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실린 Byung Jun Moon님의 글 전문을 옮겨 적습니다.
내용에 인사이트가 매우 많아, 글 전문을 옮겨봅니다.
참 귀한 관점입니다.
함께 읽어보시고, 세상을 읽는 눈을 확장해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해석하는 행위는 관점의 발현이자 세계관의 작동입니다.
본인이 쓴 안경입니다.
그 안경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 관점, 즉 세계관을 매일매일 새롭게 닦고 더 정교하게 조율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올바르게 보려는' 노력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번에 인용한 글은, 그렇게 우리가 근동 국가들과 그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하나의 렌즈가 되어 줄 것입니다. 참고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래 글은 문병준(Byung Jun Moon)님의 페이스북 글 전문입니다.
전쟁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이기려는 전쟁과, 지지 않으려는 전쟁.
— 페르시아의 DNA, 카르발라의 신학, 그리고 지지 않으려는 전쟁의 논리
많은 사람들은 이 전쟁을 군사력으로 본다.
나는 조금 다르게 본다.
이기려는 전쟁은 빠르게 끝내야 한다. 지지 않으려는 전쟁은 오래 끌수록 유리하다. 현재 이란이 하고 있는 것은 두 번째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전부 설명이 안 된다.
전쟁 12일째. 미국과 서방을 중심으로 휴전 및 협상 타진이 있었지만, 이란이 거부했다. 수천 개의 표적이 타격받고, 이란의 군사 능력이 크게 약화됐다는 발표가 나온 상황에서. 지도부가 붕괴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이란은 협상 테이블에 앉지 않았다.
왜인가. 이것이 내가 이 글에서 답하려는 질문이다.
■ 이란은 아랍이 아니다
한국 언론은 중동을 하나의 덩어리로 본다. 이슬람 국가들, 아랍 세계, 반미 세력. 그 안에 이란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정적으로 틀린 지도다.
이란은 아랍 국가가 아니다.
언어가 다르다. 이란인들은 페르시아어를 쓴다. 아랍어와 전혀 다른 언어다. 민족의 주류는 페르시아인으로, 사우디·이집트·이라크의 아랍인들과 뿌리가 다르다. 그리고 역사 감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란인들이 말하는 '우리 역사'의 출발점은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1)다.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막 실험하던 시절, 페르시아는 이미 그리스 본토를 두 번 침공할 만한 제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인더스강, 서쪽으로는 에게해와 지중해 동부까지 뻗었던 제국. 지금의 이란 땅에 그 유적지 페르세폴리스가 서 있다.
여기서 하페즈2)를 이야기해야 한다.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하페즈는 이란 문화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많은 가정에서 꾸란 옆에 하페즈 시집이 놓여 있고,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시집을 펼쳐 나온 시구로 운명을 점치는 풍습도 지금까지 이어진다. 그 책이 페르시아어로 쓰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란인들에게 자존심이다.
이 지역에서 수십 년을 보내며 이란 정권에 비판적인 이란인들을 가끔 만났다. 그들도 하페즈의 시를 외웠고, 페르세폴리스를 이야기할 때 목소리가 달라졌다. 정권에 반감을 가진 이란인들도, 외부 세력이 '우리나라'를 공격한다는 장면 앞에서는 표정이 달라진다.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한다.' 이것은 이념이 아니라 문명적 반사 반응이다.
■ 미국을 보는 눈 — 아랍과 이란은 왜 다른가
아랍 걸프 왕정 국가들, 즉 사우디·UAE·카타르의 지도층은 미국과의 관계를 안보 거래로 인식한다. 거래는 조건이 바뀌면 재협상할 수 있다.
이 왕정 국가들에서는 반미 감정이 격렬하게 분출돼도 체제 전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부족 연대, 종교적 정당성, 석유 수익이 체제를 붙들었다. 그러나 공화정에서는 달랐다. 2011년 아랍의 봄을 보라.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예멘 — 흔들리거나 무너진 곳은 전부 공화정이었다. 왕정은 돈과 종교로 버텼고, 공화정은 공포에 의존하다가 그것이 흔들리는 순간 무너졌다.
