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관한 4세기 어거스틴의 놀라운 관점

『고백록』, 제11권을 통해 기술한 '시간'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

by KEN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제11권에 나타난 시간과 영원에 관한 통찰



0.


깜짝 놀랄 만한 통찰입니다.

『고백록』 제11권을 읽다가 마치 숨이 멎는 듯한 지적 충격을 경험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경이로움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그이의 논술은 단순한 신학적 사색만이 아니라, 시간의 본질을 향해 던진 놀라운 철학적 사유였던겁니다.


4세기 말, 히포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가 집필한 『고백록』, 그 가운데서도 제11권은 시간에 대한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혁명적이고도 심오한 탐구 가운데 하나라고 감히 말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영원성과 피조물의 시간성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해명하기 위해, 단순히 당대의 신학적 도그마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론적 차원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고백,

"그러면 시간이란 도데체 무엇입니까? 만일 아무도 내게 묻지 않으면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묻는 자에게 설명하고자 하면 나는 알지 못합니다." (Quid est ergo tempus? Si nemo ex me quaerat, scio; si quaerenti explicare velim, nescio.) _(『고백록』제11권, 14장, 17절)


이 문장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간의 본질이 지닌 근본적 미스터리를 정확히 꿰뚫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려는 주제는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전개한 시간론입니다.

그의 사유는 표면적으로 보면 고대 신플라톤주의의 철학적 유산을 기독교적 창조론과 결합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20세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스티븐 호킹의 양자 우주론, 그리고 현대 인지신경과학이 탐구하는 시간의 문제와도 경이로울 만큼 닮아 있는 지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마음의 신장distentio animi’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경험하는 주관적 시간 의식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동시에 신의 영원한 현재성에 대한 그의 논의는,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블록 우주Block Universe’ 모델과도 깊은 공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1.

창조 이전의 '시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는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라고 우리에게 묻는 자들이 있습니다. _(제11권, 10장, 12절)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에 대한 탐구는 창세기 1장 1절에 대해 마니교도들이 던진 조롱 섞인 질문에 대한 응답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이전에는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이 질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시점에 창조를 결심했다면, 그것은 곧 신의 의지가 변화했다는 뜻이 되며, 그렇게 되면 신의 불변성이라는 전통적 신학 개념과 모순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질문 자체가 시간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즉, 창조 이전에도 시간이 동일하게 존재했다고 전제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창조 — Cum Tempore(시간과 함께) : 시간의 피조물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핵심적인 답변은 시간이 우주와 함께 창조되었다는 것creatio cum tempore이라는 명제입니다. 시간은 신의 본질에 속한 영원한 속성이 아니라, 변화하는 피조물의 운동과 더불어 존재하는 ‘창조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 이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라는 질문 자체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전before’이라는 개념 자체가 시간의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조 이전에는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며 이렇게 선언합니다.
“주께서 모든 시간을 창조하셨으므로, 시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시간이 존재할 수는 없다.”

시간조차도 당신께서 만드신 것이 오니 당신이 만드시기 이전에는 아무 시간도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 시간이 없었다면 어찌하여 그들이 묻기를 "당신이 그때(tunc)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라고 합니까? 왜냐하면 시간이 없을 때에 '그때'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_(제11권, 13장, 15절)

