의 집합이 아니라, 고대 근동 지혜 전통의 형식적·교육적 요소를 흡수하여 자신의 법적 권위를 강화한 텍스트라고 분석한다.
신명기의 교육 구조는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는 방식’이라는 세대 간 교훈 패턴을 차용하고 있으며, 이는 고대 지혜 문학의 전형적인 교육 형식과 일치한다. 다시 말해, 모세가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방식 자체가 지혜적 교육학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 교수는 이러한 유사성을 ‘지혜의 토라화’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그는 신명기가 지혜의 형식(교훈, 권면, 교육)을 전략적으로 빌려 언약적 순종을 강조하기 위해 활용했다고 주장한다. 즉, 신명기의 담론은 여전히 법적·국가주의적·언약 중심적 기능을 유지하며, 지혜 담론의 보편주의적 세계관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따라서 두 전통의 관계는 지혜가 법으로 흡수된 것이 아니라, 법이 지혜의 형식을 빌려온 ‘법의 지혜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지혜가 이미 독립적이고 영향력 있는 권위의 원천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신명기가 그 형식을 차용해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지혜 담론이 제2성전기의 지적 장(field) 안에서 실질적 경쟁력을 지닌 독자적 전통이었음을 입증한다.
(2) 잠언의 재독해 ― 보편주의 담론의 지속과 자율성
저자는 잠언을 재해석하며, 이 텍스트가 본질적으로 언약적·국가적 정체성이 아닌 보편적 창조 질서에 기반을 둔 지혜 전통임을 강조한다. 잠언의 신학은 야훼(YHWH)를 ‘이스라엘의 민족신’으로서가 아니라, 세상과 창조 전체를 주관하는 보편적 창조주로 제시한다. 이로써 잠언은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역사적·민족적 범주를 회피하며, 신명기적 언약 담론과 구별되는 보편주의적 신학을 견지한다.
이러한 차이는 신학적 토대에서도 명확하다.
신명기의 신학은 특정 역사적 사건(출애굽, 시내산 언약)에 뿌리를 둔 언약적 역사신학인 반면,
잠언은 창조 질서에 내재한 지혜와 윤리적 원리를 강조하는 창조 신학에 기반한다.
잠언에서 사용되는 토라라는 용어(예: 잠 1:8)는 오경 전체를 지칭하는 법률적 개념이 아니라, ‘부모의 가르침’이나 ‘교훈’이라는 비법적이고 교육적 의미로 사용된다. 이 용례는 잠언의 담론이 율법주의가 아닌 삶의 지혜와 윤리적 형성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잠언 28장과 같은 일부 후기 편집 단락에서는 율법적 색채가 부분적으로 감지되지만, 이는 후대의 편집적 영향일 뿐, 잠언 전체의 신학적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잠언의 핵심 담론 구조와 신학적 근거는 일관되게 보편적 지혜, 창조 질서, 그리고 실천적 도덕성에 뿌리를 두며, 제2성전기에도 지혜 전통의 자율적 정체성이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IV. 외경의 검증 사례: 집회서와 권위의 구축
(1) 동화론적 해석의 반박 ― 집회서 24장의 담론-비판적 재독해
집회서(벤 시라) 24장은 전통적으로 ‘지혜의 토라화’를 입증하는 핵심 본문으로 간주되어 왔다. 많은 학자들이 이 장을 근거로, 지혜가 최종적으로 모세 율법 안에 흡수되어 하나의 권위 체계로 통합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교수는 이러한 해석을 신학적 동화로 보는 전통적 입장을 비판하며, 본문의 동일시가 실질적 교의적 선언이 아니라 수사적 장치로 작동한다고 재해석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벤 시라는 헬레니즘 시대의 혼합주의와 지적 위협 속에서 율법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지혜의 언어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즉, ‘지혜를 토라에 결합하는 행위’는 율법의 신적 지위를 높이는 수사적·변증적 장치이지, 지혜 전통 자체의 종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집회서 24장은 율법 중심의 신학을 전제하는 문헌이 아니라, 오히려 지혜가 여전히 자율적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벤 시라가 율법의 언어를 빌려 쓰면서도 여전히 창조 질서와 인간의 인식에 대한 보편적 성찰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그가 지혜의 본질을 법적 규범으로 축소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권 교수는 따라서 “지혜는 여전히 인간 본성과 세계 질서에 대한 근원적 성찰의 언어로 남아 있으며, 단지 율법의 수사적 도구로 이용되었을 뿐”이라고 결론짓는다. 즉, 지혜의 토라화가 아니라, 율법의 지혜화가 더 정확한 방향성이라는 설명이다.
