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펑펑 오는 서울의 일요일 아침, 뜨겁고 진한 코코아(정식 명칭은 핫 초콜릿이지만 왠지 코코아가 더 정감 간다)가 몹시 당겼다. 눈이 많이 오면 다른 나라로 여행 온 기분이 든다. 뽀득뽀득 눈을 밟을 때 발에 닿는 감각과 소리도 좋다. 눈에 푹 젖어 신발과 옷을 버리거나 우습게 미끄러지는 일은 꼭 있지만.
원래 일요일 아침에는 나만의 의식을 하러 간다. 책 한 권을 들고 집 앞 스타벅스로 향하기. 한 챕터 이상 몰입해 읽다오기.
오늘 읽은 책은 "대화의 대화"로 조용한 연말파티에서 읽고 나서 아직 끝을 못 본 책이었다. 대화로 구성된 책을 읽고 모임원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담은 이 책은 한 번쯤 생각해 본 주제에 대한 솔직하고 공감 가는 답변들과 동시에 묵직한 울림을 준다. 오늘의 울림은 세 가지 대목에 있었다. 쓰고 보니 그게 이 챕터의 전부였다.
이번 챕터에서는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라는 책을 다룬다. 처음에는 두 예술가들이 세대나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데도 대화가 가능해진 어떤 '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만약 밥을 먹다가 저 둘의 대화 같은 대화를 내가 하는 중이라면, 밥상 엎고 나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봤다. 앞 챕터의 주제인 리터러시가 언급되며, 요즘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차단하고 관계를 끊는; 그게 설사 온라인 친구일지라도, 현상이 많음을 짚어줬다. 입장을 이해하거나 그의 존재를 인정해 보려는 시도 자체가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강한 것 같다. 그렇지만 결국 사람이 대화를 하려면, '너도 맞고 나도 맞다'까지는 아니더라도 '너는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가만히 들어줄 수도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화가 날 때 왜 화가 나는지, 무슨 생각에서 화가 비롯되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내 안의 목소리를 더 들어주어야 한다는 영화 엘리멘탈에서 인용된 말도 있었다. 조금 더 성숙한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태도가 달라져야 하겠다.
두 번째로는 위선의 예술과 위악의 예술에 대해서 논하는데, 사실 이 개념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나는 따지자면 위선적인 사람이다. 몇 년 동안 지배적인 감정이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 오는 죄책감, 수치심이었으니 말이다. 굳이 안 해도 될 빈말을 해서 다른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게 불편한 마음을 표출하는 것보다는 편하고 에너지가 덜 든다고 생각했다. 집단 상담 워크숍을 받을 때 선생님이 남에게 쓰는 에너지만큼 스스로의 목소리를 더 들어주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에너지의 방향을 조절해야 해야겠다고 깨달았다. 책에서는 사회에 위선이 필수적이 다고도 하지만, 위악의 예술이 때로는 더 통쾌하다. 어떤 의도로 위선이나 위악이 행해지냐에 따라 다르다고 봤다. 다만 위선적인 사람이 많이 모인 장소에 가면 못 견디겠다는 문장에는 공감했다.
마지막으로는 예술을 향유하는 이유에서 책을 읽는 이유, 효능으로 대화가 이어졌는데, 텍스트만 주어졌을 때 필요한 상상력, 내 경험에 빗대어서 해석하는 능동적인 태도, 다른 사람의 경험을 수집하고 얻는 인사이트로 인해 어떤 방향으로 건, 얼마 나건 간에 조금은 성장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도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평소보다 책을 조금만 덜 읽어도 '아, 다시 책으로 돌아와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가 보다. 어쩌면, '읽기'라는 행위가 텍스트 말고도 다른 생활에서도 적용된다면,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을까? 예술이 때로는 심오하고 어려운 이유는, 물론 우리가 창작자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도, 그럴 의무도 없지만, 그 심오하고 어려운 주제를 읽어보려는 시도로써 얻는 배움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이 끌린다. 책은 그나마 예술의 가장 쉬운 통로인 것 같다.
내 세계가 확장되는 것에 비해서 내 안의 사전은 점점 제한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 요즘이었다. 너무 '나' 친화적인 학습만 했던가? 무의식적인 거부감이 느껴지더라도 나와 다른 의견들을 차단하지 말고 더 들여다봐야겠다. 아주 두꺼운 "현대 사회 생존법"을 빌려놓고 방치해 두었는데, 이 책 안에서의 여러 개념을 읽고 조금은 그런 느낌이 가셨으면. 조금은 반성을 하는 의미로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를 상호대차 신청해 두었다. 책에서 '심통'이 날 때 책으로 정화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집착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수단이 책인 것이 신기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책으로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은 가능한 것 같다.
늦은 점심을 먹고, 오후엔 요가로 마음을 정화하러 가야지. 저녁에는 주간 회고록을 써야지. 요 며칠 산책 말고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말도 별로 안 하고 살았더니 벌써 바깥사람의 온정, 안부 인사가 그립다. 못 견딜만한 상황들이 많지만, 조금의 평온함은 남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