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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 출장을 다녀온 뒤 이른 퇴근길에 나선다. 오후 6시 20분, 지하철 2호선은 어느 역이든 꽉 들어찬다. 가방을 앞으로 메는 매너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공부 못하는 사람 가방이 늘 무겁다고 했는데 아직도 그 가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허약한 한 손에 매달린 가방과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중심을 잡으려는 빈약한 다리는 휘청거리기 일쑤다. 버티기 힘든 지하철 틈바구니 속에서 휴대전화 진동이 느껴진다. 볼 생각은 애당초 없다. 사장이 찾더라도 보지 않을 것이다. 이 틈에서 온전히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붙은 사람들은 잘도 핸드폰 화면만 뚫어져라 보는데 나는 도통 그럴 수가 없다. 초점 없는 눈동자로 재생되는 동영상에 집중하는 사람과 쉬지 않는 손가락으로 같은 시공간에 묶여있는 카톡방 그네들을 지켜보다 눈을 감는다. 아무 생각을 안 하는 게 힘이 들지만 눈과 귀를 잠시라도 닫아놓으려 애써본다. 서로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는 퇴근길 지하철이지만 나 혼자 외딴섬에 있는 느낌을 받는다.
간혹 우르르 내리는 역이 있다. 가방을 멜 정도의 공간이 확보돼 휴대전화를 꺼내본다.
"개새끼"
한 단어의 짧은 문자가 화면에 보인다. '이게 뭐야'라는 생각은 안 든다. 무덤덤하게 보낸 사람을 확인한다.
"무슨 일이 심까. 요새 뭔 일 있으세요?"
짧게 답장을 보내본다.
"흐흐흐, 별 일 없어. 좀 슬퍼"
앞뒤 안 맞는 문자를 받고 한동안 가만있는다. 무심결에 문자 보낸 이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본다. 모친 부고 기사가 올라온다. 갑자기 큰 충격을 받는다. 무작정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전화를 건다.
"왜, 전화했어. 나 술 먹으러 나왔어. 뭐? 온다고? 퇴근이나 해. 어딜 온다는 거야"
작은 실랑이 끝에 술 먹는 장소의 주소를 찍어준다는 확답을 받고 역사를 나선다. 처음 내리는 역이라 어느 방향에서 택시를 타야 요금이 적게 나올지 알 수 없다. 무작정 인도와 도로의 경계선에서 다급하게 손을 흔든다. 도착한 주점 앞에서 담배를 꺼내 든다. 우선 화가 난다.
'함께 술 먹은 밤이 몇일인데, 꺼내기 힘든 이야기로 시간을 채운 게 몇 날인데, 궁상맞게 흐르는 눈물을 못 본 체 한 게 몇 번인데'
입 밖으로 나오는 하얀 연기가 눈 앞에서 사라지길 몇 차례 반복하니 화도 사라진다. 어떤 얼굴로 형을 마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부고 기사는 7일 전에 올라왔다. 상을 치르고 슬픔에 허우적거리는 형이 보낸 첫 문자가 "개새끼"였다. 나에게 하는 욕지거리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갑자기 떠나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자책하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자 너무 힘에 겨워 숨도 쉬지 못하는 형이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일종의 SOS였다.
2층 술집에 오르니 구석자리에서 흐느끼는 어깨를 찾았다. 덤덤하게 앞에 앉는다. 덤덤하게 내 술잔을 채운다. 첫인사도 없이 목으로 술을 부어 넘긴다.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집안사에 그동안 듣지 못한 에피소드가 추가된다. 흐느끼는 눈물 소리는 배경음이다. 나는 '응, 네, 아니오, 저런, 이런, 어떡해요'라는 그 흔한 감탄사나 짧은 호응도 하지 않는다. 휘몰아치는 슬픔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애쓴다. 내가 슬픔에 동조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형을 태워버릴 것 같았다. 술집을 나와 집까지 걷는 거리에서 연신 헛구역질을 하는 형을 본다. 걱정하는 나의 눈길을 봤는지 형이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헐떡이며 뒤를 따라가며 이름을 부르지만 저만치 멀어진 뒤에야 멈춰 선다. 욕을 하며 형한테 다가가자 "걱정 마. 나 건강해. 그리고 괜찮아"
못다 한 술이 아쉬워 월세살이하는 형의 집으로 오른다. 상이 끝나자 형수님은 아이들 데리고 지방으로 내려갔단다. 2년 넘게 들락날락한 집이지만 방 한편에 상 치르고 쓰다 남은 도구들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또다시 어색하다. 익숙하게 냉장고를 여니 술만 가득하다.
"형, 포장마차 할 거야? 술이 왜 이리 많아"
"냉동고에 좋은 고기도 있어. 엄마 조금씩 줄라고 샀는데..."
형의 얼굴에 아로새겨진 눈물 자국 위로 새로운 눈물이 흐른다. 못 본 척 냉장고를 닫고 싱크대로 간다.
"누가 홀아비 아니랄까 봐 그릇 안 닦는 것 좀 보소."
설거지하는 등 뒤로 형이 아이들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유치원생 첫 딸이 학원에서 자신을 괴롭힌 아이 이야기를 아빠에게 늘어놓는다. 나는 딱딱하게 굳어 들러붙어버린 밥풀을 떼어내려 따듯한 물로 수도꼭지를 돌린다. 각종 그릇에 붙어있는 정체 모를 것들도 뜨거운 물 앞에서 버티지 못한다. 퐁퐁까지 합세하면 그릇은 원래, 처음 모습 그대로 깨끗하고 단아해진다.
'형한테 몰아치는 슬픔이 뜨거운 물이 될 수 있을까, 아이들의 목소리가 마음에 붙어버린 어둠을 불릴 수 있는 따듯한 물이 될까. 내가 함께 있는 이 짧은 시간이 퐁퐁이 될 수 있으려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뒤에서 욕이 들린다.
"야 쓸데없는 일 하지 말고 언능 앉아서 술이나 딸어줘. 상 치르고 남은 마른안주도 아직 많다. ㅎㅎ"
처음으로 형에게 할 말을 꺼내본다.
"형, 한껏 무너지고 슬퍼하고 괴로워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은데 49재는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가서 어머니 뵈러 갔으면 좋겠어"
잠깐의 침묵 뒤에 형이 말한다.
"몰라 임마. 서핑이나 하러 가자"
둘 다 해본 적도 없는 서핑 이야기로 잠깐 꽃을 피웠다.
새벽 공기는 이상하게 맑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다음 주 금요일 연차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