(2) 지혜 교육 전달과 현자의 권위적 매개 ― 체험과 성찰에 기반한 지혜 전달
저자는 벤 시라의 지혜관을 단순한 율법 해석의 산물이 아니라, ‘지혜 교육학’의 산물로 읽어낸다. 벤 시라는 51장에서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지혜를 개인적으로 탐구하고 획득한 체험적 지식으로 묘사한다. 그는 스스로를 신적 비밀을 이해하는 ‘지혜의 매개자’로 제시하며, 모세의 전승된 계시가 아닌 자기 체험과 학문적 성찰에 기반한 권위를 주장한다.
이러한 자기 서술은 지혜 담론이 관찰과 학습, 체험적 통찰을 통해 형성된 ‘지식의 자율 영역’임을 드러낸다. 지혜는 기록된 법전이나 제사장 계급의 권위에 종속되지 않으며, 오히려 현자라는 새로운 지적 주체에게 독자적 권위를 부여한다. 이는 제사장·예언자·율법학자와는 구별되는 지혜 교사의 사회적·직업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벤 시라의 현자상은 단순한 율법 해설자가 아니라, 관찰된 세계 질서와 경험적 지식을 해석하는 지혜의 전달자로 자리한다. 만약 지혜가 완전히 모세 율법에 동화되었다면, 이러한 현자의 존재 이유는 사라졌을 것이다. 율법의 보존과 해석은 이미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충분히 맡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한 결론을 도출한다. 집회서의 지혜 담론은 율법의 종속물이 아니라, 현자의 자율적 학문과 교육 행위를 정당화하는 지적 자기 방어의 형태이다. 다시 말해, 벤 시라는 지혜가 여전히 개인의 추구와 경험적 성찰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고유한 권위의 원천임을 강조함으로써, 지혜 교사의 사회적·지적 영역을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재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V. 헬레니즘 영역 확장: 솔로몬의 지혜와 바룩
(1) 솔로몬의 지혜 ― 보편적 우주론과 철학적 구별의 전략
저자는 솔로몬의 지혜서(Wis)를 제2성전기 유대 지혜 전통이 헬레니즘 철학적 세계관과 직접적으로 대결한 핵심 텍스트로 평가한다. 그는 이 문헌이 단순히 율법의 연장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철학적인 지혜 담론으로서의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권 교수는 Wis에 나타난 ‘법’(νόμος) 개념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두 가지 층위를 명확히 구분한다.
- νόμος (nomos): 우주 질서와 창조 원리를 포괄하는 보편적 법칙의 개념
- νόμοι (nomoi): 구체적 규정이나 국가적 율법을 가리키는 특정한 법령의 개념
그에 따르면 솔로몬의 지혜서는 후자의 협의적 의미가 아니라, 전자의 철학적·우주론적 νόμος(nomos)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즉, 이 책에서 ‘법’은 국가적·민족적 규범이 아니라 창조 질서에 생명과 지혜를 부여하는 보편적 원리로 기능한다.