이란의 미국 인식은 구조가 다르다. 여기에는 역사적 상처가 있다.
1953년이다. 미국 CIA와 영국 정보부는 이란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모사데크 총리를 쿠데타로 축출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란의 석유를 국유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쿠데타는 팔레비 국왕을 복귀시켰고, 그 이후 26년간 이어진 독재와 억압이 결국 1979년 이슬람 혁명 — 지금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탄생시킨 바로 그 혁명 — 을 낳았다.
이란인들에게 미국은 추상적인 제국주의가 아니다. 이란 국민들이 뽑은 총리를 1953년에 실제로 끌어내린 나라다. 그 기억은 세대를 넘어 전해진다.
역사의 가장 잔인한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미국이 지금 무너뜨리려는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체제는, 미국 CIA가 1953년 쿠데타로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미국은 자신이 심은 씨앗이 자라난 나무를 지금 베려하고 있다.
아랍의 반미는 감정이다. 이란의 반미는 역사다.
■ 카르발라 — 이것이 종교 의례로만 보이면 이 전쟁을 모르는 것이다
서기 680년, 지금의 이라크 카르발라3). 선지자 무함마드의 손자 후세인은 약 70여 명의 동료와 함께 수천 명의 군대에 맞섰다. 패배할 것을 알고 있었다. 물러설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고, 끝내 전사했다.
이 사건이 시아파 이슬람 신학의 핵심에 1,300년 넘게 박혀 있다.
매년 아슈라 기간이 되면 이란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온다.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렬이다. 검은 옷을 입고, 가슴을 치며, 거리를 행진한다. 화면으로만 보면 종교 의례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오래 일한 사람에게는 다른 무엇으로 읽힌다.
이것은 전술 교범이다.
강한 적 앞에서 숫자의 열세에 처하는 것. 그 상황에서도 싸우는 것. 필요하다면 목숨을 바치는 것. 이 서사가 이란 전사들의 심리 구조에 내장돼 있다.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청소년까지 동원된 대규모 희생적 돌격이 있었던 것은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정적인 역설이 여기서 나온다. 카르발라에서 후세인은 졌다. 그러나 그는 시아파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가 됐다. 이겼기 때문이 아니다. 불가능한 싸움을 끝까지 했기 때문이다. 이 신학 안에서는 패배 자체가 승리의 형태가 될 수 있다. 지도부가 제거되고 군사력이 소진돼도 싸움을 멈추지 않는 것 — 이란의 논리 안에서 이것은 비합리적 행동이 아니다.
수니파 중심의 많은 아랍 국가들에서는 이 심리적 구조가 이란만큼 정치적으로 중심적이지 않다. 이것이 이란과 아랍이 전쟁에 임하는 방식에서 근본적으로 갈리는 지점이다.
■ 이스라엘 — 아랍과 이란은 같은 편인가
아랍 세계와 이란이 이스라엘에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2020년 아브라함 협정으로 UAE, 바레인, 모로코, 수단이 이스라엘과 공식 국교를 맺었다. 사우디는 2023년 가자 전쟁 직전까지 정상화 협상을 진행했다. 이집트와 요르단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란의 위협이 커질수록 아랍 걸프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이해관계는 오히려 수렴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
이란은 다르다. 이란은 시아파 국가다. 중동의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 아랍 세계에서 이란은 늘 이방인이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한 적대는 그 간극을 메우는 외교 전략이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편'이라고 외침으로써 수니파 아랍 민중의 마음을 얻고, 그것을 지역 패권의 발판으로 삼았다. 동시에 핵을 가진 이스라엘은 이란에게 실존적 위협이다. 이란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이란 지도부는 그 방정식의 답을 역사에서 배웠다.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이 해체된 상태에서 전쟁을 맞은 이라크의 사담은 교수대에 섰다. 핵·생화학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한 카다피는 하수구에서 끌려 나와 사살됐다. 이란은 그 두 장면을 잊지 않았다.
