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R 작품 <8 Billion Selves>
지금 지구에는 80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80억 명.
80억 개의 서로 다른 얼굴.
80억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
단 하나의 행성 위에서.
Nemo Vos의 <8 Billion Selves>는 이 행성을 가로질러, 풍경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여정을 택한다. 관찰하는 방문자의 시선으로 우리는 80억 명의 사람들이 태어나고, 일하고, 전쟁을 벌이고, 사랑하고, 춤추고, 예술을 만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세계를 통과한다.
당신이 보고, 당신이 경험하는 것은 오직 당신만이 이렇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당신만이.
80억 명의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
-작품 시놉시스 중에서
작품 소개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Q-BJmY7_WE
네덜란드 감독 Nemo Vos (Tibor De Jong)과 3D 아티스트 Doris Konings의 협업으로 탄생한 이 작품은, 과잉과 혼란, 방향 감각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는 현시대 인간 문명을 하나의 초상처럼 보여줍니다. 작품은 2025년 대만 가오슝 영화제에서 Best VR 360 Experience Award를 수상했고, 다양한 영화제에 초청되었습니다.
저는 2025년 프랑스 파리의 뉴이미지 페스티벌에서 작품을 경험했습니다. 너무 황홀하고 압도적이어서 한번 더 예매하고 봤어요. 동료들에게도 추천했지만, 호불호가 강한지 저만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XR 작품을 감상하고 만들어오면서, 저는 XR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중력을 거스르는 자유’가 아닐까 생각해 왔습니다. 과거의 역사나 현실을 재현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감각과 경험을 구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XR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막연히 믿어왔어요. 그런데 이 작품을 보고 제가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장면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현란한 그래픽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마치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도착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기괴하지만 아름답고, 아름답지만 불안한 감각. 깨고 싶지 않은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경험이었습니다.
작품은 별도의 인터랙션 없이, 가만히 VR 기기를 쓰고 앉아서 감상하는 방식입니다. 한 편의 단편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선이 자동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공간을 통과하게 됩니다. 경험은 어두운 방 안에 치직거리는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시작됩니다. 헬맷을 쓴 남자가 방 안에 앉아 있고, 시선은 방 밖의 세계로 연결됩니다. 이윽고 하늘 위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뱅뱅 돌고 있고, 관객의 시선은 중력을 거슬러 위로 나아갑니다.
세계가 뒤집히는 듯한 혼란스러운 시각적 전환을 거쳐, 관객은 여러 공간들을 통과합니다. 기이한 섬, 버려진 백화점, 화려한 궁전의 정원, 그리고 종교적 성소. 공간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요.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나체의 남성들, 그리고 짐승의 머리를 한 무용수들입니다. 미끌미끌한 플라스틱 같은, 언캐니 한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은 거대한 종교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성소입니다. 양 옆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있고, 정면의 재단에는 수염이 난 원시인 같은 사람의 거대한 얼굴이 있습니다. 격렬한 음악과 함께 관객은 그 입 속으로 들어가 삼켜지면서 작품이 끝나게 됩니다. 마치 오래된 텔레비전이 꺼지듯, 모든 소란과 스펙터클이 한순간에 침묵 속으로 사라집니다.
감독은 세계 인구가 80억 명에 도달한 시점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었다고 합니다. 복잡하고 과잉된 시각적 스펙터클 속에서, 관객은 80억 명의 존재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이 숫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정말로 고유한 존재일까?
그리고 작품은 정말 현란하고 정신없습니다. 마치 인스타그램 릴스처럼요.
인스타그램에서는 수많은 사람과 동물들이 사각형 그리드 속에서 나를 봐달라고 유혹합니다. 살면서 본 적 없던 사람들이 하루 몇 초씩 내 눈과 머리를 스쳐갑니다. 행복과 부, 아름다운 외모를 전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바로 밑의 영상 속에서는 전쟁과 시위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밑의 다른 영상들에선 AI로 인간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불안이 가득합니다. 누군가는 바로 지금 이 종목에 투자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따뜻한 방 안에 앉아서 세상의 온갖 이미지들을 구경하며 묘한 기분을 느낍니다.
세상은 예전보다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쩐지 같은 일들이 되풀이되는 것 같습니다.
곱씹어보면, 이 작품은 소셜 미디어 속 자극적인 이미지들을 한데 모아둔 거대한 콜라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끔찍하고 아름다운 디스토피아. 나는 여기 어디에 속할까?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고 왜 살아가는 걸까? 이런 질문까지 흘러갑니다.
감독 Tibor De Jong은 5년 전부터 VR 작업을 시작했고, 그전에는 평면 콜라주 작업을 해왔다고 합니다. 3D로 만든 콜라주를 VR 헤드셋을 끼고 여러 각도에서 보는 것이 편리하겠다 생각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이 매체 자체를 위한 작업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작품은 언리얼 엔진으로 제작되었고, 자신의 아내인 Doris Konings가 3D 작업을, 음악과 사운드 디자인은 네덜란드에서 네오 사이키델릭 및 실험적 팝으로 알려진 그의 아버지 Spinvis가 담당했습니다.
음악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압도적이면서도 작품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오래 붙잡아두는 힘이 있었습니다. 음악에 더 집중한 공연 형식의 버전도 존재하는데, VR 기기를 쓴 관객들 사이로 실제 공연이 펼쳐지는 방식입니다. 훨씬 더 몰입감 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아요. 아래의 영상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W5bCv7XUIG4?si=RmcQuCAkuPaoGd7r
감독의 말을 마지막으로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나는 우리가 VR 시네마에서 매우 독특한 시간과 지점에 서 있다고 믿는다.
기술은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아직 그에 대한 관습은 정립되지 않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VR 작품 또한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VR과 XR은 기술적으로는 꽤 오랜 시간 발전해 왔지만, 여전히 스마트폰만큼 대중적인 매체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진입 장벽도 분명 존재합니다. 그만큼 작품들 역시 널리 퍼지기보다는, 영화제나 특정한 공간에서만 접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환경 속에서 실험적이고 의미 있는 작업들은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AI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개인이 상상하는 세계를 훨씬 손쉽게 구현하고 공유할 수 있는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마치 릴스를 만들듯이요.
XR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흐름을 지켜보고, 그 안에 직접 참여하는 일은 분명 흥미롭습니다.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각자가 자신만의 즐거움을 붙잡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Director: Tibor de Jong
-Production: Nemo Vos
-Music and Sound Design: Spinvis
-3D Artist: Doris Konings
-Length: 22 min
[자료 및 이미지 출처]
-감독의 인터뷰 글
https://blog.vive.com/us/8-billion-selves-a-vr-lens-into-humanitys-reflection/
-작품 웹사이트
https://nemovos.com/8-miljard-ikk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