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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만 되면 눈치 없이 배가 꼬르륵거린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밥은 달고 맛있다. 회사는 싫은데 몸은 건강하다. 고뇌도 하고 눈물 흘리는 밤도 있건만 점심시간, 혀로 느끼는 음식 맛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버티는데 이력이 난 건지, 나도 모르게 회사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한결같이 몸뚱어리가 점심을 기대하는데 기분이 묘하다.
다행히 회사 주변에 단골가게가 생겼다. 들어서면 사장님이 "이쁜 총각 왔네"라고 맞아줬기 때문이다. 음식 맛은 별로다. 나를 알아봐 주고 나도 살갑게 대하면서 한 번이라도 더 웃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요즘에는 사장님을 어머님이라고 부른다. 사장님 아들이 나보다 두 살 어린데 결혼을 했단다. 자리를 파하고 계산하고 나갈 때마다 어머님은 잔소리를 곁들인다. 딱히 싫지 않다. 한 귀로 흘리면서도 정을 느낀다. 정을 느끼려 퇴근 길마다 들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음식 맛은 중요하지 않다.
여느 날, 단골집을 나선다. 띠동갑 정도 차이나는 다른 부서 팀장과 지하철까지의 거리를 또박또박 밟으며 걷는다.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기도 했고 그간의 회사 생활을 토하기도 하며 술을 마셨다.
술 취한 팀장과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쓴다. 규칙적으로 덜컹덜컹 거리는 소리 뒤에 출렁거리는 지하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리저리 초라한 발길질로 삶을 지탱하려 애쓴다. 서로에게 기대 잠자던 젊은 남녀가 다음 역에 내리자마자 우리는 그 자리를 꿰찬다.
"나 있잖아, 나만의 캐릭터가 있어"
뜬금없는 팀장의 말에 물끄러미 얼굴을 쳐다본다.
"사실 나는 그림이 좋았거든. "
팀장이 국민학교 적 꿈 이야기를 한다.
"내가 공부를 드럽게 못했거든. 근데 울 엄니가 인문계 학교 보내려고 무지하게 애를 썼어. 덕분인 건지 지금은 이런 일을 하네 ㅎㅎㅎ"
쉰을 넘긴 팀장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펜을 하나 꺼내 든다.
이내 자신의 손바닥에 꾸불꾸불 선을 그린다. 지나간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손금 위에 선명한 줄들이 생긴다. 유독 깊은 손금 위에는 여러 번 선을 덧칠한다. 갑자기 손바닥을 오므린다.
"술이 취했나. 잘 안 그려지네 ㅎㅎㅎ. 갑자기 부끄럽네"
팀장은 엄지 손가락으로 연신 손바닥을 문지른다. 없어지는 선들을 뒤로하고 나는 지하철에서 먼저 내린다. 내릴 역이 가까워진 탓도 있고, 완성된 그림을 보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자신의 지나간 꿈과 캐릭터를 '지금' 보여주려는 팀장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잊혀진 꿈은 천지 빼까리다. 차고 넘쳐 역설적으로 슬프지도 않다. 사라져 간 나 대신 지금의 자신을 보며 위안 삼는 일도 보편이다. 살아가는 삶을 감사해야 할 때가 더 많다. 그때의 소년·소녀는 "그 때니까 그럴 수 있었던 거야"라는 말로 턱없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사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아 아주 자연스럽게 없었던 시간이 된다. 이런 보통의 흐름을 역행하는 사람을 본다는 건 어색한 일이다. 자주 접하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른다. '아직 철이 덜 들었네'라는 미천한 생각으로 한 사람을 판단하고 싶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터벅터벅 역사를 나서며 잔잔한 미소가 얼굴에 번진다. 오십을 넘긴 이가 보여준 자신에 대한 열정이 좋았다. 술에 기대어 인생의 억울함을 토로한 게 아니어서 좋았다. 잠시나마 그때의 소년으로 돌아간 팀장이 좋았고 아직까지 자신만의 캐릭터를 갖고 있다며 펜을 꺼내 든 그 사람의 용기가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