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백수가되기로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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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갑자기 흰수염

말 한마디에 사람이 사라졌다. 어제까지 여기 있던 넓은 책상이 공사현장 한 구석의 먼지 쌓이는 작은 책상으로 바뀌었다. 일말의 명예라도 지켜보려는 듯 예순 다섯을 향해가는 그분은 사직서를 들고 본사에 왔다. 어정쩡한 자세로 그분을 맞이한 직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서툴게 그분의 뒷모습에 대고 인사를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전무님”

며칠 전 회사 회식자리에서였다. 신입직원을 대상으로 1박 2일간의 교육을 진행했다. 으레 그렇듯 첫날 저녁에 신입직원과 기존 부장 이상 직급들의 환영회가 열렸다. 각 자리에 놓아둔 술은 금방 동이 났다. 인사총무 직원과 나는 열심히 술을 날랐다. 팀별로 나뉜 자리에 가서 열심히 술도 마셨다. 술이 오르면 팀의 경계가 무너진다. 어느덧 A팀 신입은 C팀 부장과, B팀 신입은 D팀 전무와 함께 어우러졌다. 유독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는 이는 인사팀장과 나, 그리고 대표였다. 못 모르고 부어 넣은 술이 섣부른 용기를 부르고 신입직원의 인성 내지 회사에 대한 생각과 팀장 이상급 직원의 본심을 너무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대표의 지시도 있었다. “최대한 많이 즐겁게 먹이면 그만큼 사람의 본모습이 나온다. 잘 보면 재밌을 거야.” 대표를 수행해야 하는 나는 누군가 대표에게 술 한잔 따르러 오면 그 사람 옆에 앉아 내가 술을 따라주고 마셨다. 부끄럽지만 일종의 ‘술 상무’였다.


술 상무 노릇이나 하는 나의 모습에 답답해 담배를 태우러 나갔다. 흡연 장소에는 술 취한 직원들이 으레 그렇듯 형·동생 하며 노골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다. “너 그거 알아? 이건 나만 아는 다른 팀 비밀인데...”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사실 너무 귀찮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싶지도 않았다. 빨리 이 자리가 끝나기만 바라고 있었다. 어떤 승자도 없는 자리에서 누가 행복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먹고 마시는 행복한 자리지만 소수의 몇몇은 일종의 감시와 평가를 하는 자리였다. 행복할 리 없는 그런 시간.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0 과장님, 어디세요? 지금 들어와 주시면 안 될까요?” 인사총무 여직원의 전화에 이유를 물었다. 자리를 피한 듯한 그 직원의 대답은 술 취한 0 전무가 여직원끼리 모여있는 테이블에서 스킨십을 시도한다는 거였다. 회식장소로 들어가 그 테이블로 향하는 짧은 거리에서도 술 취한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자연스레 손을 여직원의 어깨에 올린다거나 과도하게 여직원을 향해 개방된 자세로 연신 술을 마시라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여직원의 어깨에 올려진 0 전무의 손을 내려놓으며 여직원에게 다른 테이블에서 찾는다고 둘러댔다. 채워진 술잔을 보고 0 전무에게 한잔 더 드시고 제가 올리겠다고 했다. 0 전무는 이내 흥미를 잃은 듯 휘청거리며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새벽에서야 도착한 숙소에서 나는 그날의 일들을 정리했다. 휴대전화 메모장에 0 전무를 포함해 특정 직원의 언행을 정리해뒀다. 그리고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일정을 진행하기에 앞서 대표와 인사팀장, 그리고 나는 커피숍에서 만났다. 능글맞은 표정의 인사팀장은 어제의 일들을 보고했다. 어떤 직원은 이렇게 생각했고 모 부장은 회사 프로젝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더라는 내용들이었다. 대표는 조용히 듣고 간혹 자신도 확인했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던 중 0 전무 이야기가 나왔다. 대표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0 전무님 너무 취했던데. 나한테 와서도 막 실수하는데 뭔가 불만이 많으신 것 같더라” 인사팀장도 거들었다. “안 그래도 제가 계속 지켜봤는데 이 자리, 저 자리 가서 계속 술 드시고 이상한 말 하는 거 같았습니다. 나중에는 직원들도 피하던데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가 불편했다. 상품 품평회의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이 제품은 이런 하자가 있네’, ‘이 제품은 가격이 싼 만큼 능력이 부족해’, ‘이 제품은 내구성이 좋으니 그냥 오래 쓰자’

사람을 평가하는 건 흔하다. 점수로, 등수로, 업무량으로, 매출 달성액으로 그리고 인성으로. 평가 기준이 주어지면 평가 과정은 일사천리다. 평가가 끝나면 소수는 영광스러운 수상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반면 대다수는 낙인찍힌다.


