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도서선정단 2차 대상 도서 독서 후기 및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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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하기 힘든 것중에 하나는,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환원해 버리는 태도입니다. 사람이든, 글이든, 혹은 상황이든, 드라마 속 서사이든지 간에 결국에는 화살의 방향을 언제나 남에게 돌려버리는 태도야말로 제가 가장 경계하는 것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무속적인 세계관에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문제의 원인을 철저히 외부로 이전시켜 버립니다. 실패도, 병도, 기대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일조차 외부 탓을 합니다. 물론 잘된 일 역시 스스로의 노력이나 선택, 판단이 아니라 외부 덕으로 설명한다는 겁니다. 묏자리를 잘 뒀다거나 액운을 방지하기 위해 부적을 쓰거나 굿을 했기 때문이라는 식입니다. 표피적으로는 '정성을 다한다'는 태도처럼 보이나 결국에는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모두 자기 바깥에서 찾으려는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있는 겁니다.
성해나의 단편집 『혼모노』는 조금 다른 결말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신선했고 좋았습니다.
1. 단편 <혼모노>
가령 동명 소설집에 실려있는 단편 <혼모노> 또한 종반까지는 비슷한 태도로 일관합니다. 이런 식이죠.
"동생도 알다시피 내가 성골은 아니잖아. 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온 것도 다 우리······.
다음 말은 안 들어도 알 것 같다. 다 우리 동생 덕이라고 하겠지. 당의 공천조차 받지 못했던 아웃사이더 시절부터 시장 선거를 앞둔 지금까지, 이 남자의 업적이라 할 만한 것에는 다 내 공이 들어가 있다. 군산에 있던 조상묘를 용인으로 옮기라 점지한 뒤 황보는 두 번 연속 고배를 마신 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벼락 맞은 대추나무에 부적을 그려 집에 걸어둔 뒤에는 당의 최고위원이 되었다. 그저 운이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행보였으니 그가 나를 신뢰하는 것 아니겠는가. 황보의 말을 기다린다. 그는 말한다.
할머니 덕이지." _ <혼모노> 132-133쪽
느끼셨겠지만, 여기서 주체를 황보로 두고 들여다보면... 그가 의원이 된 것은 모두 다 동생으로 불린 '나'와 황보가 언급한 '할머니' 덕이라는 겁니다. 이런 태도가 내게는 참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정형적인 '남 탓'에 해당합니다.
유사한 다른 장면도 살펴볼까요?
"기분이 좋을 때, 할멈은 내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문수야, 너 무형문화재 되고 싶지? 내가 그거 시켜줄까?
무형문화재는 모든 무당의 꿈이었다. 숭고하고 높은 자리. 비밀스러운 욕망. 흘려듣는 척했지만 할멈이 그렇게 은밀히 속삭일 때면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속물처럼 보일까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한 나의 속내를 할멈은 죄다 알아챘다. 내 지저분한 비밀까지도." _ <혼모노> 136쪽
무당인 문수는 결국 그의 개인적 희망마저, 접신한 할매에다가 두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보시죠.
"할멈과 신애기, 그들은 기질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나와는 다르게. 나는 할멈을 모시고 받들었는데 저것은 할멈과 동등하다. 참다못해 소리친다.
신령님, 말도 없이 떠난 것도 모자라 이젠 다른 무당에게 옮겨 붙어 사람 피 마르게 하십니까?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배신감에 치가 떨리지만 한편으론 겁이 나 우두망찰 한다. 저주를 퍼붓거나 악다구니를 뱉기에 할멈은 너무나 큰 존재다." _ <혼모노> 144쪽
나에게 닥친 불행도 결국에는 남 탓입니다. 할멈이 떠난 탓인 거죠. 나의 노력과 실력은 기실 쓸모없는 것으로 환원되어 버린 겁니다. 과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생활인이 가져야 할 태도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작가는 이점을 통쾌한 블랙코미디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작품의 결말을 통쾌하게 이끕니다.