이 말은 곧 시간의 기원을 우주의 기원과 동일한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사유가 현대 우주론의 핵심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빅뱅 우주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공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배경이 아니라 우주 속 물질과 에너지에 의해 규정되는 동역학적 실체, 다시 말해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빅뱅이라는 사건은 단순히 공간 속에서 일어난 폭발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 자체가 함께 시작된 기점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물리학자들은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거의 의미 없는 질문으로 간주합니다. 그것은 마치 북극점에 서서 “어느 방향이 북쪽인가?”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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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시간 ‘안에in tempore’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앞선다precede’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앞섬’은 시간적인 선후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이며 인과적인 우선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 자체의 근원을 이루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사고 구조가 현대 물리학의 논리와도 일정한 유사성을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우주의 초기 상태를 규정하는 물리 법칙들이 시간의 흐름과 독립적으로 우주 전체의 구조를 규제한다고 이해합니다. 이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는 시간을 초월한 원리가 시간적 세계를 규정한다는 사유 구조를 이미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시간 — 존재론적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과연 실재하는 존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범주로 나누어 고찰하지만, 그 각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먼저 과거Past는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미래Future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현재Present입니다. 그러나 현재 역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찰나의 지점에 불과합니다. 만약 현재가 조금이라도 지속 시간을 가진다고 가정한다면, 그 지속성은 곧 다시 과거와 미래로 분할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아무것도 흘러 지나가지 않으면 과거의 시간이란 없을 것이요, 만일 아무것도 흘러오지 않으면 미래의 시간이 없을 것이며, 만일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는다면 현재라는 시간이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지금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지금 존재하지 않는데 이 두 가지 시간, 즉 과거와 미래가 어떻게 하여 있게 되는 것 입니까?" _ (제11권, 14장, 17절)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 현재를 “어떠한 부분으로도 나눌 수 없는 가장 작은 순간”으로 규정합니다. 이 순간은 지속성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마치 부피가 없는 기하학적 점과도 같은 것입니다.


결국 그는 매우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합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라기보다, 끊임없이 비존재로 사라져 가는 과정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비존재non-existence로 향하는 경향을 가짐으로써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양자화된 시간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찰나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분할 불가능한 찰나’에 대한 직관은 현대 물리학의 개념과 비교해 볼 때 매우 흥미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특히 양자 물리학에서 제시하는 플랑크 시간 개념과 나란히 놓고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현대 물리학은 시간을 무한히 나눌 수 있는 연속체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리적으로 의미 있는 최소 단위를 상정하려는 시도를 해 왔습니다. 그 결과 등장한 개념이 바로 플랑크 상수에 기반한 최소 시간 단위, 즉 플랑크 시간입니다.


플랑크 시간은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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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보다 더 짧은 영역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의 법칙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 영역에 들어가면 시공간은 더 이상 매끄러운 연속체로 이해되지 않고, 이른바 ‘양자 거품quantum foam’과 같은 상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철학적 평행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나눌 수 없는 현재’를 끝까지 추적하다가, 결국 시간 자체가 실체라기보다 사라짐 속에서만 성립하는 어떤 경계적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 역시 초미시적 세계에 이르렀을 때 시간의 고전적 정의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찰나’는 단순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최소 단위이자 동시에 시간이라는 관념이 해체되는 경계선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마음의 신장/확장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시간의 실체가 이렇게 희박하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시간을 ‘길다’거나 ‘짧다’고 말하며, 또 시간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선을 외부 세계의 운동, 예를 들어 천체의 공전이나 물체의 이동과 같은 현상에서 인간의 내면으로 과감히 돌립니다.


그리고 그는 매우 인상적인 정의를 제시합니다.
시간이란 “마음의 확장distentio animi이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 '현재'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경험하는 과거와 미래가 객관적인 외부 실재가 아니라, 사실은 현재의 마음속에서 작용하는 정신적 활동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시간 경험을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합니다. (제11권, 20장, 26절)


먼저 과거 일의 현재praesens de praeteritis입니다. 이것은 바로 기억memoria입니다. 이미 지나간 사건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인상이 현재의 마음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둘째는 현재 일의 현재praesens de praesentibus입니다. 이것은 직관 혹은 주의contuitus, attentio에 해당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마음이 직접 마주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작용입니다.


셋째는 미래 일의 현재praesens de futuris입니다. 이것은 기대exspectatio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일을 예상하며 기다리는 마음의 활동이 현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시를 낭송하는 장면을 예로 듭니다. 우리가 시의 한 구절을 읽고 있을 때, 마음은 동시에 세 가지 활동을 수행합니다. 이미 읽은 구절은 기억 속으로 들어가고, 지금 읽고 있는 구절에는 주의가 집중되며, 아직 읽지 않은 다음 구절은 기대 속에서 기다려집니다.


이 과정에서 마음은 일종의 ‘늘어남distentio, 확장, 신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늘어난 마음의 폭, 다시 말해 기억·주의·기대가 동시에 펼쳐지는 이 정신적 확장이 우리가 시간의 길이로 경험하고 측정하는 것이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입니다.