이번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참전은 이란 정권에게 내부를 단속할 명분이 됐다. 내부의 반정부 감정이 외부의 적개심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정권 비판이 안보 문제로 바뀌는 순간, 반대 목소리는 설 자리를 잃는다.
■ 40년 제재가 만든 것, 그리고 이란 내부는 정말 조용한가
이란이 1979년 혁명 이후 실질적 고립 상태에 들어간 지 40년이 넘는다. 이것이 무엇을 만들었는가.
나는 이것을 '저항의 근육'이라고 부른다. 부품이 없으면 만들었다. 기술이 막히면 우회했다. 달러 결제가 안 되면 루피와 위안으로 바꿨다. 제재는 이란을 약화시켰다. 동시에 단련시켰다. 제재가 강화될수록 이란이 더 빨리 무너질 것이라는 서방의 기대는 번번이 빗나갔다.
그렇다면 이란 내부는 정말 조용한가.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2009년 녹색 운동, 2019년 가솔린 시위, 2022년 마흐사 아미니 사태. 이란 국민이 정권에 지쳐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조용해 보인다'는 것이 '저항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란 정권은 개전 직후 인터넷을 봉쇄했다. VPN 접속도 크게 제한됐다. 거리로 나오면 즉각 보복이 온다. 우리가 이란 내부를 보지 못하는 것은 창문이 닫혀있기 때문일 수 있다.
실제로 균열의 신호는 이미 나타났다.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걸프 국가들에 사과하며 공격 중단을 약속했지만, 혁명수비대는 멈추지 않았다. 이란 국회의장은 대통령 발언을 공개적으로 뒤집으며 "미군 기지를 수용하는 걸프 국가들은 공격 대상"이라고 선언했다. 대통령과 국회의장이 정반대 말을 하는 나라. 3월 3일에는 혁명수비대가 전국 31개 주 지방 사령부에 독자 지휘권을 부여했다. 사실상 게릴라전 체제로의 전환이다.
동시에, 외부의 공격이 가해질 때 내부 갈등을 접고 뭉치는 이란 특유의 반사 반응이 지금도 작동하고 있을 수 있다. 1980년 이라크의 침공이 시작되자, 혁명에 지쳐있던 이란인들이 대거 자원했다. '내 나라'가 공격받는다는 감각이 '내 정부'에 대한 반감을 압도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지금 단정할 수 없다. 그 불확실성 자체가 이 전쟁의 2막을 결정할 변수다.
■ 트럼프가 승리를 선언한다면
한 가지 시나리오를 빼놓을 수 없다. 트럼프가 어느 날 갑자기 일방적으로 승리를 선언하고 종전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는 이미 그런 방식에 익숙한 지도자다.
그 경우 단기적으로는 전쟁이 멈출 수 있다. 미국 국내 정치 시계를 멈추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선언이 이란 내부에서 무엇을 만들어낼지는 다른 문제다. 외부의 군사적 압박이 사라지는 순간, 지금까지 봉쇄됐던 이란 내부의 에너지가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모른다.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 내부의 적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40년 넘게 쌓인 이란 국민의 불만은 전쟁이 끝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이 끝나는 순간, 그 불만이 다시 정권을 향할 수 있다.
트럼프의 승리 선언이 이란 체제의 가장 큰 위기를 만들 수도 있다는 역설. 이 지역에서는 이런 아이러니가 낯설지 않다.
■ 두 개의 시계
이란은 아랍이 아니다. 페르시아 3,000년의 자존심을 가진 나라다. 하페즈의 시집이 경전처럼 살아있는 나라다. 1953년 미국 CIA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총리를 쿠데타로 끌어내렸다는 기억을 세대를 넘어 간직한 나라다. 그 쿠데타가 1979년 혁명을 낳았고, 그 혁명이 지금 미국이 무너뜨리려는 체제를 만들었다.4) 미국은 자신이 심은 나무를 지금 베고 있다.
