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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로 디지털 디톡스 여행을 간 건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퇴사 후 무언가 활력을 돋게 할 이벤트가 필요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며 교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신청해 본 것이었다. 물론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인생에 다시없을 운명적 친구나 밤을 새울 만큼의 길고 깊은 대화, 또는 절대 무시 못할 계시를 얻지는 못했다.
대신 이야기를 얻었다.
가자마자 휴대폰을 제출하고, 이번 여행을 함께할 멤버들과 인사했다. 휴대폰 없이 보내는 24시간, 낮에 밖에 있을 때는 풍경이라도 보는데 실내에 있으면 숙소에 같이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다. 저녁에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고 맥주 한 캔 씩을 사서 다시 같은 자리에 앉았다. 3분에 한 번씩 이어지는 침묵을 견디기를 반복했을 때, 난데없이 한분이 어린 시절 꿈이 뭐였냐는 질문을 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의 여행에서 다분히 감성적이고 철학적인 대화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뜬금없는 주제여서 다들 어리둥절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누구는 선생님, 누구는 목공사였다. 정작 이야기를 꺼낸 당사자는 조용히 있다가 본인의 어렸을 적 꿈은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며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의 꿈을 성실한 현생으로 준비했다. 그러다 몇 년을 자신을 바쳐서 모아둔 돈을 잃었고, 꿈을 이룰 기회를 날렸다고 했다. 좌절하고 분노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당한'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을 기록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생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삶을 방치하지 않고. 그간의 기록을 책으로 만들었다. 그 책으로 여러 곳에서 인정을 받았고, 그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자신만이 갖고 있는 '이야기'에 자부심이 있었다. 또한 앞으로 본인이 어떤 평가와 선택을 받게 되더라도, 그가 펼치는 이야기 덕에 본인은 어디에서나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덕에 그가 빛이 나보였다. 그리고 그는 그토록 원하던 조종사 훈련 프로그램에 합격해 여행이 끝나는 바로 다음날부터 훈련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우연히 만난 우리 일곱 명 중 두 명은 전세사기 피해자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나는 단순히 '고생했다', '집주인 정말 나쁘다' '법이 빨리 개정되어야 한다' 이런 말로 그들을 감히 위로하거나 동정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문제보다 심각하고 복구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지 알 수없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으며 그 여파는 지독했다.
어떤 식으로 멘털 관리를 했는지, 무엇이 그를 일으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다른 한분께 물어봤을 때는, 어떻게 '그냥 사는 거죠' 하는 아주 가뿐한 대답이 들려왔다. 나름 잘 살고 있었던,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에게 이런 일이 왜 벌어졌을까 한탄하기도 했다고 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니던 회사에서도 퇴사하게 되었다고 했다.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이지만 사람 때문에 회사에서 나왔고, 그럼에도 다시 이번 여행을 통해 사람을 얻어가는 것 같다는 그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함께 해서 즐거웠다는 마지막 인사도.
과연 해탈 또는 득도의 경지에 오른 것일지, 마음속 심연을 드러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정을 삼켜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 숙소 옆 책방에서 산 김애란 작가의 '이 중 하나는 거짓말'을 완독 했다.
읽다 보니, 등장인물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이야기의 시작이 중요한지 끝이 중요한지를 구별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눈앞에 닥친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지만 펜을 놓고 이야기를 끝낼 것인가, 이어갈 것인가,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것인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다. 견딜 수 없는 우울이 덮쳐와도 오뚝이처럼 바로 우뚝 설 수는 없겠지만, 다시 설 수 있을 때까지 나를 붙들어줄 그 무언가를 놓지 않기를.
우리가 사기꾼에게 돈을 빼앗긴 거지, 행복을 빼앗긴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