인지신경과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지각

현대 뇌과학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주관적 시간의 구성이 단순한 철학적 직관이 아니라, 실제 신경학적 메커니즘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뇌의 해마에는 이른바 ‘시간 세포’가 존재하는데, 이 세포들은 특정 사건의 순서와 간격을 기록하는 역할을 합니다. 동시에 전두엽은 미래의 행동을 계획하기 위해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적 시간 여행Mental Time Travel’을 수행합니다.


이를 아우구스티누스의 개념과 현대 신경과학의 대응 구조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기억 → 해마의 일화적 기억 형성과 회상 → 과거 경험의 현재적 재구성

- 주의 → 작업 기억과 중앙 집행 기능 → 현재 자극의 실시간 처리와 통합 - 기대 → 복측 전전두엽의 보상 체계와 미래 시뮬레이션 → 행동의 의도 설정과 결과 예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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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은 매우 선구적입니다. 그는 시간이 외부 사물의 운동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이해가 아니라, 영혼의 내적 활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곧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의 구분을 선언한 것과도 같습니다.


이 사유는 이후 앙리 베르그송의 지속durée 개념이나 후설의 내적 시간 의식 이론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더 나아가 물리적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인간의 마음이 스스로 시간을 구성해 낸다는 현대 인지과학의 핵심 통찰과도 놀라울 만큼 맞닿아 있습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고대 말기에 “시간은 세계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구조 속에서 생성된다”는 사실을 철학적으로 포착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4.

영원Aeternitas과 블록 우주Block Universe — 신의 관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원Eternity이란 단순히 끝없이 길게 이어지는 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원을 시간의 범주 자체를 완전히 넘어선 상태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동시에totum simul’ 존재하는 차원입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신의 영원에는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오늘’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면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건이 하나의 정지된 장면처럼 동시에 펼쳐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항상 현재이신 영원의 탁월성으로 모든 과거의 시간 전에도 계시고 모든 미래의 시간 후에도 계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모든 세월이 동시적으로 함께 있음은 그 세월이 항상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세월은 "하루의 날"(벧후 3:8)이지만 그날은 지나가는 매일이 아니요, 항상 '오늘'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영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라고 말씀하실 때 당신과 함께 있는 영원한 당신의 아들을 낳으신 것입니다.(히 1:3-5) 당신은 모든 시간을 창조하셨고 모든 시간을 앞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 어떤 시간도 있을 수 없습니다."
_ (제11권, 13장, 15절)


이러한 신학적 영원성 개념은 현대 물리학의 블록 우주Block Universe 이론과 매우 흥미로운 평행선을 이룹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공간과 분리된 독립적인 흐름이 아니라 4차원 시공간 연속체의 한 축에 해당합니다. 특히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말하는 ‘동시성의 상대성’은 우주 전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절대적인 ‘지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관찰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어떤 사건은 과거로 보일 수도 있고 미래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리학적 통찰에서 파생된 철학적 입장이 바로 영원주의Eternalism입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실재합니다. 마치 지도 위의 한 지점이 다른 지점보다 더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우주의 역사 속 모든 순간 역시 4차원 시공간 블록 안에 존재하는 특정 좌표로서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모든 시간을 동시에 바라본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설명은 현대 물리학의 언어로 표현할 때 4차원 시공간 블록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는 ‘외부 관찰자’의 시점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원과 시간의 존재론적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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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 “영원의 움직이는 모사moving image of eternity”라는 플라톤적 정의를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신의 영원한 계획과 인간의 시간적 자유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이 인간의 미래 행동을 시간 속에서 ‘미리’ 예측하여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영원의 차원에서 모든 시간을 동시에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그 순간을 영원 속에서 동시에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5.

스티븐 호킹의 무경계 가설과 아우구스티누스적 기원


현대 우주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이 가장 자주 인용되는 지점 가운데 하나는 우주의 시작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스티븐 호킹은 그의 저서 『시간의 역사』에서, 우주가 시간적 시작점을 갖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유한할 수 있다는 이른바 ‘무경계 가설No-boundary proposal’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허수 시간imaginary time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우주의 초기 상태를 매끄러운 반구 형태로 모델링함으로써, 전통적인 빅뱅 특이점의 문제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의 책 『시간의 역사』 "제8장 우주의 기원과 운명" 부분에서 설명, p156-181)


호킹은 이 가설이 “창조주의 자리를 없앴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와 물리학자들은 오히려 이 모델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 이해를 더욱 정교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주가 시간 ‘속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우주와 함께 창조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호킹의 모델에서 시공간이 우주의 내부적 속성으로 등장한다는 설명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한 사고 방식입니다.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창조란 단순히 어떤 최초의 한 순간을 만드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 전체를 영원으로부터 붙들고 있는 근거를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호킹이 말한 “우주는 그저 스스로 존재할 뿐It would just BE이라는 상태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각에서는 신의 영원한 창조 행위가 시공간 전체에 걸쳐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물리학적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6.