그렇게 남 탓만 하던 자들에게, 아니 그런 태도로 일관하던 '나'와 지금껏 자신을 얽매였던 '할매'에게 통렬한 퍽큐를 날려버린 겁니다. 결말은 이렇습니다.
"구름도 다 사라진 땡볕 아래, 판수도 악사들도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중략)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장삼이 붉게 젖어든다. 무령을 흔든다. 잘랑거리는 무령 소리가 사방으로 퍼진다. 가볍고도 묵직하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작두에서 내려오지 않던 신애기가 아연실색하며 나가떨어진다. 그 애는 바닥에 주저앉아 휘둥그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황보와 그의 가족도 기도를 멈추고 나를 올려본다. 할멈도 이 장관을 다 지켜보고 있겠지.
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큭큭, 큭큭큭큭." _ <혼모노> 153-154쪽
이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가짜와 진짜의 경계를 그린 작품으로 해석하는 모양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에서 언급했듯 이 작품은 명백히 '주체인 나'와 '그 외 모든 기타'와의 대립으로 읽혔습니다.
남 탓만 하던, 그래서 그 모든 기대마저도 외부에 의존만 하던 나(문수)가 드디어 마지막에 날 선 작두에 올라, 선혈이 낭자한 발바닥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짜 신명'나는 칼춤을 추는 장면에서 저는 통쾌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스스로 자기가 된 것입니다. 할매도 장군도 아닌 오로지 나, 문수로 선 것입니다. 문수가 춤추고 문수가 피 흘리는 겁니다. 그러니 문수가 웃는 것입니다. 문수의 숨소리이고, 문수의 웃음인 것입니다. 큭큭, 큭큭큭큭.
2. 단편 <스무드>
사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이 작품, <혼모노>를 메인으로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정말 다루고 싶었던 것은 그 앞에 배치되어 있는 <스무드>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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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가끔씩 스타벅스의 에스프레소 프라푸치노를 즐겨 먹습니다. 대부분의 매장에서는 정식 메뉴로 올라있지는 않지만, 주문을 하면 만들어 줍니다. 얼음과 적당한 우유를 넣고 갈아 커피와 시럽을 넣어 만든 시원한 음료입니다.
프라푸치노, 일종의 스무디종류입니다. 얼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도 아닌 갈린 얼음 알갱이가 섞인 음료인 거죠.
성해나의 <스무드>를 읽으면서는 그런 촉감이었습니다. 물도 아니고, 얼음도 아닌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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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 듀이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아버지 용복은 한국과의 일말의 연도 남기지 않으려는 이주 1세대이고, 어머니는 한국인 입양아 출신입니다. 한국이라면 무조건 치를 떠는 아버지의 영향 속에서 듀이는 한국어도 배우지 못했고, 한국 음식을 먹어본 적도 없으며,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국을 잊고 무시하도록 길러진 듀이가, 제프의 작품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 작품을 지배하는 정서는 명확합니다. 이도 저도 아닌, 끝내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어정쩡함입니다. 외형은 한국인이지만, 의식의 근원까지 철저히 이방인인 미국인 듀이. 섞이지 못한 채 부유하는 프라푸치노의 얼음 알갱이 같은 이질감,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근원적인 외로움이 작품 전반을 감쌉니다.
"갤러리는 사적인 동시에 권위적이었다. 바닥에는 세라믹 타일이 아닌 따뜻한 색감의 원목이 깔려 있어 집안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전시 공간에 흔히 보이는 통창 대신 고측창이 나 있어 외부 시야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다. 리는 갤러리를 포함한 이 아파트의 모든 공간엔 입주민만 출입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즉 휘트니미술관을 모방한 이 위용 넘치는 공간을 누릴 수 있는 건 입주민뿐이라는 뜻이었는데, 그게 이상했다.
대단히 차별적이군. 한국은 이런 나라인가.