카르발라의 신학이 전술 교범으로 작동하는 나라다. 40년의 제재가 저항의 근육을 만든 나라다. 사담과 카다피의 최후를 기억하며 핵을 놓지 않는 나라다. 이스라엘의 참전이 오히려 내부를 단속하는 명분이 되는 나라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이기려 하지 않는 나라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다. 이란은 그 나라를 상대로 가장 오래 버티는 법을 체득해 온 나라다. 군사 시계에서는 미국이 앞서 있다. 정치 시계에서는 이란이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이란의 정치 시계에는 선거도, 여론도, 의회도 없다. 미국의 정치 시계만 빠르게 돌아간다.
1953년 쿠데타는 26년이 지나 1979년 혁명으로 돌아왔다. 역사는 늘 예상보다 늦게, 더 복잡한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결국 어느 쪽의 정치적 의지가 먼저 꺾이느냐가 이 전쟁의 마지막 장을 쓴다.
그것이 내가 36년 동안 이 지역에서 배운, 단 하나의 진실이다.
[오만 무산담 가는 길에 찍은 호르무즈 해협 ]
주) 역주를 해설을 더해 덧붙입니다.
1)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id Empire, 기원전 550년~기원전 330년)
아케메네스 왕조는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진 민족들을 하나의 행정 체계 안에서 공존시킨 '관용과 통합'의 대제국이었습니다.
① 제국의 서막 — 키루스 2세
아케메네스 왕조의 건국자 키루스 대왕은 인류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복자 중 한 명입니다.
- 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한 뒤, 바빌론 유수 상태였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습니다.
- 인류 최초의 '인권 선언문'이라 불리는 키루스 원통Cyrus Cylinder에는 정복지의 종교와 풍습을 존중하겠다는 그의 통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 Pax Persica — 피정복민의 문화를 말살하지 않고 포용함으로써 제국의 초기 안정성을 확보했습니다.
② 제국의 완성 — 다리우스 1세
다리우스 1세는 제국을 거대한 기계처럼 정교하게 조직한 '행정의 천재'였습니다.
- 제국을 20여 개의 주(사트라피, Satrapy)로 나누고 총독(Satrap)을 파견했습니다. 이를 감시하기 위해 '왕의 눈과 귀'라 불리는 감찰관을 두어 중앙 집권화를 꾀했습니다.
- 수사에서 사르디스까지 약 2,700km에 달하는 도로망을 구축하고 역참제를 시행했습니다. 당시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역사>에서) "눈이나 비, 더위나 밤의 어둠도 이 전령들의 임무 수행을 막지 못한다"고 감탄했습니다.
- 베히스툰 비문 — 쐐기문자 해독의 결정적 열쇠가 된 비문으로, 다리우스의 정통성과 업적을 3개 국어(엘람어, 바빌로니아어, 고대 페르시아어)로 기록했습니다.
③ 통치 철학과 문화적 유산
종교적 특징 — 조로아스터교
- 아후라 마즈다: '지혜의 주'를 숭배하며 선과 악의 대결 구도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를 타 민족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유일신 사상과 내세관은 훗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술과 건축 — 페르세폴리스
- 이집트, 바빌로니아, 그리스의 양식이 혼합된 화려한 궁전들은 제국의 다문화성을 상징합니다. 특히 만국의 문은 전 세계 사절단이 왕을 배알하러 왔던 제국의 위용을 보여줍니다.
④ 쇠퇴와 멸망 — 알렉산드로스의 등장
-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의 원정이 마라톤 전투, 살라미스 해전 등에서 패배하며 제국의 팽창이 멈췄습니다.
- 최후: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마지막 왕 다리우스 3세가 패배하며 제국은 막을 내립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본인조차 페르시아의 행정 시스템과 복식을 채택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은 압도적이었습니다.