엔트로피, 시간의 화살, 그리고 타락한 본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시간에 묶여 살아가는 상태를 단순한 조건이 아니라 일종의 영적 분산이자 고통의 상태로 묘사합니다. 그의 유명한 고백, “나는 시간들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I am scattered in times라는 표현은, 인간의 자아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사이에서 끊임없이 분열되는 실존적 위기를 잘 보여 줍니다.


이러한 ‘흩어짐’의 경험은 현대 과학의 언어로 표현하면 엔트로피의 증가와 시간의 비가역적 화살이라는 개념과도 일정한 유사성을 보입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우주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그리고 가용한 에너지에서 폐기된 에너지로 끊임없이 한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비존재로 향하는 경향”이라고 표현한 것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가 궁극적으로 평형 상태, 즉 이른바 ‘열적 죽음thermal death’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 과정 속에서 유한한 피조물들이 점차 소멸해 가는 현실을 직관적으로 포착한 하나의 형이상학적 통찰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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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시간 속에서의 파편화된 인간 상태를 극복하는 길‘집중intentio’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흩어진 마음을 신의 영원한 현재에 고정함으로써, 인간은 시간에 끌려다니는 상태에서 벗어나 존재의 통합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현대 과학의 언어로 비유해 본다면, 흥미로운 해석이 가능합니다.

물리학에서는 우주 전체가 엔트로피 증가, 즉 무질서를 향해 진행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흐름 속에서도 생명이나 정신과 같은 국소적 체계는 오히려 질서를 창조하며 엔트로피를 낮추는 활동을 수행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집중’은 비가역적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의식이 질서를 형성하고 존재를 통합하는 역동적 행위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7.

정리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제11권은 단순한 고대 신학의 유산을 넘어, 시간을 바라보는 인류의 시각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하나의 패러다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시간을 단순히 외부 세계의 운동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간을 인간 주체의 내면 속으로 끌어들여 ‘심리적 시간’이라는 차원을 열어 놓았고, 동시에 시간을 우주의 내재적 속성으로 이해함으로써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시간이라는 환상을 해체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현대 물리학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 그리고 우주론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직관적으로 제기했던 문제들을 점차 수학적 언어로 번역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블록 우주 이론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영원한 현재’라는 사상을 기하학적 구조 속에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플랑크 시간은 그가 말한 ‘분할 불가능한 찰나’에 물리적 한계를 부여하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빅뱅 우주론“시간이 우주와 함께 창조되었다”는 그의 통찰을 현대 우주론의 표준 모델 속에서 다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시간을 단순히 측정 가능한 물리적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간을 인간 존재의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물리적 시간, 즉 크로노스Chronos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마음의 시간, 곧 카이로스Kairos를 만들어 내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영원Aeternitas을 갈망합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가 던진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설령 현대 물리학이 언젠가 시공간의 마지막 비밀을 완전히 밝혀낸다 하더라도, 그 시공간 속에서 의미를 찾고 영원을 동경하는 인간 정신의 확장은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가 닦아 놓은 그 ‘고백의 길’ 위에서 계속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https://brunch.co.kr/@xpert/722


[참고자료]

1.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선한용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9

2.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스티븐 호킹, 김동광 역, 까치, 2021

3. 나우: 시간의 물리학, 리처드 뮬러, 장종훈/강형구 역, 바다출판사, 2019

4.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카를로 로벨리, 김정훈 역, 쌤앤파커스, 2018

5.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카를로 로벨리, 김보희 역, 쌤앤파커스, 2021

6. 모든 순간의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 김현주 역, 쌤앤파커스, 2016

7.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이중원 역, 쌤앤파커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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