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벼루에 구멍을 내고 천 개의 붓을 닳게 하다

김정희가 느낀 소박한 행복 대팽고회

by 랄라라


대학 4학년 때 잠시 서예학원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붓글씨를 가르쳐주신 선생님께서 붓은 좋은 것을 써야 한다며 그때 내가 느끼기에 아주 비싼 붓을 권하셨습니다. 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1년에 한 번, 그 붓을 꺼내어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열 개의 벼루에 구멍을 내고 천 개의 붓을 닳게 하다

예체능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준 사람들은 대개 그 분야에 재능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천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재능만으로 그 성과를 평가하기에 부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약용은 매일 앉아 공부를 하느라 18년의 유배생활 동안 복숭아뼈 있는 곳이 헐어 세 번이나 구멍이 뚫렸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그 미련스러운 것 같은 부지런함으로 정약용은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지요. 자신의 학문이 당대에 쓰이지 않더라도 후세에 활용되기를 바라면서요.

완전히 형태를 잃은 아래의 발은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입니다. 발을 무지하게 혹사하는 직업이 발레리나의 발이지요. 노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추사 김정희 역시 타고난 천재였지만 또한 엄청난 노력파였습니다. 그가 친구에게 쓴 편지를 보면 ‘ 70년 동안 열 개의 벼루에 구멍을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천 개의 붓을 닳게 하려면 얼마나 글씨를 써야 하는 걸까요?

김정희가 친구 권이재에게 보낸 편지/ 吾書雖不足言 七十年。磨穿十硏。禿盡千毫


김정희의 '불이선란도'를 볼까요?

이 그림은 많은 도장과 글씨들이 적혀 있어 어지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흔히 말하는 동양화의 여백의 미도 없습니다. 하지만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자유로움과 능수능란함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에는 4개의 제발(그림에 쓴 글) 있습니다.

'난초 그리지 않은 지 20년, 우연히 그렸더니 하늘의 본성이 드러났네. 문 닫고 찾으며 또 찾은 곳, 이것이 유마의 불이선일세. 만약 누군가 억지로 그림을 요구한다면, 마땅히 유마거사의 말없는 대답으로 거절하리라'

'초서와 예서, 기자의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어찌 좋아하겠는가'

'애당초 달준이 주려고 아무렇게나 그린 것이다. 다만 이런 그림은 하나만 있지, 둘은 있을 수 없다'

'소산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정말 가소롭고 우습구나'

이 네 개의 제발에는 김정희 자신의 글씨에 대한 자신감이 듬뿍 묻어있습니다. 달준이는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가서 만난 평민 출신의 총각으로 귀양지에서 김정희를 계속 모신 시동이었으며, 과천에 되돌아왔을 때도 계속 김정희를 모신 사람입니다. 달준이에게 주려고 한 그림인데, 당시 서각가 소산이 이 그림을 보고 자신에게 달라고 해서 익살스럽게 '정말 가소롭고도 웃기는구나'라는 제발을 더 넣은 재밌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불이선란도



열 개의 벼루와 천 개의 붓을 닳게 만든 노력을 한 김정희였길래 세상을 떠난 해인 71세 때 쓴 글씨 '대팽고회'에는 그의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푸짐하게 차린 음식은 두부·오이·생강·나물이고, 성대한 연회는 부부·아들딸·손자라네(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이 글은 명나라의 명인인 오종잠이 쓴 시에서 따온 것입니다. 글씨가 시원시원하지요?

대팽고회

오종삼의 시 내용도 좋지만 양쪽에 조그맣게 쓴 글 또한 좋습니다

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 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한 말(斗)만한 큰 황금인을 차고,
밥 앞에 시중을 드는 여인들이 수백 명 있다 해도
능히 이런 맛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행농을 위해 쓴다. 71살의 과천노인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리었고, 왕실의 외척이자 세자의 사부였으며, 병조참판과 이조참판을 역임할만큼 부유한 삶과 12년간의 유배생활 등 인생의 쓴 맛과 단맛을 다 보았기에 욕심없는 평범한 생활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을 말 그대로 일필휘지, 스윽스윽 쓸 수 있었는게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 행농은 추사가 아끼던 제자였습니다. )


나이가 들수록 자꾸 삶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저도 김정희처럼 저렇게 소박하지만 멋진 글 하나 남기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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