며칠 뒤 공사현장의 몇몇 직원이 나를 불렀다. 저녁에 술 한잔 하자고 했으나 직감적으로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느꼈다. 해당 공사현장의 핵심인력에 속하는 과장과 대리가 하는 말의 무게가 있기에 술자리에서 나는 조용히 들었다. 묘하게도 0 전무 이야기가 나왔다. 두 사람의 말에 따르면 0 전무의 전횡과 횡포로 공사현장의 모두가 힘들어한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하청업체도 0 전무의 과도한 요구로 공사 입찰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함께 했다. 기분 좋게 술자리를 끝내고 A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갑내기라 전화 통화에서는 농담도 하는 사이였다. “내가 0 전무 이야기 들었는데, 사실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A과장은 그렇다고 답했다. 자신을 포함해 0 전무로 인해 대다수 사람이 힘든 상황은 맞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나는 되물었다. “근데 너 왜 나한테 이야기 안 했어? 아니 나 말고 회사에 정식으로 너네 현장 사람들의 총의를 모아서 건의 내지는 고발할 수 있던 거 아니야?” A과장이 답했다. “우리 회사가 그렇게 시스템이 갖춰져 있냐. 애송이처럼 왜 그래. 안 바뀔 거 아는데 뭐하러 긁어 부스럼 만들어. 참다가 내가 나가면 되는 거 아니냐.”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대표에게 문자를 보냈다. 두 직원에게 전해 들은 상황을 몇 가지로 정리하고 최근 술자리에서 여직원에게 했던 행동도 첨부했다. 문자의 말미에 이 한 줄도 넣었다. “두 직원의 내용은 개인의 일방적 주장일 수도 있으니 반드시 사실 확인이 필요합니다.” 자정 무렵 대표의 답문이 왔다. “00야 네가 일을 잘하는구나. 고맙다. 내일 보자.” 대표의 칭찬이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두려움이 앞섰다. ‘섣부른 보고인가. 회사를 위해 확인해볼 필요가 있는 문제인가’ 찝찝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대표실은 오전 8시부터 뭔가 분주해 보였다. 인사팀장이 들락날락거리고 열린 문 사이로 대표의 심각한 표정도 보였다. 그러더니 9시도 안돼서 두 사람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본사를 나섰다. 출정하는 장수의 모습이랄까.

10시가 돼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됐다. 현장 직원들의 전화와 문자가 빗발친 덕분에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됐다. “0 전무, 다른 현장으로 보직 변경됐어요.”, “0 과장님, 회사서 파워가 장난 아니네요. 0 전무 바로 잘렸어요.”, “00야 어떻게 한 거야? 뭘 했길래 대표랑 인사팀장이 아침부터 현장 와서 0 전무를 날려버리냐?” 준비 없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나의 보고가 사람을 날렸다.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몇 마디와 내가 잠깐 본모습이 하루아침에 0 전무를 한직으로 내몰았다. 오후 2시쯤 회사에 복귀한 대표와 인사팀장은 대표실로 나를 불렀다. “고생했어. 0 과장, 인사팀장보다 많이 아네.” 대표의 치하와 함께 0 전무의 전보 발령의 명분은 ‘여직원 성추행’으로 했다고 설명해줬다. 이유를 묻자, 몇 달간 0 전무가 책임지는 공사현장의 달성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게 옳다는 판단이 들었고 그 와중에 내가 보고한 내용의 ‘성추행’이 아주 좋은 명분을 만들어줬다는 이야기였다. 대표는 평소 불만족스러웠던 현장 책임자의 문책과 현장 직원들의 고충을 들어줬다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흡족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대표는 섣부른 판단이 부른 영향을 느끼지 못했다. 인사팀장은 그저 옆에서 내가 먼저 그 정보를 보고했다는 사실에 어쩔 줄 몰라할 뿐이었다.


0 전무의 퇴사로 해당 현장의 분위기는 좋아지지 않았다. 업무 달성도도 올라가지 않았다. 공사현장의 달성률이 저조한 건 전적으로 0 전무의 탓이 아니었다. 0 전무의 책임은 20% 내외. 나머지는 회사 시스템의 부재였다. 복잡한 결정 권한 체계, 원가계산에 따른 합리적 입찰 시스템 부재, 매일 바뀌는 설계 도면, 관계 법률 미숙지에서 오는 법령 위반 사안 등 회사 전반의 문제가 현장 직원을 힘들게 했다. 이 와중에 사람까지 힘들게 하니 현장 직원도 대표도 일순간 0 전무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던 것이다. 물론 대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0 전무를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생각하고 전보발령을 내렸던 대표의 기대와 달리 공사현장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퇴사자가 늘어갔다. ‘회사의 전무라는 사람도 저렇게 쉽게 자르는데 나는 더 빨리 잘리지 않겠어? 지금 나에게 기회가 있을 때 탈출하는 게 상책인 듯’이라는 게 공통된 이유였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의 대표와 그 밑에서 전전긍긍하는 인사팀장의 얼굴을 두어 달 계속 지켜봐야 했다. 누구나 다 근본 원인을 알았지만 대표와 인사팀장에게 그 이야기를 용기 있게 할 사람은 회사에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남을 사람은 남고 회사는 하루하루 굴러간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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