2) 이란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혼의 시인' 하페즈(Hafez, 1315~1390경)에 대한 정리
페르시아어권에서 하페즈는 단순한 시인만은 아닙니다. 모든 가정에 '쿠란'과 함께 그의 시집이 놓여 있을 정도로, 그는 현재까지도 이란인의 삶과 정신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자의 혀(Lisan al-Ghaib)'로 불립니다.
① 생애와 시대적 배경 — 쉬라즈의 보석
- 본명: 샴스 웃딘 무함마드(Shams-ud-Din Muhammad).
- 칭호 '하페즈': '암기하는 자'라는 뜻으로, 이슬람 경전인 쿠란 전체를 완벽히 암기했기에 얻은 필명입니다.
- 활동지: 평생을 이란의 문화 도시. 쉬라즈(Shiraz)에서 보냈습니다.
- 시대 상황: 몽골 제국의 침입 이후 혼란스러운 무자파르 왕조 시대에 살았습니다. 권력의 무상함과 종교적 위선을 목격하며 자란 배경이 그의 시적 냉소와 초월적 시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② 하페즈 문학의 정수 — 《디반(Divan)》
그의 시를 모은 시집인 《디반-에 하페즈》는 약 500여 편의 가잘(Ghazal, 서정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핵심 테마와 사상
- 사랑과 포도주: 그의 시에서 사랑과 술은 중의적입니다. 이는 세속적인 즐거움인 동시에,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영적인 황홀경을 상징합니다.
- 위선에 대한 저항: 하페즈는 겉으로만 경건한 척하는 종교 지도자나 금욕주의자들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대신 마음이 순수한 자유인인 '렌드(Rend)'를 이상적 인간상으로 제시했습니다.
- 모호함의 미학: 그의 시는 해석이 열려 있습니다. 연애 시로 읽힐 수도, 신비주의 수피즘(Sufism)의 철학서로 읽힐 수도 있는 이 중의성이 하페즈 문학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③ 하페즈의 문화적 영향력
팔-에 하페즈 (Fal-e Hafez)
이란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이나 명절(노루즈, 얄다 밤 등)에 하페즈의 시집을 무작위로 펼쳐 그 시 구절로 점을 치는 관습이 있습니다. 그의 시가 미래를 예언하거나 영적인 해답을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서구 문학에 끼친 영향
- 괴테: 하페즈의 시에 매료되어 《서동시집(West-Östlicher Divan)》을 집필했습니다. 그는 하페즈를 자신의 '쌍둥이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 에머슨, 니체: 하페즈의 자유로운 영혼과 통찰력에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하페즈의 시는 번역하기 까다롭기로 유명하다고 알려졌습니다. 페르시아어 특유의 음악성과 단어 하나에 담긴 다층적인 함축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노래한 "사랑만이 이 우주의 아치 아래 남아있는 유일한 기억이다"라는 메시지는 시공간을 초월해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3) 카르발라 전투
카르발라는 오늘날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도시입니다. 이곳은 단순한 지명을 넘어, 이슬람교의 두 축인 수니파와 시아파가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된 '카르발라 전투'의 현장으로 전 세계 2억 명 이상의 시아파 무슬림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성지 중 하나입니다.
① 역사적 배경 — 카르발라 전투 (서기 680년)
사건의 핵심은 예언자 무무함마드 사후,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권(칼리프)을 둘러싼 갈등에 있습니다.
- 발생 시기: 이슬람력 61년 무하람월 10일 (서기 680년 10월 10일).
- 교전 당사자
.. 후세인 이븐 알리: 예언자 무함마드의 손자이자 제4대 칼리프 알리의 아들. (약 72명의 가족과 추종자)
.. 야지드 1세(Yazid I): 우마이야 왕조의 제2대 칼리프. (수천 명의 대군)
- 사건의 전말: 야지드의 세습 통치에 반대하며 쿠파(Kufa)로 향하던 후세인 일행은 카르발라 사막에서 야지드의 군대에 포위되었습니다. 며칠간 물 공급마저 끊긴 고립 상태에서 후세인과 그의 가족, 추종자들은 끝까지 항전하다 비극적으로 순교했습니다.