권 교수는 이러한 구별을 통해, 솔로몬의 지혜서가 헬레니즘 시대의 혼합주의적 환경 속에서도 유대 지혜 전통의 독립성과 보편성을 적극적으로 유지했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헬레니즘 철학의 언어와 개념틀을 차용하면서도, 유대 지혜를 철학적 대화의 장 안에서 동등하거나 우월한 위치에 놓기 위한 전략적 담론을 전개한다.
이는 단순한 율법주의로의 수렴이 아니라, 유대 지혜의 철학화로 볼 수 있다. 권 교수는, 만약 저자가 ‘오직 토라(Sola Torah)’라는 배타적 언어로 대응했다면 헬레니즘 공론장에서 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반면 솔로몬의 지혜서는 보편적 지혜 담론의 틀 안에서 유대적 정체성을 재정의함으로써, 국가적 법률주의에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헬레니즘 세계에서 지적·종교적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솔로몬의 지혜서는 법의 철학적 전환을 통해 ‘지혜의 보편화’를 실현한 대표적 사례로, 지혜 담론의 자율적 진화를 증명한다.
(2) 바룩서 ― 율법과 지혜 장르의 상호작용과 공존
저자는 바룩서 역시 분석 대상으로 포함시킨다. 이 책은 예언적·법적 텍스트의 구조 안에 지혜 교훈 단락(3:9–4:4)이 삽입된 복합적 문헌으로, 여러 담론이 교차하는 장르적 실험의 장을 제공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바룩서의 편집 구조는 표면적으로는 율법적·예언적 틀을 유지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지혜적 언어와 사유 구조가 독립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지혜 단락(3:9–4:4)은 법적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여전히 지혜의 탐구·교훈·관찰이라는 본래의 담론적 기능을 보존한다.
즉, 서로 다른 장르가 결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혜의 구조적 자율성은 완전히 붕괴되지 않았다. 오히려 바룩서는 율법과 지혜가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담론적 균형을 형성한 사례로 읽힌다. 권 교수는 이를 “상호 형성적 담론”으로 규정하면서, 제2성전기의 사상 세계가 단일한 종합체가 아니라, 다양한 담론이 공존하며 긴장 속에서 상호 규정하는 역동적 지적 장(場)이었다고 해석한다.
VI. 쿰란과 그 너머의 다원주의
(1) 사해 두루마리 지혜 텍스트 ― 종파적 재배치와 지혜 담론의 지속성
저자는 사해 두루마리에 포함된 지혜 텍스트—특히 4Q525와 4Q185—를 분석하며, 이들이 표면적으로는 지혜와 율법의 결합을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지혜 담론의 독립성과 기능적 재배치를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이들 문헌은 지혜가 율법에 ‘봉사하는 형태’로 재배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권 교수의 담론-비판적 분석은 이 현상이 단순한 ‘토라화’가 아니라, 특정 공동체의 종파적 이데올로기를 위해 지혜가 전략적으로 재활용된 결과임을 보여준다.
그는 여기서 말하는 ‘봉사하는 율법’이 일반적인 모세 율법이 아니라, 쿰란의 야하드(Yahad) 공동체가 따랐던 극도로 제한적이고 종파적인 법 체계임을 강조한다. 즉, 지혜는 보편적 통합의 수단이 아니라, 묵시적 지식과 전문화된 해석을 통해 종파의 내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도구로 선택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중요한 점은, 쿰란 공동체가 매우 율법 중심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별도의 지혜 텍스트 장르가 공존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지혜가 완전히 율법 담론에 통합되었다면, 별도의 지혜 문헌이나 교훈 장르의 필요성은 사라졌을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텍스트의 존재는 지혜 전통이 구조적·장르적으로 자율성을 유지했음을 입증한다.
권 교수는 따라서, 쿰란에서 지혜가 법적 규범을 보완하고 확장하기 위한 독립적 지식 체계로 존속했다고 결론짓는다. 즉, 법의 우위가 강조된 환경에서도 지혜는 행동 지침과 인식의 근거를 제공하는 대체적 권위의 원천으로 기능했으며, 이는 지혜 전통의 지속성과 자율적 생명력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다.
