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기타.

그때의 너

by 갑자기 흰수염

클래식 기타.


갑자게 네가 떠올랐어. 자려고 누웠는데 정말이지 생뚱맞게 네 이름이 기억났어. 왜 그랬을까. 하루 종일 내가 보냈던 시간 속에 널 떠오르게 만드는 뭔가 있었을까. 요 며칠 사이 만났던 사람들 중에 나도 모르게 널 기억하게 하는 어떤 모습을 봤던 걸까. 확실한 건 의식적으로 널 떠올린 게 아니라는 거야. 그냥 갑자기 ‘슝’ 하고 이름 두 글자가 울리더라. 당연하게도 너의 얼굴은 흐릿했어. 떠오른 이름을 따라 기억을 되새겨봐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더라.

우린 고등학교에서 알게 됐어. 그 시절에는 존재의 부딪힘들이 어색하지 않았어. 어른들 보기에 혼란스럽고 어수선하고 막 크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때 우리는 반과 번호, 이름이면 존재를 드러내는데 어렵지 않았었거든. 아직도 기억나지 않아. 왜 네가 널 알게 됐는지. 남녀공학이었지만 남녀 반을 나눠놓은 학교에서 서로를 알아보겠다며 남자반과 여자반의 ‘마니또’ 편지를 통해서였을까.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모뎀으로 점과 선밖에 없는 웹사이트에 접속해서 학교 비밀게시판을 둘러보다 같은 학년인 것 같아서 보낸 쪽지를 통해서였을까. 그래도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서로를 알게 된 것 같아. 그때부터 네 기억이 드문드문 떠올라. 넌 남학생에게 인기 있는 여학생은 아니었어. 그 시절에는 ‘얼짱’이나 학교를 대표하는 ‘4대천왕 4대천녀’라고 불리는 얼굴마담들이 있었어. 스쳐 지나듯 SNS에서 그들의 얼굴을 볼 때면 ‘왜 재네가 그때는 그렇게 이뻐 보였을까’라고 피식 웃곤 하거든. 그 시절 너와 난 그 축에도 못 끼는 아이들이었어. 물론 각자를 대표하거나 몰려다니는 우리만의 친구들은 있었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넌 머리가 아주 짧았어. 보이시한 매력이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 같아. 너의 이름을 내건 ‘00파’가 어설피 기억나. 조폭 집단과 비행청소년 집단에서 내거는 ‘00파’와는 아주 결이 다른 그냥 네가 좋아서 너와 함께 붙어 다니면서 다른 친구 집단에게도 장난스레 말하는 ‘00파’였던 거 같아.

널 기억할 수 있는 게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던 거 같은데 아쉽게도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아주 많은 시간을 통화한 기억만 남아있어.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학원까지 다녀오면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집에 도착한 거 같은데 그때부터 우리는 전화를 했어. 막 보급되기 시작한 휴대전화는 쓰는 만큼 내야 하는 요금제 때문에 우리는 집전화가 뜨거워질 때까지 붙잡고 있던 거 같아. 새벽에 울리는 전화 벨소리에 혹여나 엄마가 일어나 뭐라고 할까 봐 휴대전화 문자로 시간을 정해서 집전화를 방으로 가져오고 벨소리가 한번 울리면 급하게 받곤 했어. 우린 그 시절에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을까. 너와의 통화는 새벽 4시를 넘기기 일쑤였어. 전화기가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져도 우리는 화장실을 가거나 물을 가지러 거실에 가는 사이에도 전화를 끊지 않았어. 어느 날은 너무 졸려서 그냥 전화기를 붙잡고 잠든 적도 있는 거 같아. 그렇다고 우리가 사귀는 건 아니었어. 잘 모르겠지만 ‘친구’라는 단어 안에 우리를 놓아두고 한창 이성에 눈 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남자와 여자도 친구가 될 수 있어’라고 자랑한 것 같기도 해. 여드름이 얼굴을 뒤덮어 거울도 보기 싫고 목소리도 이상해지는 나는 친구들이 돌려보던 ‘야동’에 눈을 번쩍이며 순서를 기다리고 공원에서 친구들이 구해온 술을 마시며 비행을 꿈꾸기도 했어. 끓어오르는 욕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발버둥 치는 것도 나였고 새벽 내내 너와 전화통화를 한 것도 나였어. 조심스럽게 지금 생각해보면 난 누구보다도 널 잘 알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던 거 같아. 네 주변 친구들이 너의 보이시한 매력을 좋아하고 너도 그 장단에 춤추기도 했지만 새벽 시간의 우리는 온전했어. 가림막도 없었고 남녀 구분도 필요 없던 거 같아. 살아가면서 없는 꺼플도 만들고 자연스레 꺼플이 씌어져 그때의 나는 몇 겹의 지층 속에 화석처럼 눌려 있는 것 같은데 새벽 내내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로 허공을 떠다닌 것 같아. 사랑, 우정이란 말은 너무 폭력적이고 그냥 존재들로 무한의 시간 속에서 서로를 쳐다본 것 같아.

