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저기까지

by 갑자기 흰수염

여기서 저기까지.


거친 손길에 질질 끌려가는 진서를 알아챈 광균이 그때를 떠올렸다.

“우리 죽을지도 몰라”

“그 정도는 각오한 거잖아”

“아무도 우릴 기억해주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내가 널 기억할 거야”

“더 오래 살아있는 사람이 더 오래 기억해주는 거잖아. 그럼 너가 더 오래 살아남아”

서로의 온기로 온 밤을 채워가며 그들이 속삭였던 약속이었다.

가족도 떠나온 마당에 연인을 만들지 않는 건 암묵적 불문율이었다. 적에게 잡히면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나는터라 서로 조심조심했다. 보이지 않는 대의(大義) 앞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제 한 몸 던졌다. 자신의 몸을 태워 꺼져가는 불꽃을 연명케 했다. 언제나 불꽃은 주변 어느 것도 비출 수 없을 찰나까지 작아졌다가 마음이 철렁하는 순간 살아나곤 했다. 나약한 불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균이와 진서를 비춰줬다. 제 한 몸 태우기를 다짐했던 그들은 두 손 잡고 더욱 거세게 달려들었다. 운이 그들을 지켜줄 것이란 믿음도 없었다. 운이라는 게 있었다면 동료들이 허망하게 죽지도 않았을 것이며 장대하게 타올랐던 불꽃이 제 나라 백성이 불구덩이로 뛰어들어야 겨우 살아나는 처지가 되지 않았으리라. 실망과 분노할 새도 없이 광균과 진서는 붙잡혔다. 누군가의 밀고였는지, 어디에서 정보가 샌 건지 생각할 겨를 따위 없었다. 언제나 각오했던 죽음이었지만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을 다짐하는 것은 너무 쉬웠다’

광균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다.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꺾인 목 아래로 보이는 것들이 더 이상 광균의 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때려대지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멀어져 버린 발등에 쇠망치가 내려 꽂히자 입구멍이 벌어지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거친 비명은 광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무것 도 몰라...요...”

광균이 되뇌었다. 사실 분간할 수 없었다. 되뇌는 것이 말인지 생각인지, 목소리가 나오는 것인지 아닌지도 몰랐다. 릴레이 계주 하듯 언제나 최상의 몸 상태와 단정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적들의 바통 터치가 이어졌다. 악취 나는 어둠 앞에 광균의 불꽃이 타오르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광균은 죽음을 각오했으나 죽어가는 시간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전투에서 죽어간 동료의 숨결은 너무 짧았다. 외마디 비명이나 거친 숨소리 뒤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죽음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채워졌다. 죽음만 각오했던 광균이가 마주한 죽어가는 시간은 온몸에 고스란히 남았다. 다 타지도 못하고 꺼져버린 장작처럼 일부는 재가 돼 없어졌고 어디까지는 시뻘겋게 타다 말아 앙상해지고 불태워지길 기다리는 쪽도 있었다. 적들은 온전하게 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태우고 끄기를 집요하게 반복했다. 닿기를 바라는 죽음을 쉽게 내주지 않았다. 여기저기 도달하지 못한 죽음이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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