(2) 필사자 생산의 광범위한 맥락 ― ‘재작성된 성서’와 담론의 상호 형성
권교수는 또한 제2성전기 필사자 전통의 폭넓은 맥락에서 재작성된 성서—예컨대 희년서(Jubilees)와 11QPsᵃ (시편 두루마리)—를 분석한다. 그는 이들 문헌에서 법적 자료가 단순히 지혜를 흡수한 것이 아니라, 지혜적·연대기적 담론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재구성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재작성은 단일한 목적이나 통합적 결과를 낳지 않는다. 오히려 법적, 지혜적, 묵시적 담론이 각자의 규범성과 담론적 기능을 유지한 채 서로를 수정·보완하며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즉, 제2성전기의 문헌 생산은 일방적 ‘통합’이 아니라, 상호 작용적 담론 형성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로써 권 교수는 제2성전기의 텍스트 문화가 법, 지혜, 묵시, 예언 등 다양한 지적 전통이 끊임없이 교차하고 긴장하면서 공존한 다층적 지성 체계였음을 확인한다. 각 담론은 다른 담론을 완전히 대체하거나 종속시키지 않고, 오히려 상호 교섭을 통해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종합 및 결론: 지적 다원주의의 재확인
(1) 연구 결과 종합 ― 제2성전기의 다원적 지적 생태계
저자의 담론-비판적 연구는 제2성전기가 흔히 “정경적 통일성과 토라 중심주의가 확립된 시기”로 이해되어 온 통념에 근본적인 도전장을 던진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 시기는 오히려 지속적인 지적 다원주의가 유지된 시대였다.
그는 지혜적, 율법적, 예언적 담론이 각기 자율적 형태와 신학적 지향성을 유지한 채 공존했으며, 어떤 단일 전통도 다른 전통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즉, 제2성전기의 유대 지성사는 통합의 역사라기보다 공존과 긴장의 역사였다. 이러한 결과는 페르시아 시대에서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는 전 기간 동안 유대 지적 활동이 형태·장르·신학적 초점의 다양성으로 정의되었음을 입증한다.
권 교수는 잠언, 신명기, 집회서, 솔로몬의 지혜, 바룩, 그리고 사해 두루마리의 지혜 텍스트를 폭넓게 분석하여, 지혜가 율법의 권위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담론으로서 지속적으로 기능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연구는 전통적 통합 패러다임과 대조되는 다음의 핵심 구분으로 요약된다.
이 비교는 지혜가 토라의 부속 개념으로 흡수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권위 담론들과 병렬적으로 작동하며 상호 교섭했던 지적 생태계의 일부였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2) 목적론적 통합 서사의 해체 ― 제2성전기 역사에 대한 재구성
권교수의 연구는 제2성전기 역사를 목적론적 서사로 이해하는 기존 학문적 관행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기존의 통합 패러다임은 후대의 정경적 통일성을 거꾸로 과거에 투사함으로써, 실제로는 복잡했던 역사적 현실을 단일화된 발전 서사로 단순화했다.
이에 대해 권 교수는 언어적 연관성과 신학적 동화를 구분한다. 즉, 서로 다른 전통들이 언어와 개념을 공유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신학적 종속이나 동일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그는 초기 유대교의 권위 개념이 단일한 원천(토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창조 질서(지혜), 언약 전통(토라), 개인적 경험과 통찰(현자)이라는 복수의 권위 원천으로부터 파생되었음을 밝힌다.
이 다원주의적 모델은 후기 유대교의 다양한 종파와 신학 운동(예: 쿰란, 묵시 사상, 헬레니즘 유대 철학)의 기원을 보다 정밀하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해석 틀을 제공한다. 특히 지혜 담론의 보편주의는 언약과 율법의 특수주의에 대한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대안적 응답으로 기능하며, 제2성전기 유대교를 단일한 종교 체계가 아닌 복합적이고 다성적인 지적 전통의 공존체로 재구성한다.
