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다른 이 앞에서 시를 낭송한 기억이 나는가. 초등학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겨우 흐릿한 장면 하나가 떠오를까 말까. 회사 대표의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날이었다. 재무실장, 인사실장과 함께 잔바리인 내가 운이 나쁘게 차에 올랐다. 조수석에 앉아야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회사의 중추 실장들은 그 기회마저 주지 않았다. 대표가 운전하는 차에 자리로만 놓고 보면 회장이 앉는 뒷좌석에 앉았다. 고급차의 쿠션감을 느낄 수 도 없이 엉거주춤 곧추세운 허리와 불편한 자세로 최고급 중형차의 뒷좌석에 앉았다.
출발한 지 10분 지났을까 대표가 차에 놓아둔 경영서적을 뒤적거리더니 한 페이지를 펼치고 뒷좌석의 나에게 넘겨줬다.
"거기 시 있지? 한번 읽어봐"
순간 나는 '좋은 시니까 가는 길에 편하게 읽어보라는 건가'와 '이걸 지금 소리 내어 낭송하라는 건가' 사이를 100번은 왔다 갔다 했다. 3초도 기다리지 않은 대표가 고맙게도 명확한 지시를 내려줬다.
"소리 내서 읽어봐"
'이런 젠장. 이 차는 왜 타 가지고 모진 길을 걷네. 시를 읽으라고? 이건 도대체 무슨 지시야'
순식간에 이런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면서도 입에서는 시가 흘러나왔다.
"담쟁이-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시는 천천히 읽는 거야"
3초도 지나지 않아 대표가 끼어들었다. 내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늦지 않은 나이에 남 앞에서 시를 낭송해야 하는 당혹감, 부끄러움과 대표의 지시에 맞춰 시의 의미와 운율을 상상하며 느려지는 낭송 속도가 웃기기도 해서였다. 더 창피한 건 다 읽었을 때 대표도, 실장들도 반응이 없었다. 세상 창피하게 10초 정도 지나자 넌지시 대표가 말했다.
"난 이 시에서 이 문구가 너무 좋아요.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회사 중추인 인사, 재무 실장에게 건네는 메시지이자 대표의 고충을 토로한 것이었다.
'이 회사에서 나 혼자만 아등바등하고 너무 힘든데 결국 내가 움직이면 나머지 직원이 따르지 않겠느냐(인사, 재무는 직원 교육, 사업관리 안 하고 뭐하느냐)', '지금까지도 내가 억지로 다들 끌고 와서 성장한 회사인데 이제는 내가 너무 힘들다(임원들은 뭐하느냐)'
나는 남 앞에서 시를 낭송하느라 창피했지만 두 명의 실장은 10초 뒤 대표의 입에서 나온 말과 그 의미를 알아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흠칫, 쫄깃, 허걱, 뜨악했을까. 그래도 역시 회사의 달인들이었다. 자신이 대표를 위해, 회사를 위해 준비해 놓은 성과들과 진행 과정이 콸콸콸 나왔다. 대표는 흡족한 듯 가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보고받은 일들에 하나씩 하나씩 지시사항을 꼭 끼워 넣었다.
세 사람의 대화에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면서도 잡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차를 왜 탔을까'
'대표는 힘들겠다. 실장도 어렵겠다'
'백수는 어떻게 되는 건가'
'도종환은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