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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를 향해가는 시간 휴대전화 진동에 꺼내어본다. 아버지 전화다. 곧 시작하는 회의 준비에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무슨 일인지 걱정스런 마음이 앞선다. 순식간에 잊어버린다. 시작한 회의실 분위기가 바로 냉랭하니까.
늦은 점심을 먹고 전화 온 사실도 잊은 채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언제부터 유행한 것인지 모르나 두 개의 모니터가 나를 압도한다. 한 개의 모니터로 일을 하다 두 개가 되면 업무 효율이 두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보기 편할 뿐. 하지만 회사는 단순하게 직원 복지를 위해 두 개의 모니터를 설치해주지 않는다. 작은 변화도 비용과 효율을 철저하게 따진다. 회사와 직원 간 볼장 다 본 사이가 된다면 회사는 근거로 내세울 수 있다. '업무도 편하게 하고 직원 복지를 위해 모니터도 추가 설치해줬는데 당신의 업무 능력은 왜 하향 곡선입니까'
이런 잡스런 생각을 할 틈은 없다. 넓어진 모니터 크기만큼 향상된 업무 능력을 보여주려면 이 창, 저 창 다 띄워두고 왼쪽 눈으론 자료를 분석하고 오른쪽 눈으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한쪽 귀로 들려오는 상사의 말에는 즉각 반응해야 남은 귀는 울려대는 책상 전화 차지다.
오후 세시쯤 아버지의 문자가 왔다.
"수술 잘하고 나와서 집에 왔다. 날씨 추우니 따듯하게 입고 다녀라"
담배를 갖고 옥상에 오른다. 전화를 걸어보나 받지 않는다. 또다시 문자가 온다.
"목 수술이라 며칠간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난 괜찮으니 들어가서 일 봐라"
18층도 공기가 맑을 리 없다. 아래로부터 밀려 올라오는 먼지와 멀리서 날아오는 먼지가 얼굴을 시원하게 할 뿐이다. 담뱃재만 마음껏 날아가다 시야에서 사라진다.
백수 전선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다. 애당초 내가 생각한 백수는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조건이 붙어있다. 퇴사는 이미 경험해봤다. 비자발적 백수 생활도 해보았다.
"일 안 하고 백수하고 싶다", "아, 때려치우고 잠깐 쉴까", "로또 맞으면 바로 백수생활 시작인데" 같은 백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나만의 백수 상(image·Idea)을 그릴 것이다. 여기가 시작점이다.
담배가 끝을 향해 다가왔다. 터벅터벅 사무실로 끌려간다. 그래도 괜찮다. 시작점은 그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