(3) 학문적 의의 ― 방법론적 혁신과 담론 분석의 전환점
권지성 교수의 연구는 성서학 분야에서 방법론적 혁신과 실증적 기여를 동시에 이룬 성과로 평가된다.
본 연구는 미국성서학회(SBL) 산하 AIL 시리즈로 출판되었으며,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학문적 의의를 지닌다.
1) 방법론적 기여:
기존의 문학비평이 텍스트 간 인용·형식의 표면적 유사성에 집중했던 반면, 권 교수는 담론의 기능적 역할과 사회적 맥락을 분석의 중심에 두었다. 이를 통해 각 텍스트가 수행하는 신학적·사회적 기능의 차이를 명확히 드러냈다.
2) 실질적 기여:
지혜 문헌, 율법 문헌, 외경, 사해 두루마리 등 방대한 1차 자료를 대상으로, “지혜의 토라화”라는 기존 학계의 대전제를 체계적으로 반박하며, 지혜 담론의 자율성과 지속성에 대한 실증적 근거를 제시했다.
3) 학문사적 전환점:
그의 연구는 성서 연구의 초점을 출처 비판 중심의 계층적 모델에서 담론 상호작용 중심의 네트워크적 모델로 이동시키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결론적으로, 권지성 교수의 작업은 제2성전기 유대교를 하나의 통합적 신학체계가 아닌, 서로 다른 권위 담론이 교차하고 협상하는 복합적 지적 생태계로 재정의한다. 이는 향후 학자들이 정경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담론의 전략적 상호작용과 복잡한 공존 구조를 탐구하도록 이끄는 중요한 패러다임 전환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참고) 비교 (권지성 vs. 토마스 뢰머)
권지성 교수와 토마스 뢰머 교수는 모두 성서 전통을 초월적 계시의 산물로 보지 않고,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인간적 담론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출발점을 갖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연구는 주제, 방법, 그리고 신학적 결론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두 학자는 모두 성서의 신학적 개념이 정적이거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대적 상황과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구성되고 발전한 결과물임을 전제한다. 권지성 교수는 제2성전기 유대교의 지적 전통을 대상으로, 지혜와 토라의 관계가 단일한 통합 과정이 아니라 상호 작용과 긴장 속에서 공존했다고 분석한다. 반면, 토마스 뢰머 교수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기원을 탐구하며, 야훼 신앙이 본래 지역신의 수준에서 출발하여 북왕국의 신 엘(El)과 융합되고, 이후 정치적·문헌적 통합 과정을 거쳐 유일신 개념으로 ‘발명’되었다고 주장한다.
권지성 교수의 연구는 제2성전기를 “정경적 통일의 시대”로 보는 기존 학계의 통념을 비판하며, 지혜적·율법적·예언적 담론이 서로를 흡수하지 않고 다원적 생태계 안에서 공존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지혜 전통이 토라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적 담론이 지혜의 교육적 형식을 빌려 자신의 권위를 강화했다고 보며, 이를 “법의 지혜화(sapientialization of law)”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그는 제2성전기의 지적 권위가 단일한 토라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창조 질서(지혜), 언약(토라), 그리고 인간의 체험(현자)이라는 복수의 원천에서 형성되었다고 결론짓는다.
이에 비해 토마스 뢰머 교수는 성서 신앙의 형성사를 거시적 종교사적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그는 야훼 신앙의 발전을 단순한 신학적 진화로 보지 않고, 정치적 통합과 문헌 편집의 결과로 형성된 역사적 산물로 이해한다. 뢰머에게 유일신 신앙은 신학적 필연이 아니라, 유배기와 포로기 이후 공동체가 정체성을 재구축하기 위해 선택한 문화적 구성물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 개념의 절대성과 초월성을 해체하고, 그 기원을 역사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재정의한다.