그렇게 새벽 내내 함께하는 사이였는데 학교에서 학교 밖에서 따로 만나본 적이 없다. 학교에서 스쳐 지나갈 때면 서로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조심스럽고 부끄럽게 인사를 했어. 수없이 많은 말을 했을 텐데 왜 서로 마주해서 이야기를 나눠볼 용기는 없었는지 모르겠어.

우리의 시간은 고3까지도 이어졌어. 딱 하나 기억나는 건 네가 나에게 전화기를 통해 들려준 클래식 기타 선율. 당시에 넌 음대를 가겠다고 했거든. 고3이라 통화 횟수는 줄었지만 한번 전화하면 새벽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시간에 네가 배운 곡을 들려주곤 했어. 너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난 요즘에도 가사 없는 선율 곡만 들어. 클래식 기타, 우쿨렐레, 피아노, 첼로가 말하는 목소리에만 집중하곤 해. ‘클래식 기타=새벽’이란 기억나지 않는 소리만 남고 또 너와 나의 시간은 망각 속에 있어. 다시 이어지는 건 재수학원이야. 재수학원에서 한 두 달 공부하고 있는데 갑자기 네가 우리 반으로 들어왔어. 대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클래식 기타가 싫었던 건지 기억나지 않는데 너도 다시 공부를 하려고 들어온 거 같아. 나한테 다가와 아주 수줍게 “00, 안녕”하고 말은 건넨 네가 또 흐릿하게 기억나. 그리고 또 너와 나의 시간이 사라진다. 그 와중에 너와 심하게 다투고 지금은 우습지만 절교라는 말을 한 것 같아. 심각한 모습의 우리가 떠오르기도 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도 들려. 그게 너인지 나인지는 모르겠어. 그렇게 우리는 기억은 스무 살에서 끝나. 안 좋은 끝이었어. 속 좁은 나로 인한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너 때문인 것 같기도 해.

몇십 년이 지났는데 갑자기 왜 네가 떠올랐을까. 떠오른 김에 SNS,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어.

네 이름, 네 영어 이름, 클래식 기타. 어느 곳에서도 네가 나오지 않더라. 너도 나처럼 꼭꼭 숨고 싶은 건가. 두 시간 정도 찾아 헤매다가 휴대전화를 껐어.

‘찾지 못해 다행이야’

고등학교 친구를 통해 건너 건너 오래도록 건너서 널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네 번호를 안다고 하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갑자기 전화해서 보고 싶었다고 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고, 그냥 생각나서 했다고 하기에는 건너 건너 노력할 만큼이었나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시절 우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지금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이며 함께 보낸 시간에 더해 이제부터 새로운 시간을 또 함께 보내 보자고 할 마음이 없어. 참 요상한 변덕이지. 갈팡질팡한 마음 덕에 잠이 오지 새벽이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당산 감자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