애초에 이토록 작은 나라에 번듯한 갤러리가 딸린 아파트가 있고, 그 갤러리에 큐레이터까지 상주해 있다는 것부터가 의아했으나 리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제프의 대표작인 「셀러브레이션」 연작과 함께 신작 「스무드」가 공개될 예정이었다. 「스무드」는 지름이 2미터에 달하는 구의 형태를 띤 작품이었다. 스테인리스스틸을 매끈하게 세공한 검은색의 구." _ <스무드> 70-71쪽
읽는 동안, 하나의 뚜렷한 질감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떠다니는 드론에 올라탄 채, 화자인 듀이를 높은 곳에서 관찰하고 있는 듯한 시선 말입니다. 서울의 최상급 주상복합 아파트, 각 동마다 암호로 통제되는 차단기가 내려진 게이티드 커뮤니티, 그리고 태극기 부대로 상징되는 일군의 사회적 장면들에 대해 독자인 저는 비교적 분명한 판단과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듀이의 시선을 통해 다시 목격되는 장면들은 쉽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끝내 익숙해질 수 없는 생경함 그 자체의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듀이의 이질적인 시선으로 인해 이 작품은 설명되기보다, 느껴집니다.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상태로, 끝내 입안에서 완전히 녹지 않고 뒤엉키는 얼음 알갱이와 같은 어찌할 수 없는 생경함 같은 느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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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인 2세이자, 세계적인 미술가 제프의 에이전트인 듀이. 그는 한국어에 서툴고, 한국 사회가 지닌 역사적·정치적 맥락에 거의 무지한 인물입니다. 작가는 이 듀이라는 인물을 통해 한국 사회를 ‘낯설게 보기’ 시작합니다. 다만 그것은 전통적인 리얼리즘 장르에서 흔히 사용되는 관찰자 시점과는 미묘하게 다른 방식입니다. 듀이의 시선은 단순한 관찰에 머물지 않고, 대상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적극적으로 왜곡하고 편집하는, 일종의 의도된 오독으로 작동합니다.
듀이는 이른바 ‘타이극기’ 집회의 참가자들, 그들의 거친 목소리와 분노, 낡은 군복과 원색의 깃발들 앞에서 정치적 공포나 역사적 비극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대신 그것을 “강렬한 에너지를 지닌 퍼포먼스”로, 혹은 제프가 흥미를 가질 법한 키치적 소재로, 더 나아가 하나의 페스티벌, 즉 축제의 장으로 매끄럽게 해석해 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 현대사가 품고 있는 전쟁과 분단, 이념 갈등의 비극성은 듀이의 ‘스무드한 시선’에 의해 철저히 표백되고, SNS에 올리기 적당한 스펙터클로 전락하고 맙니다.
듀이에게 시위대가 외치는 구호는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는 그 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신, 그들의 격앙된 표정과 몸짓을 예술적 퍼포먼스에 몰입한 상태, 더 나아가 접신과 유사한 트랜스 상태로 오독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은 극도의 블랙코미디로 치닫습니다. 사명감으로 무장한 채 거리로 나온 노인들의 ‘진심’, 다시 말해 그들 스스로는 의심하지 않는 혼모노(ほんもの, 本物)가, 듀이의 눈에는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にせもの, 니세모노, 偽物), 즉 하이퍼리얼리티 예술로 소비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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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에 직접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뒷이야기를 상상하게 됩니다.