결과적으로, 두 학자는 모두 성서 전통의 목적론적 통일성을 거부하며, 역사 속에서 신앙이 어떻게 구성되고 변화했는지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권지성 교수는 제2성전기 내부의 담론적 다원성과 지식의 공존 구조를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 반면, 뢰머 교수는 신 개념 자체의 형성과 변형 과정을 통해 유일신 사상의 역사적 상대성을 드러낸다.
요컨대, 권지성 교수의 연구가 “통합의 해체를 통한 다원성의 복원”이라면, 토마스 뢰머 교수의 연구는 “신의 구성 과정을 통한 절대성의 해체”라 할 수 있다. 두 학자의 시도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성서 전통을 새롭게 열어 보이며, 신앙과 신학을 역사적 인간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다시 사유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맞닿아 있다.
참고도서
1. Wisdom Discourse and Torah in Second Temple Judaism: Challenging the Integration Paradigm. by JiSeong James Kwon, 2025
주1) 집회서의 '레이디 지혜' (Lady Wisdom)
집회서('벤 시라의 지혜서', Ecclesiasticus)에 나타나는 '레이디 지혜'는 구약성경 지혜 문학의 전통, 특히 잠언에 등장하는 지혜의 여성적 인격화를 계승하고 심화시킨 개념이다. 이 '레이디 지혜'는 단순히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여성적 특성을 부여받은 실체로 묘사되어 신적인 질서와 창조의 원리를 인간에게 중개하는 역할을 한다.
1. 레이디 지혜의 본질과 기원 (집회서 24장 중심)
집회서에서 레이디 지혜는 주로 24장에 나오는 '지혜의 자화자찬'이라는 장엄한 시를 통해 그 정체성을 드러낸다.
신적 기원: 지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에서 나왔다"(집회 24:3)고 말하며, 창조 이전에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혹은 발출된) 원초적인 존재임을 밝힌다. 이는 그녀가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존재하며, 창조 세계의 설계에 참여했음을 의미한다.
우주적 현존: 지혜는 높은 하늘에 거처를 정하고, 구름 기둥 위, 심연의 바닥까지 온 우주와 모든 민족을 돌아다니며 우주적 질서를 담당한다.
이스라엘과의 특별한 결합: 지혜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하느님의 명령으로 이스라엘에 거처를 정하고 야곱 안에서 상속을 받게 된다.
지혜 = 율법 (토라): 집회서는 지혜를 이스라엘의 율법(토라)과 동일시하는 독특한 신학적 발전을 이룬다(집회 24:23). 즉, 하느님의 우주적 지혜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세의 율법 안에 담겨 있고 그들의 삶의 방식이 되었음을 선언한다.
2. 여성적 묘사의 의미
'지혜'를 여성형 명사로 사용하고 인격화한 것은 단순히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서 '지혜'를 뜻하는 단어(히브리어: 호크마(חָכְמָה), 그리스어: 소피아(Σοφία))가 여성 명사라는 문법적 이유를 넘어선다.
생명의 원천: 지혜는 자신을 찾는 사람에게 어머니처럼 다가오고(집회 15:2), 그를 맞이하여 이해의 빵을 먹이고 지혜의 물을 마시게 하는 등 생명을 주고 양육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결혼적 관계: 그녀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새색시처럼 맞아들인다고 묘사되어, 인간이 지혜를 얻는 과정을 친밀하고 언약적인 결혼적 관계로 비유한다.
3. 후대 신학에 미친 영향
집회서의 레이디 지혜 개념은 이후 유대교와 기독교 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요한 복음의 '말씀(로고스)': 지혜가 하느님의 '입에서 나왔다'는 묘사는 신약성경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로고스, Logros)이 계셨으니...'라는 구절의 사상적 배경 중 하나로 간주된다. 지혜가 창조에 관여하고 하느님과 함께 했다는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리아와의 연관성: 가톨릭 교회 전통에서는 '지혜'의 속성이 종종 성모 마리아에게 적용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