② 종교적 및 신학적 의미
카르발라는 시아파 정체성의 뿌리이자, 저항 정신의 상징입니다.
- 시아파의 형성: 이 사건을 계기로 '알리의 추종자(Shi'at Ali)'들은 우마이야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별도의 종파로 완전히 고착되었습니다.
- 아슈라(Ashura) 기념일: 후세인이 순교한 무하람월 10일은 시아파 최대의 애도일입니다. 신자들은 후세인의 고통을 기리며 자학 정진이나 연극(Ta'ziyeh) 등을 통해 슬픔을 표현합니다.
- 저항의 상징: 카르발라는 "모든 땅이 카르발라이고, 모든 날이 아슈라다"라는 격언처럼, 불의한 권력에 맞서 진리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순교 정신'의 정점을 상징합니다.
③ 카르발라의 지리적, 고고학적 가치
- 명칭의 유래: '카르발라'라는 이름은 아카드어로 '신의 성소'를 뜻하는 'Kar-Balla'나, 아람어에서 '고통과 시련'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 지정학적 위치: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중심지와 인접해 있으며, 유프라테스강 근처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위치하여 고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카르발라는 단순히 7세기의 비극적인 전투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 중동의 국제 정세와 종파 갈등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후세인의 죽음은 군사적으로는 패배였으나, 종교적으로는 '영원한 승리'로 승화되어 수천 년간 지속되는 강력한 서사를 만들어냈습니다.
4) 이란의 1953년 쿠테타와 1979년 혁명
현대 이란 역사의 가장 거대한 두 분수령인 1953년 쿠데타와 1979년 혁명. 이 두 사건은 서로 독립된 역사가 아니라, 앞선 사건의 결과가 뒤의 폭발을 불러온 '인과관계'의 사슬로 묶여 있습니다.
① 1953년 쿠데타 — '아약스 작전(Operation Ajax)'
이 사건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외세에 의해 무너진 현대 중동사의 비극적 서막입니다.
- 배경: 1951년, 민족주의 성향의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가 영국이 독점하던 이란 석유 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영국이 경제 봉쇄를 가하고 미국을 설득했습니다.
- 전개: 미국 CIA와 영국 MI6는 '아약스 작전'을 공조했습니다. 군부 내 친(親) 국왕 세력을 포섭하고 뇌물과 여론 조작을 통해 테헤란 내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 결과: 모사데크 총리는 가택 연금되었고, 해외로 도피했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이 복귀하며 전권을 장악했습니다.
- 영향: 이란인들에게 '미국은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닌 제국주의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으며, 훗날 반미 감정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② 1979년 이란 혁명 —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
25년간 이어진 국왕의 전제 정치가 무너지고 종교 지도자가 국가 수장이 된 전무후무한 혁명입니다.
- 배경 (국왕의 실책)
.. 백색혁명: 급격한 서구화와 근대화로 전통 가치관이 붕괴하고 빈부격차가 심화되었습니다.
.. 사바크(SAVAK): 비밀경찰을 동원한 가혹한 탄압이 국민적 공분을 샀습니다.
.. 친미 정책: 이란의 이익보다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 전개: 1978년부터 대규모 시위가 격화되었습니다. 세속주의자,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이 모두 참여했으나, 구심점은 망명 중이던. 아야톨라 호메이니였습니다.
- 결과: 1979년 1월 국왕이 이란을 떠났고, 2월 호메이니가 귀국했습니다.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이 폐지되고 '이슬람 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 영향: 중동 내 친미-반미 구도를 완전히 재편했으며, 같은 해 11월 '미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이어지며 미-이란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③ 두 사건의 비교 및 연결 고리
1953년 쿠데타로 모사데크의 세속적 민족주의가 좌절되지 않았다면, 1979년의 혁명이 그토록 극단적인 종교적 색채를 띠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많은 역사학자의 중론입니다. 즉, 1953년의 '외압'이 1979년의 '폭발'을 잉태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