듀이의 아버지는 아들이 어떻게든 ‘완벽한 미국인’이 되기를 바라며, 의도적으로 자신의 뿌리를 끊어내려 했던 인물입니다. 어린 시절 듀이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우연히 할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하고 반가워했을 때, 아버지는 그 사진을 빼앗아 그의 눈앞에서 갈가리 찢어버립니다. 그는 독한 결심으로 듀이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았고, 한국 음식조차 먹이지도 않았습니다. 기억과 언어, 감각의 차원에서까지 한국과의 연결을 차단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독자인 나는 한 세대 이전의 역사로 시선이 옮겨가게 됩니다. 어쩌면 듀이의 아버지는 이승만 정권과, 반민족·반민주적이었던 소위 그 '한국형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박정희 체제의 피해자였을지도 모릅니다. 철저히 한국과 절연한 채 살아온 그의 삶은, 단순한 개인적 선택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단절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그런 아버지 앞에, 박정희 얼굴이 새겨진 배지를 가슴에 달고 태극기와 성조기 배지를 선물로 건네는 아들이 서 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요. 한국과의 완전한 단절을 선택했던 아버지의 삶을 떠올려 보면, 그는 당시 정권으로부터 심각한 박해를 받았거나, 그것을 피해 자신의 정체성마저 숨긴 채 백인 사회 속으로 스스로를 희석시키려 했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의 그 무심한 행동으로 인해, 아직 아물지 않았던 상처 위에 또 다른 생체기를 내는 것이 아니었을지...
아버지는 이 시대에 확연한 프라푸치노에 들어있는 얼음알갱이 같은 존재임에 분명합니다. 그 사회에 녹아들기를 바라지만, 아직 완전히 녹지 못한 얼음알갱이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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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인 듀이는 또 어떨까요.
"당신에게 무척 고맙다고 전해달랍니다. 당신이 아주 소중하대요.
타인에게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가족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감정의 가느다란 실금이 점 차 갈라졌고 뜨거운 무언가가 그 바깥에서 울컥 밀려 들어오듯 온몸이 달아올랐다. 이건 민망함일까, 뭉클함일까.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_ <스무드> 101쪽
이런 감정은 디아스포라 이민자로 외롭게 살아오면서 듀이가 느껴보고자 원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듀이와 마찬가지로, 이 기묘한 '축제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사랑이 절실하고 뿌리내릴 사회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아버지는 내게 한국 얘기를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어요.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잘 몰라요. 아버지의 나라를 전혀 알지 못해요. 그래서 아버지와 나 사이에 갈등이 없는 거겠죠. 서로를 전혀 모르니까요. 알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목소리가 떨렸다. 빗장뼈 부근에 알 수 없는 통증이 일었다." _ <스무드> 104쪽
이 통증 덕에 이 '축제장'의 실체를 전혀 모르는 그는 중년 여성이 내미는 어떤 명부에 "한국에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한" 서명을 남기고, 가슴에 (누군지 모르는) 군복 입은 한국 대통령 배지를 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깃발을 흔들면서 축제를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성조기와 타이극기가 교차하는 그림이 새겨진 배지를 아버지 생일 선물로 챙기게까지 이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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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의 이 작품은 살짝, 다소 심층적인 사회적 이슈를 지나치게 가볍게 다룬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모순을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툭 던져 놓는 작가 특유의 서사 방식에는, 분명 또 다른 결의 충격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오롯이 작가가 얘기하고자 하는 그것을 느껴 누리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작가는 또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작품에는, 철저하게 글을 읽는 나는 배재되어 있습니다. 남의 시선만 있는 것이죠. 더구나 다소 엉뚱하게까지 보이는 듀이의 그 '아무것도 모르는' 관점만 보여질 따름입니다.
그러나 말이죠. 참 이상하게도 그 여백에는 분명하게 쓰여진 주장들이 보였습니다.
이 시대의 갈등과 내 안의 아픔들까지도 말입니다.
정리하면...
자, 이제 목표로 하는 '평가'라는 행위를 해야 할 시점입니다.
그렇다면 제 평가는요? 두두두두두두둥...
추천 의견입니다. 그것도 적극적인...
이런 작품은 시민들이 특정 모임들과 함께 읽고 토론을 유도하기에 정말 좋은 글들의 집합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번 작품집 때문이겠죠. 아무래도 성해나의 팬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참고]
◻︎ 선정을 위한 (임시) 도서평가점수 = 9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